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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연습

by 박순영

세상에 이렇게 만나지기도 하는구나 하고 은지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기억도 아득한 그 시간속 남자 윤철을 이렇게 지방 기차역 대합실에서 만난게 너무도 비현실적이었다. 둘다 눈만 동그랗게 뜨고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친구의 남자를 뺏었다는 죄책감에, 그 연애가 수포로 돌아간 다음 은지는 일만 하고 살자 ,다짐했고 정말 그렇게 오랜 시간을 남자 없이 지냈다. 아니 가끔 남자가 생겨도 오래 가질 못했다. 그럴수록 윤철과 함께 한 이틀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아 고통스럽고 마음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우리 그러지 말았어야 해"

은지의 단짝 향미가 원인불명의 복통으로 사흘을 입원한 동안 윤철은 향미 아닌 은지를 찾았고 둘은 죄의식에도 여행을 갔고 거기서 밤을 같이 지냈다.

이 일은 당연히 향미의 귀에 들어갔고 은지는 눈물까지 흘리며 용서를 구했지만 향미는 싸늘한 경멸의 시선만 보냈다. 그리고는 대학을 졸업할때 까지 2년여를 같은 과여서 거의 매일 부딪치는 은지를 향미는 투명인간 취급을했다.


윤철도 향미에게 사죄를 하였지만 은지와 마찬가지로 냉담하게 거절당했다.

그렇다고 은지와 윤철이 이어진것도 아닌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불륜이어서뿐만이 아니라 그들 내면의 죄의이 그리 되는걸 막았다.


그렇게 대학에서 엇갈린 연애사건을 겪고 난뒤 졸업후 셋은 뿔뿔이 흩어져 생사조차 알지 못하는 채로 지내다 이렇게 우연히 지방 기차역에서 은지는 윤철을 만난 것이다.

"나는 서울가는데....어제 출장 내려와서"

그래도 먼저 입을 뗀건 윤철이었다 꽤나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서울가. 나도 출장"

그리고는 둘사이엔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은지가 먼저 개찰구를 나가자 윤철도 두어걸음 늦게 따라 나갔다.

그러다 은지가 게단 중간쯤에서 갑자기 멈췄다.

"커피라도 할래?"

은지가 애써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을 했다.

그렇게 계단을 다 내려온 둘은 자판기에서 커피 두잔을 내려 나눠 마셨다. 분명 할말이 많은데도 말이 돼서 나오질 않았다...

"결혼은 했지?" 윤철이 당연한걸 묻는다는듯이 은지에게 물었다.

"아니 아직..."

"왜...너정도면"

"그러는 윤철씬? 했어?"

"그냥 너라고 불러....난, 갔다왔다. 애도 있어"

"그렇구나..."



그렇게 둘이 플랫폼 벤치에 앉아 간간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어왔다.

"저기....향미 소식 아니?"

"윤철이 남은 커피를 서둘러 마시고 종이컵을 구기며 물었다.

"아니...몰라...걔하곤 그날 이후로, 그래, 그날 이후로 남으로 지냈는데 뭐"

"..."

그러는동안 기차가 앞머릴 보였고 이어서 기다란 몸통을 드러냈다.


"다음에 보면 식사라도 하자"라는 윤철의 말에 은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으레 하는 말이려니 한것도 있지만, 공범으로 살아온 지난 시간이 한꺼번에 쓰나미가 돼서 그녀 뇌리를 강타했기 때문이다...제발 향미라도 잘살아줘야 할텐데,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렇게 기차에 오른 둘은 각자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기차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같은 기차에 둘이 타고 있다는 이 비현실적 상황에 둘다 어색하고 불현하고 조금은 상기됐다.

달리는 열차의 창밖을 바라보던 은지가 잠시 눈을 붙였다 떠보니 어느새 맞은편에 윤철이 앉아있었다.

"언제 또 보겠어 우리가. 이렇게라도 몇시간 같이 가고 싶어서"라며 윤철이 조심스레 운을 뗐다.

어차피 빈 자리라 누가 와서 앉든 은지가 이래라 저래라 할 입장도 아니었고 아직 두시간이나 남은 서울까지의 시간이 무료한 것도 사실이었다.


"우리 그때 왜 그랬을까?"

둘다 향미를 생각한다는 증거였다.

"니가 좋았어. 향미랑 사귀면서도 니가 늘 마음에 있었어"

"그거 잘못이잖아.."

"마음에 도둑이 든거지... 잊자 이제. 시간도 흘렀고 나도 결혼 파투나고, 받을 벌 다 받은 걸로 치니까. 너도 혹시 그 일로 여태 싱글이면"

딱히 그런건 아니었지만 어쩌다 남자가 생겨도 은지는 자기가 향미에게 한 짓처럼 그 남자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집착하고 감시하고 그러다 상대를 질리게 만들곤 해서 결국은 파경을 맞은게 몇번 있었다..

"그래서 죄짓고는 못사는 거 같아"

그리고 둘다 다시 침묵...

향미가 잘 살아야 하는데,그래야 이 둘의 남은 생도 홀가분해질텐ㄴ데, 라는 아마도 같은 생각을 하는 사이 기차는 어느새 서울에 도착했다.


