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해록‘의 저자 최부 [1454(단종 2) ~ 1504(연산군 10)]는 조선초 단종에서 성종을 거쳐 연산군때 갑자사화로 목숨을 잃은 김종직 문하의 제자이자 사림문신이었다. 그가 제주 경차관으로 부임해있는 동안 부친상을 당해 고향인 나주로 오던 중 표류해서 중국 명나라를 6개월 동안 떠돌면서 남긴 기록이 바로 ”표해록“이다. 여기서 그는 당시 명 중기의 사회상을 상세하게 일기형식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수차(水車)의 제작법을 배워 와 후에 충청도지방의 가뭄해소에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연산군 때, 무오사화에서 유배, 갑자사화 때 참형을 당하였고, 중종때 신원되어서 승정원 도승지로 추증된다. 저서로 ”금남집“이 있으며, 성종때, ”동국통감“ 과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 참여하기도 한 성리학자로서 죽는 순간까지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본고에서는 그가 남긴 ”표해록“에 나타난 당시 명과 조선의 모습을 일괄하고 조선의 성리학과 사림, 명明 중기의 사회상 등을 살피기로 한다. 그리고 제목이 말해주듯 이 글은 ’바다에서 떠돈 기록‘이 앞부분을 이루고 있다. 이렇게 제주에서 중국 영파까지의 그의 여정은 고달팠다.
해양문학을 정의하는 데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대략 ‘바다와 관련된 인간의 삶이 투영된 문학으로서, 바다와 배, 섬, 등대 항구 해안, 같은 자연적이거나 인위적인 조형물과 그런 바다와 관련된 인간의 감성이 작용한 것’이라면 모두 해당된다. 여기서 인간이라 함은, 바다를 업으로 하는 사람과 관조하는 사람을 함께 일컫는다. 이러한 바닷사람들이 엮어내는 그들의 직, 간접체험을 문학형식으로 기록한 것을 해양 문학이라 하고, 이러한 ‘바다’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로부터 문학작품 속에서 다양하게 묘사돼왔는데 성서의 '요나'이야기, 미국소설 “백경” 서양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오디세이아” 반평생을 바다에서 어부와 선장으로 지낸 조셉 콘라드의 “청춘”, 우리의 “심청전” 등에서 ‘구원의 바다’ ‘주술의 바다’등의 다양한 상징적 존재로 인간근원을 성찰하는 모티브가 되어왔다.
최부의 “표해록”역시 바다와 관련된 자연물, 바다와 직,간접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해양문학의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아 해양문학 내지는 해양여행기로 분류될수 있다.
금남 최부의 “표해록”이 갖는 역사적 가치를 살펴보면, 당시로선, 조선인에겐 금기시되던 명의 강남지방에 대해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물론 성리학자의 눈으로 본 명의 모습이다. 그에게 당시 명은 유교적 가치에서 많이 멀어져있었고 도교와 불교를 믿으면서 유교를 멀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상업을 숭상하고 농업을 천시하며, 강남과 강북의 공통점으로 상하 존비의 질서가 없음을 들었다.
참고로 당시 중국은 초기의 성리학적 분위기에 심학적 분위기가 가미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런 의미에서 최부는 명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표해록”이 중국견문록인 조천록이나 연행록보다 훨씬 자유롭게 중국의 현실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중간의 사신왕래나 문화교류에 대해서도 기록을 남겨 문헌적 가치는 한층 높아진다.
" 당시 조선의 사림이나 사대부들은 소중화사상에 충만해 있을 때였다" 조선의 국왕을 황체라 칭하냐고 묻는 질문에 최부는 “하늘에 두개의 태양이 없는데, 어찌 한 하늘 아래 두 황제가 있겠소? 우리 왕은 성심껏 중국에 사대할 뿐이오”라고 답한다. 이 말은 반도국가적 특성때문에 싫든 좋든 사대교린해야 했던 우리의 정치현실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읽힐 수도 있다.
다음은, 성리학자로서의 고지식함이 드러나는 대목인데 상복을 벗으라는 말에 최부는“ 차라리 죽을지라도 효와 신이 아닌 지경에 이르는 일은 차마 할수 없으니 안한다”고 답한다.
