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인의 부고를 전해듣고 민수는 가슴에 짜릿한 통증이 일었다.왠지 자신이 그녀의 죽음에 관여돼있기라도 한것처럼...
영인을 처음 본것은 신학기 학과 회식에서였다. 학과장a는 과대표가 잡아놓은 중국집 s에 들어서면서 '좀 참신한 데 없어?'라며 볼멘 소리를 하였다. 그러면서도 싫지 않은 얼굴로 학생들이며 다른 교수들과 눈인사를 하며 가운뎃 자리에 착석을 하였다.
'오늘 신입생 환영회도 겸하는거 알지?'라는 그의 말에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신입생들이 긴장하는 눈치를 보였다. 그중에 영인이 있었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듯한 앳되고 말이 없어 보이는 타입이었다.
'지영인!'
학과장의 호명에 영인이 일어났다.
'이번 수석입학'이라는 학과장의 첨언에 방안 분위기가 잠시 굳어지는가 싶더니 이어서 커다란 박수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영인의 자기 소개를 듣던 먼 발치의 민수는, 이곳이 야간대학원이 아니라면 학부회식이라 여겨질만큼 영인의 앳된 모습에 눈이 갔다.
'지영인이라고 했지?'
1차가 끝나고 절반정도가 2차로 노래방으로 향할때 민수는 영인이 무리에서 살짝 빠져나오는걸 보았다. 그리고는 다가가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네 선배님'
'선배'라는 호칭에 민수는 배시시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냥 편하게 불러...집에 가나?'
'네, 내일 일찍 출근을 해야 해서'
'그럼 내 차로 가든가. 난 술 안마셨어'
그말에 영인은 손사래를 쳤지만 민수는 결국 영인을 보조석에 태웠다.
'회사 다니랴 공부하랴 쉽지 않지?'
밤길 운전이라 민수는 조심조심 차를 몰았다.
'다들 그런걸요...'
'문학은 왜...왜 하려고 하지?'
'혹시 선배님, 신춘문예로 등단한'
'재수해서 됐어'
그렇게 둘의 대화는 어색한듯 이어졌고 끊어질만하면 또 계속되었다.
'나 유부남이야. 부담갖지 마'
'아, 네...'
그리고 둘은 풉, 웃었다.
민수는 말그대로 유부남이었다. 아내 은향은 약사였다. 어릴적부터 두집안은 알고 지낸터라 대학중퇴를 한 민수와 은향의 결혼을 놓고 굳이 왈가왈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로라하는 일류대 출신의 약사와 곤궁한 소설가의 결합은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그걸 만회하려는듯 민수는 야간대학으로 편입해 학사를 마쳤고 야간대학원에 입학을 하였다.
하지만 어떤 속내로 은향을 택했건 아이를 셋이나 낳고 사는 부부한테 뭐라 말할 사람은 없었다.
영인은 낮에는 아동서를 주로 만드는 출판사를 다닌다고 했다. 인원이 적다보니 편집을 비롯한 출판일 전부를 맡아 한다고 하였다.
어떤날은 수업에 늦기도 하였고 빠지기도 하였다. 그런날은 민수는 은근 신경이 쓰였지만 그렇다고 유부남 선배가 전화를 걸어 이유를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러다 영인이 수술로 정해진 발제를 못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담당교수에게 전해듣고는 민수는 문병을 가봐야겠다 생각하였다. 조금만 늦었으면 복막염으로 번질뻔 했다며 교수는 꽤나 걱정을 하였다.
분명 힘들게 살텐데 몸도 저리 된게 민수는 여간 안쓰러운게 아니었다. 해서, 민수는 입원비 절반을 대납하고 병실로 올라갔다.
"어머 선배님"
"누워있어....어떻게 된거야. 아이그..."
"저때문에 발제도 펑크나고"
"빨리 나아서 하면 되지 뭐.."
그때 환자복 사이로 살짝 드러난 그녀의 하얀 속살에 민수는 눈이 갔다. 아내 은향의 풍만한 젖가슴과는 다른 아기살같은 그런 가슴이었다.
영인은 민수가 병원비의 반을 대준걸 알고는 '어떻게든 갚겠다'며 여러번 감사의 뜻을 전했다.
민수도 딱히 영인과 뭘 어쩌자는 건 아니었다.그런데 자꾸만 영인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술한번 먹는것쯤이야...
"술한번 사지?"
문예론 수업이 끝나고 나올때 민수가 영인의 뒤에서 중얼거렸다. 영인이 돌아보고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결심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번째 술을 먹은날, 민수는 영인의 원룸에서 그녀를 안았다. 영인은 저항했지만 싫은건 아니어서 결국엔 그를 받아들였다.
둘의 사이가 학과에 스멀스멀 퍼지면서 둘중 하나는 휴학이라도 해야 하는게 아닌가,라는 말들이 돌기 시작했고 어떻게 된건지 민수의 아내 은향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당신 정말이야?'
