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합니다. 하루만 맡아주시면 안될까요?"
형진은 아침에 일어나 눈꼽도 떼지 않은채로 옆집 여자의 청을 들어야했다.
"저...죄송하지만"
둘은 오고가다 한두번 마주쳤지만, 아파트 생활이라는게 거의가 그런것처럼 그저 눈인사나 못본척하고 지나쳤으므로 안면을 텄다고 할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예전엔 이사오면 기념 떡을 돌리기도 하였지만 그런 풍습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 되었고 오히려 서로를 못본척 해주는게 에티켓이 되다시피 한 요즘, 난데 없는, 그것도 강아지를 맡아달라는건 어찌보면 무례하고 당돌한 요청일수도 있었다. 뭐, 둘러댈게 없나 하다 형진이 생각해낸 게 있다.
"죄송해요. 제가 강아지 알러지가 있어서요"
라고 그는 둘러댔지만 상대 여자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사례는 할게요 나중에. 딱 하루만...하루만 봐주세요.. 하며 한손에 커다란 흰 봉투를 내밀었다. 아마 사료를 비롯한 강아지 용품인듯했다.
"저도 출근을 해야 하는데.."
"오늘 휴일인데요?"
더는 여자의 청을 물리 칠수 없다 판단한 형진은 한눈에도 믹스견으로 보이는 자그마한 그 놈을 받아들게 되었다.
고맙다는 말을 연신 해대며 그녀는 뒷걸음으로 승강기까지 갔다.. 그리고는 이내 그 안으로 사라지고 문은 스르르 닫혔다.
그러고나자 형진은 비로소 자기가 안고 있는게 사람이 아닌 개라는 걸 다시한번 깨우치게 되었다.
남들은 혼자 살면 외로워서라도 개나 고양이를 키운다지만, 그것도 비용이 만만치 않았고 무엇보다 자신 외엔 신경을 쓰기 싫어하는 형진이어서 그리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자기 것도 아닌 남의, 것도 눈인사 한번 제대로 하지 않은 모르는 여자의 개를 돌봐야 하는 처지가 돼버린 것이다.
녀석은 처음엔 형진을 경계하면서 이빨을 드러내며 사나운 소리를 내기도 하였지만 형진이 여자가 주고간 사료를 내밀자 이내 경계를 풀었고 꼬리까지 살랑거리기 시작했다.. 가만 보니, 눈이 꼭 사람을 닮은게, 그저 사람이려니 하면 하루정도는 견디지 못할 것도 없어보였다. 순간 문득, 인근 천변이 떠올랐다. 거기 주인을 따라 나온 개들이 적지 않은걸 떠올리며 그는 나직이 말했다
"쫑아, 너 다 먹으면 우리 산책 나갈까?"
어느새 형진은 개에게 "쫑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주고 있었다. 그러는 스스로가 우스워 그는 혼잣말로 ''허참'을 연발했다. 그리고는 잠옷에서 트레이팅복으로 갈아입고 그는 쫑이와 함께 천변으로 향했다.
휴일이어선지 그날따라 천변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걔중엔 반려을 동반한 이도 적지 않았다. 어느 초로의 여자 하나는 방금 개가 싼 똥을 조심스레 치우고 있었다.
며칠전 내린 비로 물이 불어난 개천을 보며 쫑이는 처음엔 겁을 내는가 싶더니 이내 물속으로 들어가려고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안돼!"하며 형진이 목줄을 끌어당겼지만 녀석의 힘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렇게 실랑이를 하는데 뒤에서 "형진씨?"하는 기억속 생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돌아보자 수진도 작은 개 한마리를 품에 안고 자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
형진은 그 다음말을 잇지 못하고 시선을 물에 못들어가 안달난 쫑이에게로 던졌다.
"여기 사나 봐?""수진이 자기 개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수진의 개와 쫑이는 같은 종이라고 서로 좋아라 꼬리를 흔들고 캉캉 짖어대기 시작했다.
하도 요란하게 짖어대고 서로를 핥아대서 형진은 당황했다.
"어디 가서 커피라도 마실까?"