다음은 ‘고려사’에 관한 이야기로 조선과 명의 교류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 이곳에서 15리쯤 떨어져 있소. 송나라 조광윤때 고려사신이 조공을 바치러 와서 절을 세웠다고 하오. ” 그러자 최부는 그것은 고려때 일이고 (당시의) 조선은 유교를 존숭한다면서 유교국가 조선을 강조한다.
"고려정"에 관한 언급도 고려와 명의 교류를 증명하는데, 다음과 같은 미문으로 기록되고 있다.. “자정무렵에, 달빛을 받으면서 노를 저어 북쪽으로 가 ...창문밖에는 통파정이 호수를 굽어보고 있는데 옛 이름은 고려정...송 원풍 연간에 세워진 것으로 고려의 조공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정자 앞에는 가옥과 담장이 연이어 있었고, 배가 빗살과 같이 줄지어 있었다. ”
그리고 고려에서 조선으로 국호가 바뀐 것을 다음과 같이 알려준다. “ 지금은 역성혁명을 이루어 조선이 되어 한양에 도읍을 정한 지 100년쯤 되었소. 산천으로 말하면 장백산이 동북에 있는데 일명 백두산...묘향산은 북쪽에 있고, 금강산은 동쪽에 있으며...”으로 조선의 명산들을 언급함으로써 조선 사대부로서의 자존심을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 우리나라는 매년 성절과 정조에 공물을 바칩니다...연호와 법도는 오로지 대명을 따릅니다. ”라 하면서 명에 바치는 조공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다음은 “표해록”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으로 당시 명의 사회상을 기술한 대목이다 . 그중에서도 강남북의 차이를 상세히 논한 부분이 눈길을 끈다.
우선 귀한 손님이 오면 술 대신 차를 내놓는 것을 그는 주시하였고 의복에 대해서도 강남과 강북의 차이가 있다. 그밖에도 강남북 간엔 주택의 모양에도 차이가 있고 해주, 요등 등지엔 중국인 외에도 조선, 여진 사람이 섞여있음을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인심과 풍속에 대해서 강남북의 차이를 이렇게 논한다.
“ 강남은 온화하고 순하여, 형제 또는 사촌과 육촌이 한집에 함께 살았으며..강북의 인심은 매우 사나워서 산동 이북에 이르기까지 집안에서 서로 보호하지 못하니, 싸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겁탈하고 도둑질과 살인이 많았다. 산해관 동쪽의 사람들의 성품과 행동은 더욱 사나워 오랑캐의 풍습이 많이 남아있었다...강남은 농, 공, 상고에 힘쓰고 강북은 놀고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강남에서는 상을 당한 자와 승려는 고기를 먹고 매운 채소는 먹지 않지만, 강북에서는 모두 생선과 고기와 매운 채소를 먹는다. 이것이 강남과 강북이 다른점이다. 같은점은 귀신을 받들고 도교와 불교를 숭상하며 ...사람들 모두 장사를 업으로 하기 때문에 관직을 가진 거족이라도 친히 소매에 저울과 저울추를 넣어서, 작은 이익이라도 자세히 따진다...”등으로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당시, 명의 중심산업이 농업에서 은납을 기조로 하는 상업으로 넘어가는 변화가 엿보이고, 경제적으로 풍요하고 인심도 좋은 강남을 선호하는 최부의 일면을 엿보게 한다. 그러면서도 강남북 모두가 유교적 질서가 해이해지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그밖에 명의 발전된 의학에 관한 기술도 남기고 있다.
그리고 이 표해록에는 중국 남북의 대운하에 관한 묘사도 들어있는데 당시 대운하는 중국 정치 경제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이것으로 남북이 연결되었고 , 남북의 교통역할은 물론 군량과 곡물을 실어날랐다. 이런 대운하에 대한 기술은 다른 “동방견문록”을 비롯한 여타 중국 기행기들보다 “표해록”에서 두드러짐을 갈진가교수는 지적한다. 그리고 표해록의 특징으로 간결하고 정확한 문장을 갈진가는 들고 있는데 북경을 묘사한 부분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북경은 원나라 도성으로 영락년간에 증광 수축했으며 성문이 아홉 개다. 그 남쪽에 정양문, 정양문 오른쪽에 선무, 정양문 왼쪽에 숭문이 있고, 그 동쪽에 동직조양, 서쪽에 서직부성, 북쪽에 안정, 덕승이 있다. 성 중앙에 황성문, 황성문 안에 서원, 태액지, 경호도, 만세산, 사직단, 태묘가 있고 ...”
