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귀찮은 진리>

가까울수록 조심해야 하는...

by 박순영

어제만 해도 완연한 초여름이더니 오늘은 하늘이 어둡고 기온도 내려간듯싶고 하늘이 시꺼멓다.

이런날은 꼭 해야 하는 외출아니면 안하고 그덕에 이런저런 집안일 chores를 하게 된다. 누렇게 변색한 플라스틱 용기를 걸러내 버린다든가, 간만에 물걸레질을 해본다든가, 침대 베딩을 갈아본다든가.

이렇게 음울한 날이 내성향에 맞긴 하는거 같다. 너무 쨍 하고 해가 나면 세상속도를 따르지 못하는 내가 부각되는거 같아 괜시리 마음이 급하고 그러다 크고작은 실수를 내기도 하거나 아니면 불쾌한 일을 당하기도 한다.


몇해전 이맘때, 그날도 아마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면서 강풍이 불고 어둡던 날이었던 것 같다. 난 다늦게 귀가하다 단골 마트에 들어가 늘 먹는 과일과 빝반찬을 조금 집어 계산대로 갔다. 마침 계산대가 비어있어 "계산해주세요!"라고 주인을 불렀더니 매대를 정리하다 왔는지 두꺼운 목장갑 차림의 마트 사장이 빠른걸음으로 다가왔다. 아이구, "순영씨 오셨네"라며 그는 서둘러 계산하기 시작했다.


비록 자주 드나들긴 해도 이렇게 이름까지 외워주는 주인은 처음이라 나는 조금 어색하고 , 불편하기도 했지만 나는 티를 안내고 계산이 끝나기만 기다렸다 . 그 마트는 부부가 꾸리고 있었고 동네 주민인지 거리에서도 자주 마주쳐 곧잘 인사를 나누곤 하던 사이였다. 그러니 친하다면 조금은 친한 사인데 그렇다고 이름으로 불리는건 아무래도 민망한 일이었다. 것도 성을 뺀 이름으로만 부른다는게 .

계산이 끝나갈 즈음, 바깥일을 보고 오는듯한 그의 아내가 들어서면서 내게 "오셨어요?"라고 인사를 건넸고 나도"안녕하세요" 인사를 했다. 여기까진 괜찮았는데, 갑자기 남자가 뒤쪽에 세워져 있는 샴푸중 하나를 내 비닐 봉투에 넣는게 아닌가. 하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보너스"라며 씩 웃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이게 뭐지? 라는 기분이 되었고, 남자는 "살짝 유통기한 지난건데 써도 돼요"라며 또한번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 좋은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니....



난 너무 당황해 어쩔줄을 몰라했고 그러다 그의 와이프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녀는 애매하게 웃으며 계산대를 정리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그 상황이 하도 어색해 나는 "사장님두 참...사모님 계신데"하자, 그 와이프가 "다 알아요"라고 하는게 아닌가? 뭘 안다는건가? 난 도망치듯 황급히 가게를 나오는데 그뒤로 "우리 와이프 다음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남자의 외침이 들려왔다.


결론부터 말하면 , 난 그 일을 절친과 상의했고 그 이후로는 그 마트는 가지 않았다. 대신 좀 더 떨어진 다른 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솔직히 난 그 일을 당하고도 그 알량한 단골우대, 즉, 아직 미개봉 상태의 바나나를 살짝 꺼내준다든가, 유통기간이 다한 줄 모르고 사는 경우 알아서 새걸로 갖다준다든가 따위의 '혜택'에 연연해 그냥 다닐까 고민까지 해봤지만 친구는 "너 미쳤어? 당장 가게 바꿔!"라고 소리치는게 아닌가.

그 사장은 내게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것도 자기 와이프가 보는 앞에서. 그런것도 언어폭력이 될수 있는 시대에...


하지만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정류장이 바로 그 앞에 있다시피 해 아무래도 마주치게 되고 그러면 둘다 서둘러 눈길을 피하곤 한다.어제도 그가 바깥 매대를 진열하는걸 보고 나는 급한 마음에 무단횡단까지 했다. 너무나 불편하다 . 내 동네에서 내가 피해다녀야 할 사람이 있다는게...


내가 늘 주장하는게 마음의 , 감정의 흐름은 존중해줘야 한다는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감정이고 마음의 차원이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것과는 다른 일이다. 물론 자기 와이프 다음으로 사랑하는, 이란 단서가 붙긴 했지만, 비열한 행동이었음은 분명하다. 자기 와이프나 내게 모두.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지금까지 통용되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사촌을 잘못 만났다가는 정말 낭패를 본다는걸 난 이 경우를 통해 알았고 나역시 무의식중에, 아님 나도 모르게 오지랖을 부려 이런저런 민폐를 끼치고 다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까울수록 벽은 두터워야 한다는말이, 서로 조심해야 한다는 그 말이 새삼 진리로 여겨지는 그런 아침이다..

지금 또 바람에 창문이 흔들린다. 지금쯤 그 마트 옥외 천막이 바람에 들썩이고있을 것이다. 그가 자기 감정을 컨트롤만 했어도 우린 아직까지 좋은 이웃이었을텐데.. 그의 부주의로 나는 좀 더 먼 가게까지 가야 하고 자기는 단골 하나를 놓치고...


가까울수록 조심해야 한다는건 진리면서도 참 귀찮은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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