수진이 자신의 개를 안아올리며 이 난동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가끔 조깅을 천변에서 해왔으면서도 그 언저리에 까페가 있다는건 처음 본 형진은 오늘 일진이 만만치 않다는걸 알게 되었다.. 난데 없이 남의 개를 맡게 되질 않나, 오래 전 헤어진 옛 여자를 이렇게 엉뚱한 곳에서 다시 만나질 않나...
다행히 까페 주인이 개의 출입을 흔쾌히 허락해 쫑이와 수진의 개는 까페를 빙빙 돌려 서로 따라잡기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개 이름이 뭐야?"
커피를 홀짝이며 형진이 묻자 수진이 머뭇거리더니 "진이"라고 대답했따.
"아...진.."하다 형진은 멈칫했다. 어쩌면 자기 이름의 뒷자를 딴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울컥했다 하지만 둘의 결별은 분명 수진이 원했고 그렇게 갑자기 찾아온 이별을 이길수가 없어 형진은 매달려도 보고 윽박지르기도 했지만 이미 떠난 수진의 마음은 돌릴수가 없었다.
그렇게 헤어진 뒤 간간이 들려온 수진의 소식은 , 그녀가 곧바로 결혼해서 남편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가만 따져보니 수진은 양다리를 한 셈이었고 그걸 애써 빌미로 형진은 수진을 잊어버리기로 굳게 마음 먹었다. 어찌됐든 떠난 사람의 인생까지 자신이 추측하고 염려하고 기억해줄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너, 미국에 산다든데?"
그말에 수진은 저쪽 구석에서 서로를 열심히 탐색하는 두마리 자기들의 개를 일별하더니 다시 시선을 형진에게로 돌렸다.
"헤어졌어. 딸은 남편이 키우고"
요즘, 이혼이 뭐 별거랴 싶어도 막상 주위에서 이혼한 사람을 처음 대하는 형진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알수가 없었다. 자신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떠난 여자지만 그녀가 이렇게 살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잘좀 살지.."
"강아지 이쁘다...저거 비싼 종인데"
그냥 '똥개'인줄만 알았던 '그녀'가 맡긴 저 개가 비싼 좋이라는 말에 형진은 마치 자기 개라도 되는양 으쓱해졌다.
"형진씨 뭐 키우고 그런거 싫어하지 않았나? 화분에 물주는것조차 싫어하지 않았어?"
"저 개가..."옆집 여자의 개라고 말하려다 그는 그만두었다.
"그래서 여기 사는거야?"
그말에 수진은 딱히 대답이 없었다.. 그러더니
"결혼은...했지? 아...와이프가 개를 좋아하는구나"하고 넘겨짚었다.
그러든 말든 형진은 더는 수진으로 인해 흔들리고 마음이 찢기는 일은 원치 않아 그만 일어서려 했다.
"나 저기 살아"하며 그녀가 턱으로 천변 건너편 허름한 빌라 단지를 가리켰다.
의외였다..수진이 그렇게 , 그런 데 살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아마도 혼자여서 개를 키우려니 하자, 형진의 속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더는 안된다는 마음에 "일거리가 밀려서"라며 쫑이를 안고 먼저 까페를 나왔다.
이후 쫑이와 어떻게 그 긴 천변을 다녀왔는지조차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는 상태로 그는 집에 돌아왔다. 하루만이라고 했으니 이밤만 지나면, 쫑이와도 결별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짧은 시간, 어지간이 정이 든거 같았다.
그러나 하루만이라던 여자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소식이 없었다. 형진은 출근을 해야해서 경비실에라도 쫑이를 맡기려 했지만 경비원은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였다. 그렇다고 개를 데리고 출근을 할수도 없어, 쫑이를 그대로 집에 둔채 먹을걸 주고 집을 나섰다. 회사로 출근을 하는 동안도 그는 계속 찜찜했고 혼자 남겨진 쫑이가 불쌍하기까지 했다.
그러다 문득, 쫑이가 가스라도 건드리는 날엔? 하는 불안감이 엄습하자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아 그는 반차를 내고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승강기 버튼을 누르기 전 퍼뜩 쫑이 주인이 떠올라 그길로 곧바로 관리사무실로 향했다.
"어? 그분 이미 퇴거하셨는데요?"
라는 관리실 여직원의 말에 그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럼, 개를 버리기 위해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단는 얘긴데, 생긴건 온갖 휴머니즘의 총체인것처럼 생긴 여자가 모진 일을 했다는게 믿기지가 않았다.
