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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by 박순영

유경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자그만 경차안에서 나란히 내리는 커플에서 눈을 뗄수가 없다. 홍이섭, 그리고 유경의 대학 절친이었던 미란. 어떻게 저둘이...



이섭과는 결혼까지 가려니 했다. 그래서 조금 과도하게 그가 관계를 요구해와도 유경은 응했다. 그리고는 상견례날, 이섭은 양가가 다 모인 자리에서 파혼을 선언했다. 더 이상 유경에게 '아무것도 느낄수 없다고'



이렇게 어이없이 깨져버린, 끝나버린 그 인연을 잊지못해 유경은 그 오랜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야했다. 이섭에게 대체 왜 그랬냐고 물었지만 대답은 한결같았다. '우린 너무 오래 만났어'라고. 오래 만난다고 다 헤어지는것도 아닌데 그는 그리도 치명적인 방법으로 그녀를 버리고 가버렸다. 그후 들려오는 말로는 그가 영국으로 학위를 마치러 갔다고 하기도 하고 외국게 회사 홍콩 지점장으로 홍콩에 가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살건, 누구와 살건, 아니면 혼자라 해도 유경과는 더이상 아무 관련도 없는 , 무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러나....잊지못할 그 홍이섭.



그가 그 오랜 세월의 강을 건너 10여미터 앞에서 유경의 절친이었던 미란과 나란히 차에서 내리는 것이었다. 유경은 자기도 모르게 그쪽으로 걸음이 옮겨졌지만 마지막 순간 애써 고개를 돌리고 몸을 틀었다. 흔한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친구의 남자, 또는 친구의 여자와 맺어지곤 하는 일이...그럴만했으니 그렇겠지...그러고보니, 언제부턴가 미란은 유경의 전화를 피하는 눈치였고 어렵게 만나도 자기 속을 털어놓지 않는다는 걸 눈치챌수 있었다. 그때부터였을까...라일락이 이슬비에 고개를 떨구던 그해 여름부터? 그렇다면 유경과 이섭이 헤어진 지 2년 후쯤이었을까...


유경은 장을 봐야 하는데도 그냥 자기 오피스텔로 향했다. 장이라고 해봐야 1층 편의점에서도 얼마든지 해결할 정도였지만 세월의 강을 건너 이섭을 본, 미란과 함께 있는 이섭을 본 그날만은 그 어떤것도 다 부질없게 여겨졌다. 그리고는 씻지도 않고 잠에 빠졌고 한밤이 돼서는 고열에 시달려 119를 불러야했다.


똑똑 늦게 떨어지는 링거액을 바라보며 유경은 이섭도 어쩌면 자기를 봤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유경이 고개를 돌리기 전에 이미 그녀를 봐버렸을지 모른다는...그와 헤어진 후에도 그녀의 전화번호는 여전했고'귀찮아서 바꾸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혹시나 이섭의 전화가 걸려올까 싶어서가 더 솔직한 이유였다.

응급실 베드에 누워 유경은 자신의 호주머니에 들어있는 폰을 꺼내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부재전화가 한통 와있다. 그녀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것만 같다...그러나 이섭의 전화가 아니었다. 수신차단을 하지 않은 스펨전화였다. 순간 링거액만한 눈물이 뚝뚝 유경의 눈에서 흘러내려 베개를, 베드를 적셨다.

"환자분, 많이 불편하세요?"

링거를 봐주러 온 응급실 간호사가 걱정스레 물었을때 유경은 애써 고개를 저었다....


병원을 나설때 그녀의 열은 많이 내려있었고 마침 대기중인 빈택시들도 많았지만 유경은 밤거리를 한없이 걷고 싶었다. 마치 옆에 이섭이 있는 것처럼...


"난 김광석 <거리에서>가 좋아...딱 하나 좋아하는 우리 노래야"

그말을 하던 이섭의 입술에 유경은 살며시 입을 맞췄다.

"넌 뽀뽀가 좋아?"

"응..."

그리고 이섭은 유경의 허리를 안고 비가 돼서 내리는 벚꽃길을 걸었다.

그러고보니 그와 보낸 4계가 참으로 여러번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여름에 찾았던 인공 스키장을 비롯해, 가을 휴가를 내서 찾은 이즈의 온천.

"다음엔 북해도 한번 가보자"

"넌 겨울아이야"

유경의 피부가 눈에 띄게 흰 탓이었을까? 가끔 이섭은 유경에게 '창백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이어서 '어디 아픈덴 없구?'라고 했다. 그렇게 챙겨주던 이섭이었는데 어떻게 상견례자리에서 ....어떻게 그런 폭탄같은 말을 던지고 사라져버릴수 있었을까..



"나야 미란이"

이섭 대신 미란이 다음날 새벽 전화를 걸어왔다. 병원에서 나와 한참 밤길을 걷다 뒤늦게 잡아탄 택시가 데려다준 자기 오피스텔에 들어서자마자 주머니 안에서 폰이 울렸다.