그리고 명의 부패한 환관정치에 대해서도 최부는 남기고 있다.
"성이 유씨인 태감(내시)이 명령을 받아 서울로 올라갈 때 오색 깃발이 휘날리고 갑옷과 투구를 착용을 하고 종과 북을 두드리고 관현악기로 길거리를 울리게 했으며 강하를 진동시켰다… 유씨는 뱃사람들을 향해 마구 총을 쏘아대니 그 광란은 황당하기 그지 없다."
그리고 빼놓을수 없는 것이 바로 왜구에 대한 기술인데 최부 일행이 왜구로 오인받아 곤욕을 치른만큼 매우 예민하게 기술하고 있다. 왜구에 대항한 고성인 도저소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자.
"행렬이 한 성에 도착하였는데 그 곳이 도저소였다. 성을 중심으로 전후 7-8리 거리에는 군졸이 갑옷을 입고 창, 총, 방패 등으로 무장하고 지키고 있었다. 그 성에는 중문이 있었고 문은 철로 되어 있었다. 성곽위에는 성을 수비하는 초소가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표해록 권1, 정월 19일」, "성곽은 마치 관방과도 같았다."「표해록 권 1, 정월 18일」
이상 “표해록”의 본문에 나타난 다양한 요소들을 살펴보았다. 그 가운데 명중기의 은유통은 많은 농민들을 유민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중요한 사건이다.
“표해록”이 쓰여질 당시의 명은 중기 (1450-1550)에 해당되고 효종 홍치세 (재위 1487-1505)의 기간이었다. 그에 앞선 헌종과 현종시대 41년간은 명의 역사에서 비교적 평온한 시대여서 흔히 ‘중흥의 시대’라고 불린다. 이렇게 사회는 고정화, 보수화 되고 있었다. 하지만 국내적으로는 중흥의 시대였다고 해도 농민 (유민)반란은 끊이지 않았다. 그 계기가 된 것은 은경제로서, 은경제의 농촌 침투는 상인과 고리대에 의한 농민지배를 한층 강화시켜 소농민의 생활을 파탄지경으로 내몰았다. 명초엔 은 사용이 금지되었으나 중기부터 부활되면서 상업의 활성화를 가져온 것이다. 그에 따라 농민들은 유민이 되어 호북성 서북부에 들어와 산간지대를 개간하게 된다. 예로부터 이곳은 도적의 활동무대였으므로 정부는 유민들을 강제로 원거주지로 쫓아보내는 정책을 펴게 되는데 여기서 유민들의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기존의 유교질서가 붕괴돼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티모시 브룩은 “쾌락의 혼돈”에서 이런 은납제로 인한 유민의 발생과 그밖의 당시 명에 대한 모습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명조는 끊임없는 세수 확대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몇가지 관제를 은납으로 대체하게 된다. 일부는 베이징으로 보내지고 그 비율은 점점 커졌다. 은납의 시작은 금화은이 부과된 1436년으로 볼수 있다. 그러다 16세기 말이 되면 이갑제를 통해 징발되던 모든 요역이 일조편법에 따라 토지에 대한 부가세로 과세되어 은납으로 대체된다. 이런 은납화는 은 재고에 부담을 주게 되고, 중앙정부가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른다. 또한 은납이 확대되면서, 상업화가 덜돼 은의 유통이 원활하지 못한 지역은 그만큼 어려워지고 이것은 농촌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어 다량의 유민을 발생시켰으며 그 과정에서 빈민 여성(여아)들의 희생은 상당했다.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하는 여성의 수가 감소했고, 궁핍한 생활은 여아살해까지 낳았다. 아님 하녀나 창녀로 팔려 가는 일도 많았다. 이런 현상은 굳이 유민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남존여비는 뿌리깊은 것이어서, 당시 여성의 덕행은 ‘남편을 잃고도 재혼하지 않고 사는 것’으로 요약되었다. 