"나중에 밥 사줄게. 연락해"라며 헤어지는 순간 윤철이 회사 로고가 단아하게 박힌 자신의 명함을 은지엑 건넸다. 그걸 받는다고 연락할 수도 없지만, 딱히 거절할 용기도 나지 않아 은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명함을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길을 잡고 은지가 잠시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자 택시에 오르는 윤철이 눈에 들어왔다.

잘 가....



그리고는 다신 만나지지 않을줄 알았다. 그런데 사는 동안 뭐 하나 장담할수 없다고 했듯이 둘은 대학가 레스토랑에서 한달후 해후를 하게 되었다.

점심시간을 좀 지나 한산한 실내엔 바흐가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고 은지는 일때문에 놓친 점심을 먹으러 메뉴를 훑어보았다.

"여긴 정식이 맛있어"라는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설마,하는 눈으로 고개를 든 은지의 눈엔 윤철이 조금은 상기된, 그러나 개구진 표정을 지으며 서있었다.

"나 앉아도 돼?"

윤철이 합석을 제안했고 그렇게 둘은 마주 앉았다.

"바이어 미팅이 이제 끝나서 점심이 늦었어"라며 이번엔 윤철이 메뉴를 살펴봤다.


음식이 나올때까지 둘은 으레적인 안부외에는 달리 할말도 , 나눠야 할 얘기도 없다는듯이 서로 시선을 피하거나 허공에서 잠깐 눈이 마주치곤 했다.

"향미한텐 미안하지만 나 후회는 안한다. 너랑 그런거"

지난번 기차에서 만난 후 한달여가 흘렀는데 윤철은 아직도 그 일이 가시가 돼서 가슴을 후벼파는 듯이 보였다.

"우리가 잘한건 아니잖아"

"물론"

하는데 음식이 세팅되는 바람에 대화는 끊어졌다.

그리고 음식을 다 먹을때 까지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차라리 따로 앉았더라면 밥이나 편하게 먹을텐데, 라고 은지는 살짝 후회를 했지만 윤철로 인해 자신이 떨리는것도 부인할 수 없었다.

"할래 결혼? 나랑?"

그말에 은지는 사레가 들려 허겁지겁 물을 들이켜야 했다.

"애는 전처가 키우고 있어. 나는 한달에 한번씩 보고....애때문에 불편할건 없을거야. "

"너 미쳤어?"은지는 누가 듣기라도 할까봐 한껏 톤을 낮춰 이해할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무랐다.

"우리가 잘한건 아니지만, 죽을 죄를 지은것도 아니잖아"라는 윤철의 눈은 이미 결심을 굳힌 사람의 강렬한 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은지는 더이상 둘이 마주하고 있다는 자체를 견디지 못해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 내가 계산할게"라고 하자

"내가 했다 벌써"라며 윤철도 따라 일어났다.



대학가 특유의 방만함과 자유로움이 뒤섞인 한낮 거리를 둘은 나란히, 또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걸었다 마치 작은 의식을 치르는것처럼...

그러다 앞서가던 은지가 고개를 홱 돌렸다.

"미친놈"

그말에 윤철이 움찔했다.

"그지같은 놈"

하고 윤지는 냅다 달리기 시작햇다.

그렇게 멀어져가는 은지를 윤철은 한참을 바라보다 걸음을 빨리 했다.

힐끔 뒤를 돌아본 은지가 마음이 급했는지 더 속도를 냈고 그런 은지를 윤철이 거의 따라잡을 즈음, 은지는 빈 택시에 올랐다. 닫히는 택시문을 윤철은 열려하였지만 문은 이미 락이 걸령있었다. 그렇게 차는 미끄러져갔다.


정말 오랜만에 은지는 전화번호 주소록을 살폈다.아직도 남아있는 향미의 연락처가 보였다. 뭘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도 없이 그녀는 충동적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당연히 ars가 흘러나왔다. 지금 거신 전화는 결번이오니...

그말에 은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한참 방안 어둠을 응시하였다. 그러다 폰지갑에 넣어둔 윤철의 명함을 꺼냈다. 단아하게 새겨진 회사 로고가 윤철의 안정된 현재를 말해주는 거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은지는 명함을 두손으로 찢으려 했지만 코팅이 돼있어 찢기질 않았다. 해서 화장대 위 눈썹 가위를 집어 잘게잘게 찢었다. 다행이었다. 아직은 윤철의 번호를 외우지 못하고 있다는게...


한달후 은지는 또다시 지방 취재가 떨어져 기차를 이용하게 되었고 이번엔 만나지지 않았다 윤철과. 대합실에서 , 플랫폼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를 기다렸지만 윤철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그의 명함에 새겨진 그 단아한 로고의 회사이름만이 그녀의 뇌리를 맴돌았다. 그것까지 지워야했다. 그래야 완벽했다. 언제 또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어 그를 찾을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는 열차에 올라 그녀는 그 사명社名을 잊으려 이런저런 노력을 했다. 엉뚱한 이름을 대입해 일부러 혼란을 야기한게 먹혔다. 그 결과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머릿속에 윤철의 회사 이름은 말끔히 지워졌다.



그녀는 빈택시에 올라 작가s와 만나기로 한 바닷가 너른 까페로 향했다.. 50분 나옵니다.라는 기사의 말에 은지는 좌석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마치 온수 샤워를 하듯 온몸이 나른한 잠속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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