"아..."

"기집애...연락 한번 없구"

그럼 미란이가 자기를 보았단 말일까, 유경은 두다리가 후들거려 간신히 침대턱에 걸터앉았다.

"잘....지냈지?"

"나 이혼했어"

이혼이란 말에 유경은 그만 전화기를 떨구고 말았다. 그럼 이혼한 둘이 한 차에서 내렸단 얘길까...

"한번 봐. 나 지난주에 귀국했아"

'귀국'이란 말에 역시 이섭의 해외체류설이 힘을 얻았다.

"너 시간은?"

"괜찮아 아무때나..프리일을 해서"

"그럼 문자로 시간 장소 보내줘"

그날은 그렇게 유경이 문자를 보내는 걸로 끝을 냈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자신에게 기회가 왔다는 말인가 싶기도 하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구질스러웠다. 미란과 만나기로 한 일이 여간 후회가 되는게 아니었다...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안보고 살다보면 잊힐일인데 괜히 헤집어 놓게 됐다는 회한, 그런 것이었다.



"미란이가 대신 나가래서"

미란과 만나기로 한 프렌치 까페엔 미란 대신 이섭이 나왔다.

유경은 테이블 밑으로 손을 감췄다. 바들바들 떨리는 자기 손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입술이 떨리는것만은 숨길수가 없었다.

"미안했어 그땐"

하고 이섭이 물을 한모금 마시며 사과의 말을 했다.

"미란인 왜 오늘"

"어...너 보기 좀 힘든가봐...그리고 한번은 나도 널 보고 싶어할 거라면서"

"둘이...이혼했어?"

"다시 합치려고"

그말에 유경은 들고 있던 커피잔을 놓쳐버렸고 쨍 소리과 함께 잔은 산산조각이 났다.

직원이 달려왔지만 유경은 자신이 허겁지겁 파편을 줍다가 결국 손을 베이고 말았다.

"조심해야지. 있어봐 약국 갔다올게"하고 이섭은 서둘러 레스토랑을 뛰쳐나갔다.



그날 미란만 유경을 본게 아니라 이섭도 보았다는게 유경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그래놓고 둘중 누구 하나도 자신을 부르지 않았고 다가오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더이상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서'라며 이별을 고한 이섭이 미란에게는 재결합을 '애걸'하고 있다는 사실이 유경의 자존감을 한없이 무너뜨렸다..



이섭이 약국에서 솜과 소독약, 밴드를 사들고 다시 레스토랑으로 들어왔을때 유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옆 바닥의 파편들도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마치 둘이 이곳에 온적이 없기라도 한것처럼...


유경은 그날밤, 둘이 유럽여행에서 사온 기념품들을 서랍 깊숙이에서 하나 둘 꺼내놨다. 자잘한 열쇠고리에서부터 독일에서 샀던 장식용 접시, 네덜란드에서 샀던 작은 배 한척....

그것들을 지니고 있는 한 이섭이 세상 어디에 있어도 결국엔 자신에게 돌아올거라 믿었던 걸까?

그러나 유경은 그날밤 그것들을 박스 하나에 모두 담아 청테잎으로 꽁꽁 싸매 3000원짜리 폐기물 스티커를 붙여 1층 쓰레기장에 내다 버렸다.


자기가 사랑한 홍이섭은 더이상 애정따위를 애걸하는 그런 찌질한 남자가 아니었다. '더이상 아무것도 느낄수가 없어' 과감히 사랑을 버릴줄도 아는 대범한 남자였다. 이제 그 옛날의 이섭은 세상에 없어졌으므로, 유품을 갖고 있든 그와의 흔적들을 지니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쓰레기를 버린 그녀가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뒤에서 김광석의 <거리에서>가 들려왔다. 설마....하고 돌아보자, 이섭이 그 자리에 서있었다..그의 호주머니에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를 용서한다면..."

"뭐라구?"

"나를 용서할수 있다면 너랑 다시 합치고 싶어. "

"뭐? 뭐라구?"

"그래서 왔어.. 미란이와는 행복하질 못했어 . 죄책감 때문에"

그소리에 유경은 그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섭이 재결합을 원하는 상대가 미란이 아닌 자신이라는게 믿기질 않았다. 순간 유경과 눈을 맞추기 위해 이섭도 몸을 낮췄다.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데..."


유경의 귀엔 이섭의 목소린 더이상 들리지 않고 노래 <거리에서>만 들려왔다. 어느새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불렀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이섭이 그녀를 일으키려 했지만 유경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몇번의 시도끝에 이섭은 포기했는지 출입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거리에서>도 점점 멀어져갔다. 유리문이 여닫히는 동안 유경은 자신이 꿈을 꾸는것만 같았다.



(690) 홍이삭 (Hong Isaac) - 거리에서 [불후의 명곡2 전설을 노래하다/Immortal Songs 2] | KBS 250111 방송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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