은향은 따져물었고 당연히 아니라고 잡아떼야 할 민수는 애맨한 표정만 지어보이며 그녀를 피했다. 그리고는 학교 근처 오피스텔 하나를 세로 얻었다.
"저, 아무래도 다음학기 휴학해야 할거 같아요"
"남의 소리 신경쓰지 마"라고 민수는 당당히 그녀를 지켜줄 것처럼 말을 했다.
하지만 영인은 둘의 관계를 그만 정리하려는 눈치를 보였고 오피스텔로 불러도 오질 않았다.. 그러더니 어느날, 그녀는 학교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딱히 휴학이나 자퇴를 한것도 아닌거 같ㅌ은데 그녀를 볼수 없어진 민수는 애가 타들어갔고 급기야 아내 은향과 이혼이야기까지 나오게 되었다. 못할것도 없다는 심정이었다.
영인이 다닌다는 출판사앞으로 민수가 찾아간건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던 저녁이었다.
퇴근시간이 한참 넘어 동료 두엇과 잔뜩 지친채로 건물을 나오는 영인을 보고 민수는 헉, 숨이 멎는것만 같았다. 그저, 불고 가는 바람이려니 했던 것이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선배가 여긴 어떻게?'
'왜 학교 안오지?'
둘의 사이가 묘하게 흐르자 동료들은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우리 안되는 거잖아요. 어차피'
'이혼하면 돼. '
'애들은 요'
'누가 그런거까지 다 신경쓰면서 연애하나?'하고 민수는 그날밤 또 영인을 안았다.. 영인은 계속 안된다고 하면서도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영인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학교, 회사 어디에서도 영인을 볼수가 없었다.
민수는 그런 영인이 한편 답답하게 여겨지기도 하였다. 요즘 세상에, 잘 살고 있는 부부를 갈라놓고 뺏는 일도 다반사인데 영인의 저런 태도는 구태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아내 은향이 영인을 만난게 뒤늦게 밝혀졌다.
'너 미쳤어?'
'나랑 살거면 이제 그만해'
'그래, 너 어린애한테 뭐라고 한거야?'
'울더라. 말없이 울면서 미안하다고'
그렇게 민수는 영인을 눈에서 놓치고 한학기 휴학을 해야 했다. 그동안 아내 은향은 오피스텔 월세를 해지했고 그렇게 민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 어엿한 가장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어젯밤, 영인과 가깝게 지내던 후배 b로부터 영인의 부고를 전해들은 것이다. 그동안 민수는 주간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해 학부 강의를 하고 있어 딱히 지난간 인연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박사학위만 따면 은향의 외조부가 총장인 수도권 2년제 대학에 자리를 맡는것까지 이야기가 돼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칫 예전 여자일이 불거지기라도 하면 모든게 허물어진다는 생각에 민수는 애써 영인의 부음을 외면하려 했지만 그게 잘 되지가 않았다. 그래도 마지막 인사는 해야겠다는 마음에 민수는 영인을 찾기로 하였다. 영정속 영인은 학과회식에서 처음 자기 소개를 하던 그모습 그대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모습이 너무 맑아 서럽기까지 하였다.
민수가 절을 하는대신 꽃을 헌화하고 잠시 눈을 감는데 옆에서 갑자기 주먹이 날아왔다. 정신을 차린 민수가 눈을 떴을땐 이미 자신의 콧대가 날아간 뒤였다. 영인의 얼굴을 쏙 빼닮은 20대 초반의 군인머릴 한 남자의 가격이었다.
코피를 흘려가며 장례병동 주차장을 빠져나오며 민수는 그때를 생각했다.
살려달라고 문자를 해오던 그때의 영인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영인은 분명 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미래도 평판도 다 날아가버린 20대 중반의 여자가 할수 있는건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 나중에 안바로 그녀가 출판사를 그만 둔것도 민수와의 소문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생계가 막막했고 힘든 환경에서도 접을수 없었던 작가의 굼마저 접어야했다. 그리고 , 그리고 민수의 아내 은향에게서 모진말을 들어야했다...
주차장을 다 나와 커브를 틀면서 민수는 자신이 그녀 죽음에 조금이라도 빌미가 되었을까 곰곰 생각해보았다. 안 본 세월이 있는데 그 사이 다른 일이, 다른 남자가 있었을수도, 아마 그랬을거라 애써 영인의 죽음에서 자신을 떼어냈다.
그렇게 집에 돌아온 그는 먼저 잠들어있는 아내 은향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오랜만에 칵테일을 한잔 만들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거실 창가에 앉아, 영인도 결국엔 타고난 운명의 길을 간것이라고, 자신이 아니었어도 결국엔 그리 갔을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칵테일을 음미했다. 수면제를 가득 탄.
pics from google
(699) 홍이삭 (Hong Isaac) - 거리에서 [불후의 명곡2 전설을 노래하다/Immortal Songs 2] | KBS 250111 방송 -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