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윤씬 잘 지냈죠?"
이말만 벌써 몇번을 햇는지 모른다.
경수와 혜윤이 헤어진게 언젠데...
"집에서 가족회의를 했어요...결혼, 안된다고"
전화로 혜윤은 결별을 통보했었다.
둘은 이미 마음을 맞춰 결혼하기로 했건만, 집안에서 반대한다는 얘기였다. 그때 경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고 잘 지내라는 그녀의 마지막 인사를 입술을 질끈 깨물며 들어야했다.
"경수씨도 ...잘 지냈죠"
이러다간 서로의 안부만 묻다 통화가 끝날까 두려워다. 경수는 애써 용기를 냈다.
"그동안, 결혼은?"
"...아뇨, 아직"
그말에 경수의 가슴이 요동을 쳤다. 아직도 혼자라는게 믿기질 않았다. 뭐 하나 빠지는게 없는 혜윤인지라 그 말의 진위여부조차 알수가 없었다.
"한번, 뵙죠?"
"..."
아차 싶었다 경수는.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히질 않아 전화를 했고 그럼 당연히 보자고 하는건 예정된 제안이었는데도 경수는 마치 못할말이라도 한 양 후회가 밀려들었다. 다시 봐서 뭘 어쩐다는 말인가? 한번 어긋났던 인연이 다시 붙기라도 한다는 건가?
"미안합니다"하고 경수가 통화를 마무리하려 하자 혜윤이 다급하게 말을 했다.
"그때 거기...그 끼페"
아.....이 여자도 나를 완전히 잊은건 아니구나, 하고 경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경수는 첫결혼을 사별로 마무리했다. 아내는 어느날부턴가 갑자기 안색이 안좋아지고 소화가 안된다며 식사 후에는 한움큼의 소화제를 입에 털어넣었다....그러더니 위암판정을 받았고 수술은 잘 됏다고 하였는데 어느날 갑자기 전이가 돼서 경수와 아들 찬이를 두고 가버렸다. 고작 결혼 2년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는 이어진 참혹한 홀몸의 시간들,찬이는 보채고 우유를 먹고는 설사를 계속하고 고열에 시달려 아이를 들쳐업고 병원 응급실을 들락거린게 몇번인지 모른다...
주위에서 하는 말이 '여자가 필요해'라는 것이었고 그렇게 보모 역할을 해줄 여자를 찾는다는것에 적지않은 거부감을 느꼈지만 현실을 무시할수만은 없어 몇번의 소개를 받았고 그중 하나가 혜윤이었다. 결혼 3개월만만에 남편에게 오랜 여자가 있음을 알고는 파투가 나버린.
"아기가 넘 이뻐요"라며 어린 찬이의 머릴 가지런히 해주던 헤윤이 경수는 마음에 들었고 혜윤도 같은 눈치였다. 다른 여자들은 좋다고 하다가도 막상 찬이를 보고는 죄다 그를 피했는데.
"식까지 올릴건 없고"라며 경수가 힘들게 청혼을 하자 혜윤은 한번 집에 오라는 초대까지 하였고 그렇게 경수는 찬이를 데리고 혜윤의 아파트에 가서 저녁까지 같이 했다. 둘의 결혼은 다된 듯보였는데 어느날, 그런 전화를 받은것이다. 가족회의 운운하는....
비록 이혼녀긴 해도 저쪽은 아이가 없고 경제력도 있는 터라 부모 입장에서는 애딸린 가난한 글쟁이한테 아이를 주고 싶진 않겠지,하고 경수는 애써 마음을 추스렸지만 그게 잘 되지를 않아 거의 한달 폭음을 하며 견뎌내야 했다....
그런데 겨울끝 봄이 오는 길목이면 어김없이 혜윤이 떠올랐고 그렇게 속앓이를 몇년하다 이번엔 용기를 낸것이다.
"하나도 안 변했어요 경수씬"
"설마요. 나이가 있는데"
그러자 혜윤이 생긋 웃었다. 정말 변하지 않은 건 혜윤이었다.
"찬이도 컸겠네""
"내년에 초등학교 들어가요"
"보고싶네요..."하더니 헤윤은 커피잔을 두손으로 가지런히 감쌌다. 고생한번 안해본 희고 가는 손이 여전했다.
"왜 여태 혼자..."
"그냥 뭐....인연이 안된거죠"라며 혜윤이 남은 커피를 다 마셨다.
"어디 가서 저녁할래요?"
"아..."하고 혜윤이 난처해했다.
그저 예전에 잠깐 인연이 있는 지인이어서 만남을 거절하지 못한거라는 생각이 경수의 머릴 스쳤다.
"오늘 부담됐다면 미안해요"하고 경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연락드릴게요 언제 찬이랑 같이 밥한번 먹어요"라고 그녀가 말했다. 경수는 그것마저 그저 예의상 하는 말이려니 하고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혜윤에게서 연락이 왔다. 밥을 먹자고.
둘이 광화문 그까페에서 만난지 보름쯤 지난 후였다.
"너, 예전에 그 아줌마 기억나? 아줌마 집에 가서 밥도 먹고 했는데"라며 경수가 찬이에게 물었지만 찬이는 처음 듣는 소리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긴 아이들의 기억은 금세 지워지니 그럴만도 하였다.
그렇게 셋은 혜윤이 정한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찬이는 전혀 기억이 안나는지 혜윤을 보고 낯가림을 하는 눈치였다.