유교에서 수절과부를 규정할 때 남자친척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여자로 정의한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재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관계를 하지 않는다는 것보다 남자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음을 의미했고, 자식에게 (아들)기대어 사는 것은, 아들에게 의존해 노후를 보장받아야 하는 당시의 상황 때문이었으며, 평생을 ‘수절’하는 이유는 남자의 집안보다 더 높은 명망을 얻어야 비로소 여자가 공적인 힘을 얻을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밖에, 명 중기에는 면직물의 생산이 전문화되고, 농부들은 직접 생산하지 못하는 물건을 얻기 위해 시장에 의존하게 된다. 그리고 명은 표면적으로는 해상무역을 금하면서도 동전이나 비단같은 비 전략상품의 해외유출은 묵인했다. 15세기엔 항구도시가 늘어선 푸젠 연안을 따라 활발한 대 동남아 무역이 성행했다 . 그러다 1520년부터는 밀수와 노략질이 증가하게 되고 15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상인들은 관세를 피하기 위해 , 또, 규제한도 초과 상품의 묵인을 위해 관료들에게 뇌물을 바쳤다. 이런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16세기 전환기엔, 수출입에 종사하는 상인의 수가 급속히 증가하고, 경쟁이 심해지면서 상권 다툼 역시 치열해 무장을 하고 거래를 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중국해안에서 상업적 분쟁이 늘어난 것은 물론 포르투갈인이 온것과도 관련이 있다. 그들은 1500-1520년에 동남아에 출몰하면서 거의 모든 상선을 약탈하고 침몰시켰다. 1511년에 말라카의 주요 무역중심지를 점령하고 그곳에 대규모 공동체를 이루고 있던 중국상인들을 학살하였다. 이런 포르투갈인이 초래한 파괴와 손실은 16세기초 몇십년 동안 연안경제에 일시적 경기침체를 가져왔고 중국정부는 그럴수록 폐쇄 정책을 펴야했다. 하지만 금지 조치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대외무역을 중지시키기 위함이었지 중국인간의 해상교역을 막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명중기로 오면서 유교관이 붕괴되고 있었음은 이미 위에서 언급했다. 농촌이 도시를 닮아가려는 경향을 보였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비웃고 반목하며. 형제간에 우애를 내팽개치고, 계집아이를 대야 물에 처박아 죽이면서도 그 어미는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고 티모시 브룩은 쓰고 있다. 이렇게 명은 도시위주의 산업사회로 진입하고 있었고 이런 가운데 도적이 들끓으면서 ‘재산보호’에 대해 신경 쓰게 된다. 그리고 신사층이 책을 중시했기 때문에 상업출판이 늘어났고, 인쇄술의 확대로 구전문화와 인쇄문화가 공존했다 . 사 (士)와 상(商)의 거리가 좁혀지고 일부 상인이 신사의 세계로 편입되는 과정 역시 주목할 만 하다.
공자의 인과 중용사상에 이의를 표시한 묵자 (BC 475-390?)에 대해 살펴보면, 그는 공자와 거의 같은 시기의 노나라 사람으로 묵가 학파를 창시했다. 묵자는 인간의 노동을 강조했고 노동 자체를 도덕행위에 대한 평가기준으로 파악했다. 그런 그가 “비유 (非儒)”에서 공자의 인격과 행적에 관해 비판했다. 그는 공자의 숙명론을 공격해서 그것이 사회변혁의 싹을 잘라버려 민중의 빈곤을 세습화한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군신을 육친처럼 생각하라고 한 공자가 형나라에 가서 모반자를 뒤에서 도왔다고 질타했고 공자가 예를 강조하면서도 생활은 그것과 달랐다며 그 사례들을 열거했다. 이런 묵자의 이야기가 어느정도 신빙성을 갖는지는 좀더 연구를 요하겠으나, 은경제로 피폐해진 농민들의 유민化, 그리고 유교관이 붕괴돼가던 상황의 연유를 설명하는데 어느정도 참고할만 하다 하겠다. 그만큼 당시의 명은 더 이상 형식과 체면에 얽매여 덕치만을 꿈꾸며 살아가기엔 모든 것이 급박하게 변하고 있었음을 반증하는것이다.
