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만하다'의 사전적 해석을 요약하면 '다루기 쉬움'이 된다. 이런 얘기를 꺼내는것은 가끔 나를 '만만히 여기는 '사람들 때문이다.
방송에 처음 데뷔해서 제작국에 드나드는 자체가 조심스럽던 시절, 어느 pd가 할말이 있다고 했다. 그 pd와 작품을 같이 한 적은 없지만 사람좋아 보이는 얼굴이 친근감을 줘서 서로 웃으며 인사를 여러번 나눈적이 있다.
불러서 복도로 나갔더니 그는 자판기 커피 두잔을 뽑아와 다정하게 한잔을 내게 내밀었다. 그렇게 우린 잠시 짬을 내서 나란히 앉았는데 그가 불쑥 "만만해보여서요"라며 말을 꺼냈다. "내가 만만해?"라고 속으로 발끈하기도 했지만 상대가 생사여탈을 쥐고 있는 pd인지라 나는 그저 빙그레 웃는걸로 그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됐다는 뜻을 전했다.
"순영씨 보면 왠지 내 속을 털어놔도 될거 같더라고"하면서 그는 자연스레 말을 놓기까지 하는게 아닌가. 작업한번 해본적도 없는 상태에서. 해서, 어디까지 가나 보자,하고 그의 다음말을 기다리자, 또 그랬다."만만해서" ,라고.
그래서 "내가 만만해요?"라고 했더니 그는 예의 사람좋은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당시만 해도 '만만함'이라 말의 부정적 측면만을 인지하고 있던터라 한마디로 '손쉬운 상대'정도로 받아들인 나는 마음이 상했다. 뭐야 신인작가라고 만만하게 보인다는건지...
그런데 그는 놀라우리만큼 자기 속내를 솔직히 얘기하는게 아닌가. 그는 당시 갓 딸을 낳은 신혼이었는데 옛여자는 아직도 그가 미혼인줄 알고 만나고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다 뒤늦게 그가 결혼한 걸 알고는 분한 마음에 해당 방송국 극본 응모에 자기들 이야기를 써서 지금 최종심까지 올라왔다는 내용이었다. 이제 자신의 치부가 밝혀지는건 시간문제라고 그는 코까지 벌름거리며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나보고 어쩌라고...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정도의 이야기를 숨기지 않고 할수 있는 상대로 내가 '뽑혔다'는 게 조금은 뿌듯하기도 했다. 내가 마냥 손쉬운 상대가 아니라 그래도 미더운 구석이 있는 사람,이려니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해서 나는 "빨리 정리해야겠네 둘중 누구라도"했더니 "아, 정말 고민이야. 그죠? 하고는 자기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이후로 그는 자기의 연인과 어느 외곽에 나갔다 거기로 야외씬을 찍으러온 동료 pd에게 걸려 급기야 그 일이 제작국내에 퍼지고 뭇매를 맞는입장이 되었다. 아무리 그가 잘못한 부분이 있다 해도 어디까지나 개인의 사생활을 놓고 그렇게 입에 게거품을 무는그들을 난 더 이해할수 없었다.그리고는 어느날 "비온 담에 땅이 더 굳는다는데 아이까지 얻었으니 옛사람을 정리하는게 어때요?"라고 먼저 운을 떼기도 했다.
그러자 "마음이...마음이 그게 안돼"라며 그는 고개를 저었고 결국 아내와 이혼하고 '그녀'와 결합해 지금은 잘 살고 있는걸로 안다.
요즘 와서 그 '만만함'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건, 안 그러던 주위사람들이 심심찮게 내게 돈을 빌려달라는 이야기를 해서기도 하다. 혼자 산다는게 '쉬운 상대'로 각인시키는 그 심리를 내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내가 돈을 쌓아놓고 사는것도 아닌데..
해서, 한번은 지인에게 이와 관련된 고충을 토로했더니 "널 믿으니까 그러는거지"라며 나를 다독였다.
그럼에도 나는 "만만하다'라는 말에 여전히 양가적 감정을 갖고있고 물론 네거티브한 부분에 좀더 기울어지는 느낌이지만,팍팍한 세상에서 '저사람은 어째 내 말을 들어줄것 같아'라는 느낌을 준다는 부분만은 긍정적으로 여기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실제 돈을 주고 뭐 그런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일단 여유도 없고.
이런 문제를 넓게 보면, 다 관용 generous의 범위에 들지 않나 싶다. 내가 그리 팍팍해보이지 않는다는것만으로, 그리 봐주는것만도 고마워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누군가에게 조금은 다가가기 쉬운, 그러면서도 약간의 믿음과 난처한 이야기를 꺼낼수있는 그런 상대로 인지된다는 것에 너무 강박적 거부감을 느낄 필요는 없는것 같다. 내가 들어주기 어려운 것이면 정중히 거절하면 되고, 가능한 거라면 그 가능한 선에서 서로 도우면 되는것이다.
더불어 살기,라고 흔히들 이야기하지만 우린 얼마나 고립돼서 사는가. 그럴때 터놓고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도 밑진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그런 사람 하나쯤 있고, 때로는 그런 대상이 되어주는것도 나쁘지 않은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