그렇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쫑이는 그새 얼굴을 익혔다고 쪼르륵 달려오며 꼬리를 흔들었다
"야, 니 주인 도망갔어 너 버리고"라고 얘기를 해도 쫑이는 알아듣지를 못한채 혀를 내밀어 형진을 핥아대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쫑이를 유기견 보호소에 데려다 줘야 하나, 어쩌나 하는 그에게 문득 수진이 떠올랐다..수진이라면 자신의 청을 들어줄지도 모른다는 근거없는 생각이 들어 그는 에전 주소록을 뒤졌다. 설마 전화번호가 여전하랴 했지만 그래도 걸어보았다. .그러자 기적처럼 신호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순간 종료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막상 수진과 연결되려하자 그의 가슴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그녀가 왜? 라고 물어오면 할말이 없었다. 어떻게 헤어진, 그것도 자기를 버린 여자에게 , 유기견을 맡아달라 한단 말인가.
그리고는 지역지를 뒤적이며 유기견 보호소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왠지 오싹한 느낌에 천천히 발신자를 보니 조금전 자신이 걸었던 수진의 전화였다.
"나도 오랜만에 만나 이런 부탁하긴 뭐한데...어디 마땅한 데 찾을 때까지만 니가 맡아줄래?"
그는 더듬더듬, 틀리지 않으려고 애써 단어 하나하나에 방점을 찍으며 수진에게 말했다.
지난번 그 까페에서 둘은 그렇게 개를 핑계로 다시 만난 것이다.
"자기 강아지 아니었어?"
수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얘기하려면 좀 길어...아무튼, 좀 맡아줘. 내가 사례는 할게"
그말이 끝나자 수진은 자기들 발치에 웅크리고 잠이 든 쫑이를 내려다 보았다. 녀석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그럴게.. 사례는 필요없어. 마땅한 데 찾을때까지 맡아줄게. 이렇게라도 당신한테 진 빚을 갚고 싶어"라고 그녀는 그의 청을 받아들였다.
이후로 거의 매일 형진은 쫑이를 본다는 핑계로 수진의 집을 찾았고 처음엔 5분,그 다음날은 30분, 그리고 어느날은 그녀와 동침을 했다.
"자기가 싫어서 버린게 아니었어. 그땐 내가 어리석었어. 사랑이라는 감정은 지우려고 지워지는게 아닌데..."
"딸좀 보자"
그러자 수진은 폰 앨범에서 딸의 사진을 여러장 보여 주었다.
"우리가 애를 낳았어도 이렇게 생겼을 거 같아"라는 말에 수진은 울기 시작했다.
"괜찮으면 내 집으로 듣어오든가. 크진 않지만 둘 정도는, 아니 개까지 넷정도는 지낼수 있어 .대신 방값은 줘야돼"
라는 말에 수진은 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우리 다시 가능한거야?""
"좀 살다 이사가자, 단독으로. 그래야 저 개새끼들도 맘 놓고 뛰어다니지"
"난 텃밭도 가꾸고 .."
"내 애 낳아서 아장아장 풀밭도 걸어다니고...."
그날밤 수진은 연신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며,둘의 미래를 칼라풀하게 설계했다.
수진과 합거를 시작한 그 다음날, 아직 수진이 자고 있는 중에 초인종이 요란하게 울렸다.
파자마 바람으로 문을 열어준 형진은 또? 하는 직감이 들었다.
"하루만 맡아주세요. 제가 급한 일이 생겨 시골에.."
"저, 고양이 알러지 있어요 죄송합니다"하고 그는 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러고나서도 하루종일 회사에서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러다 수진에게 전화를 해서 ""너 고양이도 키울수 있어?"라고 물었다.
그말에 "좋지 그럼..."
"개랑 고양인 천적이라는데?
"첨에만 그렇지, 일단 친해지면 말도 못하게 잘 놀아"
그말에, 그의 마음이 흔들렸다... 아침 그여자, 507호? 8호?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아직 내빼지 않았다면 아직은 살고 있으리라....
퇴근한 그는 아파트 승강기에서 내리자마자 이집 저집 초인종을 눌러댔다. 고양이 한마리를 찾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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