최부 (1454-1504)
이제 제주에서 영파까지, 최부의 심리적 여정을 보면,
‘바다’는 예로부터 생명의 원천이자 죽음뒤의 탄생이라는 삶과 죽음을 동시에 상징하는 존재로 인식돼왔다. 작은배에 몸을 싣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망망대해에서 불안해하는 최부의 모습은 그 자체가 바로 고통으로 점절된 인간 삶의 전형이며 그래서 이때의 바다는 ‘구원의 존재’로 인간에게 희구된다. 하지만 그 바다는 최부의 기원을 외면한채 그에게 고통과 치욕을 안겨주는 변덕스런 존재로 비쳐진다. 여기서 바다의 양면성이 나타난다. “표해록” 중에서 전반부, 즉 1권에서 이러한 고단한 그의 심리를 읽을 수 있다. 그밖에, 그가 겪었을 지난한 고통들은 공황장애, 불안장애,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등으로 설명될만 하다.
“표해록”은 모두 3권으로 구성돼있다.
그중의 1권에 해당하는 부분이 바다를 떠돌아 남중국 연안에 닿는 내용이며 이후는 내륙에서의 최부의 행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1권의 내용을 간략하면, 금남이 제주 추쇄경차관으로 임명되어 현지에 부임하게 된 경위를 약술한 다음, 부친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분상을 서둘러, 홍치 원년 (성종 19년) 윤정월 초3일 배를 출발시키지만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 중국 절동지역에 상륙, 2월 4일 소흥부에 이르러 왜구의 혐의를 완전히 벗을 때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전후 14일동안 큰 고통을 겪으며 표류한 끝에 중국 연해지역에 표착했으나 왜구의 출몰이 잦던 시대로 그 지역인들에게 왜구로 오인을 받거나 포상금을 노리는 무리배들에게 곤욕을 치른다. 왜구침입 정보를 입수한 군리들에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끌려 다니다 왜구가 아님이 밝혀지자 비로소 금남 일행은 군리들의 호송을 받으며 북경을 향해 북상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일행은 영해현과 영파부를 지나게 된다. 소흥부에 도착해, 파총관이 올린 보고서를 기초로, 보다 엄격한 심문을 거친 후, 조선관인으로서 대접을 받게 된다. 소흥부에 이르는 동안 난정 蘭亭을 비롯한 절동 浙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고전적 향수에 젖어들며 점차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된다.
1권에서 최부는 다양한 심리적 변화를 겪게된다. 우선은 부친상을 당해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도 나주로 출발하기 전 침착하게 일을 마무리하려 하고 그 뒤, 무리한 출발을 감행해 바다 위에서 표류하면서 겪는 굶주림과 해적들의 약탈을 겪으면서 치욕감과 자괴감,그리고 죽음에의 공포에 시달린다. 성리학자이자 문관으로서의 자존감도 무너질대로 무너져 이제 죽음만을 목전에 두고 있을 무렵, 중국연안에 닿았음을 느끼고는 살았다는 희망에 삶에의 의지가 더해져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보다 융통성 있게 살길을 모색한다.
순차적으로 그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심리적 변화들을 살펴보면,
최부가 밤에 떠나려 하자 제주출신의 김존려와 김득례 등이 말리는 대목이다.
“노복이 섬에서 태어나 자랐기에 수로를 잘 아는데, 한라산이 흐리거나 비가 와서 일기가 고르지 않으면 반드시 바람의 변고가 있으니 배를 타서는 안됩니다...‘하루에 백리를 가도 밤에는 가지 않으며, 비록 슬프더라도 마땅히 해로움을 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제주인들의 무속신앙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최부는 반나절을 기다리지만 마침내 배에 올라 고달픈 표류를 시작하게 된다. 부친상을 당해 슬픔과 급한 마음에 나주로 향하지만 풍랑을 만나 어디가 어딘지 모를 대양을 떠돌면서 그가 느꼈을 감정은 다름 아닌 공황상태, 그것이었다. 출발 전엔 애써 냉정하려던 그도 드디어 생생한 불안감을 토로한다.
“ 나 또한 익사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혹시 하늘의 도움을 입어 다행히 익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정처 없이 표류하다가 결국 죽음에 이를 것이니 ...”
