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지영이. 강지영이지?"
그렇게 10년만에 , 그것도 소도시 아울렛 매장에서 경수와 재회한 지영은 그야말로 꿈인가 생신가 했다.
이렇게도 만나지는구나,하면서.
" 그러게..."
그 뒷말은 이어지질 않았다. 둘은 대학시절,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다 결국 졸업과 동시에 이별을 하였고 그뒤로는 한두사람 건너서 서로의 소식을 전해들은게 다였다.
경수는 동문회에서 초등동창을 만나 결국 결혼까지 갔다고.
하지만 지영은 그러질 못했다. 이별이나 이혼후에 남자들이 먼저 다른 짝을 찾는다는 말이 맞아떨어진 걸까?
"너 뭐 사려구?"
하며 경수가 물었다
"어...남편 옷좀 사려고"
왜 그랬을까? 있지도 않은 남편 운운하며...아직 싱글이라고 왜 당당히 말하지 못했을까?
그렇게 경수와는 붐비는 아울렛에서 스치듯 재회하고 둘은 다시 헤어졌다. 둘은 서로의 연락처도 교환하지 않았다. 어쩌면 둘다 묻고 싶었을지 모르지만 섣불리 입밖으로 낼 얘기도 아니었다. 헤어진 사인데..그리고 지금 서로의 상황도 알지 못하는데...
지영은 그렇게 소도시 출장을 마치고 급히 서울로 차를 몰았다. 그러나 올라오는 내내 경수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경수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아이는 있을까? 당연히 있겠지...왜 서울이 아닌 그 작은 도시에 있는걸까? 그러다 하마터면 지영은 차선을 바꿔 들어오는 뒷차를 보지못해 사고를 낼뻔 하고는 정신을 차리기로 하고는 운전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래봐야, 다시 본 경수의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희고 갸름한 얼굴이 그녀의 마음에서 지워지질 않아 할수없이 세번이나 휴게소에 들러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다.
그때 헤어지는게 아니었어...뒤늦은 후회의 눈물이 우동국물속으로 뚝뚝 떨어져내렸다. 정말 별것도 아닌걸로 둘은 다퉜고 그렇게 졸업과 동시에 각자의 길을 갔던게 여간 후회스러운게 아니었다. 그러고도 지영은 경수를 마음속에서 내보내지 못했다. 남자가 아주 없었던것도 아니건만, 엄연히 다른 '타인의 몸'을 받아들인다는게 쉽지가 않았다....경수도 그런 마음이었을까? 마음깊이 자신을 묻어두고 살아왔을까?
며칠후,취재한 자료를 기사화해서 데스크에 넘기고 지영은 오랜만에 학교를 가보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옛날 기분을 내기 위해 차는 두고 갔다. 지하철로 한참 가던 그 작은 교정, 그래서 유난히도 cc가 많았다는 '그럴듯한 인연론'이 무성하던 그 캠퍼스에 발을 들여놓자 가슴이 뛰기 시작햇다. 경수가 수업을 빼먹고 시간을 보내던 농구코트가 자리한 운동장엔 에전의 경수처럼 농구에 몰두한 일련의 남학생들이 땀을 흘리며 뛰고 있었다...
그렇게 운동장에 시선이 꽂힌채 서 있는 지영의 어깨를 누군가 톡 하고 치는 사람이 있었다. 경수였다. 그는 놀랍지도 않다는 듯이 , 이렇게 만나질걸 알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이, 너무도 자연스레 미소를 띄고 있었다.
"여기 오면 널 볼거 같았어" 경수가 나직이 말했다.
옛기분을 내본다고 구내 식당에서 단출한 점심을 먹고 둘은 천천히 교정을 걸었다. 예전 작은 동산이 있던 자리에 웅장한 바로크식 건물이 들어섰고 사회과학관은 증축한 뒤에 엘리베이터까지 설치해 둘은 신기해하였다. 그리고는 자주 가던 학생회관내 작은 까페....까페라고 해봐야 메뉴도 별로 없는 .
"너 여전히 설탕 안넣지?"
경수가 물었다.
"커피,, 내가 살게"
지영이 키오스크로 먼저 갔지만 그런 지영을 제치고 경수가 능숙하게 기계를 조작해 커피 두잔을 주문했다.
막상 그렇게 까페에 마주 앉으니 둘은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애들은 잘 크지?"
경수가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를 들은것도 아닌데도 지영은 그렇게 물었다. 그러면 서로에게 아직 남아있는 작은 어색함이 가실거 같아...
"사내애 둘이야. 집에서 공차고 난리다"라며 경수가 고른 치아를 내보이며 웃었다. 영락없는 10년전 그 경수였다. 헤어진 뒤 그리도 잊지못해 힘들어한 경수가 거짓말처럼 지금 자신 앞에 앉아있다는게 지영은 믿기지 않았다.