"아줌마 나쁜 사람 아냐"하고 혜윤이 찬이의 볼을 살짝 만져주자 그제야 찬이는 경계를 푸는듯했다.
디저트로 아이스크림과 커피가 나오자 헤윤이 털어놓았다. 실은 그후에 선을 봐서 떠밀리듯 결혼을 했었다고..
그말에 경수는 또다시 가슴이 쿵, 내려 앉았다...
"아이가 생기지 않았어요 아무리 해도. 시험관을 해도"
결국 남편은 밖에서 아이를 봤고 시모가 나서서 이혼을 종용, 헤어졌다고 했다.
이 여자의 인생도 참 굴곡이 많다는 생각이 경수를 스쳐갔다. 아니 오히려 잘된 일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선가 들었는데 연이 아니면 아이가 들어서지 않는다고도 하였다.
"요즘도 소설 쓰세요?"
"그것만으로 돈이 안돼서 이것저것 알바도 하고....뭐 그래요"
"그럼 시간 나실때 어디 외곽이라도 나갈까요?"
"회사는 어쩌고?"
"저 백수"라며 그녀가 웃었다. 알고보니 디자인 회사에서 나와 자기 회사를 차렸다고 한다.
그리고는 일주일후 혜윤과 경수, 그리고 찬이는 혜윤이 모는 suv를 타고 서울을 벗어나 외곽으로 향했다. 강에 드리운 나무그림자가 인상적인 곳이었다. 한참 창밖을 보며 신기해하던 찬이가 피곤했는지 잠이 들었다.
경수는 속주머니에 넣어둔 반지를 몇번이나 만지작거렸다. 오늘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거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잠에서 깬 찬이는 경수가 물 수제비를 뜨는것을 신기해하며 자기도 서툴게 돌멩이를 강에 던지곤 하였다...
찬이가 화장실에 간 사이 혜윤이 작정한듯 말을 했다.
"우리 오늘까지만 보기로 해요"라고.
그말에 경수는 움찔하였다.
"또 가족회의라도 했나요? 그래서 이번에도 난 안된다고?"
"그거....거짓말이었어요. 가족회의같은 건 하지도 안핬어요. 경수씨 사랑한건 맞는데 찬이 키우는게 자신이 없어서..."
그말에 경수는 그녀로부터 두어걸음 물러났다
"그럼....그럼....그동안 나혼자만 당신 생각"
"그런건 아닌데...."
"알겠습니다"하고 돌아서다 경수는 어차피 주인도 없는 반지라 여겨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 물에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서울까지 콜택을 하였다.
"왜...제 차가 있는데"라는 혜윤을 무시하고 찬이의 손을 끌고 택시에 올라 거금을 내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한달동안 경수는 미친듯이 소설을 썼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의 가슴 가득 혜윤이 자리할땐 나가지 않던 글이 그녀의 속마음을 알고나니 술술 풀려나갔다...자신이 여자의, 세상의 속마음을 몰라도 한없이 몰랐다는 뒤늦은 깨우침이 글속에 그대로 투영되었고 문단 선배의 권유로 모 문학상에 응모를 했다. 그리고 떡하니 당선이 돼서 큰 금액을 수령하였다.
일간지 신춘문예로 일찌기 등단해놓고도 무명으로 지내온 그에게는 기적같은 일이었다....
"저예요 혜윤이"
한밤중에 걸려온 그녀의 전화에 경수는 뭐라 대꾸하기가 싫었다.
"기사봤어요. 축하드려요"
"고맙습니다. 그럼..."하고 끊으려는데
"내일 시간되시면" 하고 혜윤이 다급해서 만남을 제안했다.
"내일 제가 전화드릴게요"하고 통화를 끝내고 옆에서 새근새근 잠들어있는 찬이를 물끄러미 보다가 경수는 다시 폰을 집어들었다.
"아빠 우리 정말 바다 가는거야?"
"응...아빠 차 근사하지?"
'짱이야 짱!"
조수석에서 찬이는 연신 밖을 내다보며 종알거렸다. 마치 아기새가 지저귀는 거서럼....
그렇게 경수의 차는 서울을 빠져나가 저만치 해안선을 끼고 거침없이 질주했다...
그러는 동안 두세번의 전화벨이 울렸고 발신자는 혜윤이었지만 경수는 받지 않았다.
바닷가 펜션에서 1박을 하고 다시 서울집에 도착했을때 어돔숙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차에서, 자는 찬이를 안아내리는데 옆에서 희고 가는 손이 거들었다...
"당신이 당선돼서 전화한게 아니고"라며 헤윤이 울먹였다.. 경수는 그러든말든 상관없이 다가구 철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뒤에서 혜윤이 소리쳤다. 헤어진 뒤에도 늘 기다렸다고...지난번 ,만나지 말자고 한건 자신이 거짓말 한 죄책감에 그랬지만 그러고도 계속 연락을 기다렸다고.
그 소리에 외부 계단을 오르던 경수가 잠시 숨을 고르더니 고개를 돌렸다.
"기다려요 잠깐만"하고 경수는 찬이를 방에 눕히고 다시 나왔다.
혜윤은 담벼락밑에 쪼그리고 앉아 훌쩍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경수가 살포시 안았다. 그러자 혜윤이 얼굴을 들었다.
"반지는 지난번에 버려서 없어"
"그런거 필요없어"하며 혜윤이 경수의 목을 끌어안으며 흐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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