게다가 부하들은 태풍에도 불구하고 배를 띄운 최부에게 항명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고립된 최부의 눈에 태풍은 무심하기만 하다. 여기서 바다는 더 이상 삶의 원천이자 영원한 회귀의 상징이 아닌 임박한 죽음으로 묘사되고 있다.
“밤에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큰 파도가 매우 심하여 이물과 고물로 물이 빠르게 들어와 들어오는대로 퍼냈다...추위가 뼈를 에이고 목숨은 경각에 달려있었다...배에 있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옆 사람이 목을 매어 죽으려고 했다...”
옆사람이 목을 매어 죽으려는 모습을 본 것은 일종의 정신적 외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자 그는 드디어 하늘에 축원하기에 이른다.
“저는 세상을 살아오면서 오직 충효우애를 마음먹었으며, 마음을 속이거나 모함이 없고, 원수나 원한을 산 적이 없고 내 손으로 살해한 적도 없으니, 비록 하늘은 높지만 실로 굽어 살피시는 바입니다”
성리학이 심즉리를 바탕으로 한다고 하지만 여기서의 최부는 차라리 무속적 태도를 보인다.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 쓸데없는 외피를 벗어던지는 자연인 최부의 모습을 엿볼수 있다.
“ 마른 쌀을 씹기도 하고 오줌을 받아 마시기도 했는데, 얼마 안 가서 오줌마저도 잦아버렸고, 가슴이 타서 목소리도 나오지 않아, 거의 죽을 지경에...”
그러다 드디어 영파부 寧波府 경계에서 해적들을 만나게 된다. 지금까지는 궂은 날씨와 표류, 허기짐이 적이었다면 이젠 인간이 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다가오는 배들을 보면서 정보가 그만 상복을 벗으라고 하지만 최부는 거절한다. 그만큼 사경을 헤맨 뒤여도, 유학자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은 지키겠다는 것이고, 그것은, 죽어야 할 운명이라면 죽겠다는 차라리 체념에 가까운 태도로 읽힐 수 있다.
“해상에서 표류한 것도 하늘의 뜻이요. 여러 차례 사지에서 다시 살아난 것도 하늘의 뜻이다. 이 섬에 이르러 저 배를 만나는 것 또한 하늘의 뜻이다. 천리는 원래 올바르니 하늘의 뜻을 어기고 어찌 속임수를 행하겠는가?”
하지만 최부의 이런 행동은 자칫 자기만의 체면과 위엄을 위해 부하들을 죽음으로 몰수도 있는 이기적인 행동으로 보이기도 하다. 그만큼 선비이자 유가라는 자존감이 뿌리깊음을 보여준다. 그러니 아직도 그는 ‘외피’를 완전히 벗지 못한 셈이다. 그래서 결국 해적 임대에게 곤욕을 치르고 인수와 마패까지 빼앗기지만, 결국엔 돌려 받는다. 하지만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 결국 부하들과 함께 심한 구타와 위협을 당하게 된다.
“ ...나의 머리를 잡아끌고 다시 결박지어 거꾸로 매달았다. 작두를 메고 나의 머리를 베려 했는데, 잘못하여 오른쪽 어깨 끝을 내려쳤다. 칼날이 위쪽에서 나부꼈다. 도적이 또 작두를 들어올려 나를 베려 할 때...도적의 우두머리가 나의 몸을 짓밟고 우리 일행을 큰 소리로 위협했다. 그가 무리를 이끌고 떠날 때, 배 둘레에 묶인 닻줄을 끊어 바다에 던졌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배로 우리 배를 끌어 대양으로 내버린 후에 달아났다. 밤이 이미 늦었다”
작두로 머리를 베일뻔 했던 기억을 훗날 최부가 이렇게 소상하게 기억하고 (“표해록”이 지어진 것은 귀국후의 일이므로) 있다는 자체가 바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말해준다. 환자들은 그 고통스런 상황을 회피하려는 동시에 애써 기억해내서 감정적 중화를 꾀하려는 모순된 모습을 보인다. 해적에 의해 바다에 내던져진 닻줄은 최부의 자기상실로 읽힐수 있다.