"얼마전 <포르토>라는 영화를 ott에서 봤어. 봤니?"
그 영화는 잡지에 영화평을 올려야 해서 지영이 되도록 러닝타임이 짧은 걸로 고른다고 고른 영화였다. 엔딩 크레딧 직전에, 남주의 죽음을 알리는 문장에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던 기억이 났다.
"<포르토>? 지명이야?"
"안봤구나..."
"무슨 얘긴데?
자꾸 만나지는 두 연인의 이야기라고 지영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렇게 만나지는건 운명이라고....
"어떻게 오늘 여기 올 생각했어?"
지영이 묻자 경수가 대답을 하려는데 주문한 커피를 받아가라는 진동벨이 울려 대화는 끊어졌다.
'혹시 나를 볼까 해서 온거니?' 지영은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밖으로 내뱉질 못했다. 누가 아는가, 학교 서류라도 떼러 온걸지....하지만 요즘 다 온라인으로 가능한데....
"거기 살아? 우리 저번에 만났던"
"그냥 왔다갔다해...거기 공장이 있어서"
"아...사업, 하는구나"
"뭐 비슷한거. 간신히 밥만 먹는"
"밥먹고 사는게 쉽지 않잖아"
그말에 경수가 물끄러미 지영을 바라보았다. 족히 10년은 늙어버린 자신이 경수의 눈에 어떻게 비칠까, 지영은 가슴을 졸였다.
"나, 늙었지 많이?"
"모르겠어. 똑같은거 같은데?"
"설마"하는데 지영의 가슴에 갑자기 통증이 느껴졌다. 아, 하고 지영이 손을 왼쪽 가슴에 갖다대자 경수가 놀라는 눈치였다. 왜? 아파?
"아니.."
어떻게 말할수 있을까? 너때문에 가슴에 통증까지 일었다고...
"갈까 그만?"
"그럴까?"
그렇게 둘은 까페를 나와 정문을 향해 걸었다..
"나 저기서 예전에 농구 참 많이 했는데"라며 경수가 운동장을 보며 말했다.
"지금 해봐" 장난처럼 지영이 말한걸 경수는 행동으로 옮기려는 눈치를 보였다.
"야..."하며 지영이 경수의 팔을 잡았다. 얼마만의 접촉인가? 얼마나 그리워한 그의 몸인가?
"이것좀 갖고 있어"하고 경수가 안주머니에서 퓨대폰을 꺼내 지영에게 주었다.
"정말 하려고?"
"응..."
하고 경수는 윗옷까지 벗어 주고는 농구하는 무리에게로 달려가 함께 뛰기 시작했다.
세상엔 기적이란게 존재한다고 지영은 믿게 되었다. 이런날이, 이렇게 경수가 자기 앞에서 농구하는 걸 보는 날이 다시 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가녀린 희망, 그게 현실이 돼서 지영의 누선을 자극했다....그리고는 자기 손에 쥐어진 그의 휴대폰.
다음달 원고 기획안을 쓰고 있는데 경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할말을 못했다고...
그말에 지영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며칠전 학교운동장에서 경수가 농구에 몰두했던 시간, 살짝 들여다본 그의 휴대폰에 실린 사내아이 둘의 모습, 그리고 그의 아내, 아내로 추정되는 여자의 문자, "현지남을 반났어. 같이 살기로 했어. 당신도 좋은사람 있으면 그렇게 해. 그럼 훨씬 따스한 삶이 될거야"라던...
"아무 말도 하지 마" 지영이 힘들게 말을 했다.
"..."
"이젠 보지 말자"
지영이 아랫입술을 지끈 깨물며 말했다.
"내가....귀찮게 하는거니?"
"아니...시간은....되돌릴수 없으니까...만약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면 추억이 사라질지도 모르잖아. 우리 함께 했던" 지영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숨죽여 흐느꼈다.
"그날 학교에서 너를 다시 만난다면 청혼하려고 했는데. ...너 아직 혼자인거 같아서, 그래보여서. 말로는 남편 운운했지만"
경수의 그말에 지영은 자신이 아울렛 매장에서 '남편옷 '이라며 둘러댔던 거짓말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럼 잘살아"하고 경수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그제야 회한과 미련의 눈물이 지영의 눈에서 뚝뚝 떨어져내렸다.
초여름 라일락이 유난히 아름답던 그 작은 교정, 그곳에 내리던 비...
그때 이미 둘의 이별은 예고된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빗속에 하나 둘 떨어지던 라일락....그 슬픈 향기가 아직도 지영에게 생생히 전해지는것만 같았다.
[풀버전] 그리움을 목소리로 표현한다면...� 섬세하고 깊은 보이스, 김나영 '봄 내음보다 너를'� | SBS '더 리슨: 너와 함께한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