그리고는 윤 1월 15일 ‘붉고 탁한 바다’를 만나게 된다. 이 ‘붉고 탁한 바다’ 자체가 당시 최부의 심경을 말해준다 하겠다.
“ 도적을 만나 다시 표류한 이후 사람들은 모두 살 생각이 없었고, 점점 전과 같지 않았다. 배는 거친 파도에 부딪치고, 시간이 많이 지나서 백공천창이 되고 사이가 벌어진 곳은 막는대로 뚫리고 갈라진 틈으로 물이 스며들어 물을 다 퍼낼수가 없었다.”
모든 꿈과 희망을 빼앗긴 그들은 살려고 발버둥칠수록 점점 더 깊은 수렁속으로 빠져든다. 이제 바다와 인간 모두가 그들에겐 죽음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러다 어느 순간, 중국의 어딘가에 도착한 듯한 느낌을 받으며 최부의 지금까지의 비관적 심리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삶에의 의지를 추스리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주위 해안의 풍경까지 소상히 기록하는 여유로움을 되찾기 시작한다.
“...그 사이에 본 바다색이 대개 이와 같았다. 백색으로부터 푸른색으로 돌아온 이후로 바람은 비록 거세었지만 파도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백색으로 돌아온 이후에야 비로소 돌이 많은 섬이 있었다..”
이런것들은 물론 그의 천성적 꼼꼼함에 기인하겠지만 훗날 귀국해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데 도움이 될것이라는 세속적 판단도 가미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만큼, 치밀하고 현실적 가치관의 소유자라고 볼수 있다.
이렇게 최부는 삶과 죽음이라는 바다의 양면성을 두루 체험함으로써 보다 대범해진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서 다시 꼿꼿한 싱리학자 최부로 돌아간다.
“우리 나라는 본래 예의지국이니 비록 표류하고 쫓겨 다니는 궁색한 지경이라도 마땅히 예의바른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곳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예절을 알도록 해야 한다. ..”
하지만 , 조선인은 오직 유학만을 숭상한다면서도 절에서의 유숙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순발력을 보이는 데서 보다 유연해진 그를 느끼게 된다. 병들었던 그의 마음이 점차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군리들이 심문을 위해 길을 재촉하자 최부는 치욕을 ‘느낀척’ 땅바닥에 누워버리기도 한다.
“그 말에 치욕을 느껴 ‘차라리 죽겠다. 마땅히 이곳에서 죽으리라’하며 다시 누워 일어나지 않자, 종자들도 모두 여기저기 누워버렸다”
그리고는 정보를 시켜 허청에게 자신들의 고생담을 소상하게 알리게 하는데, 소상함을 넘어 궁상스럽기까지 하다.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는 의지, 그것이다.
“우리는 바다를 표류하면서 물에 뜨기도 하고 가라 앉기도 했고, 기갈로 죽을 뻔했다가 다시 살아나서...그러나 장맛비와 진창길 속에서 구덩이에 넘어지고 골짜기에 엎어졌으며..마음은 초조하고 힘은 다했습니다. 어제 저녁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오늘 아침도 역시 먹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에게 내몰려 큰 비를 무릅쓰고 움직였으니, 우리는 아마 중도에 넘어져 죽을것입니다”
이것은 차라리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으로 읽힌다. 비록 외적으로는 아직도 성리학자 최부지만 속에선 이미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삶만을 추구하는 자연인 최부가 읽혀진다. 이런 최부일행의 ‘가련한’모습에 허청은 가급적이면 유순하게 다루려고 애를 쓴다. 그러자 최부는 북경과 양자강이 어디쯤 되냐는 질문까지 하는 여유를 보인다. 이제 죽을 일은 없을것이라는 생각을 한 듯 하다. 그리고는 약간의 허풍까지 덧붙인다.
“나는 거듭 과거에 급제하여 쌀 2백석을 받았고, 정문은 3층이니, 족히 (당신은)는 나에게 미치지 못할것이오”
이에 관한 주석을 보면, 미곡 하사와 정문설립은 과장된 것으로 나와있다. 이런 난관들을 헤치고 드디어 그는 ‘가마’에 실려 남은 여정을 계속한다. 최초의 불안과 자괴감, 절박한 죽음, 그 순간 발견한 중국대륙은 그에게 삶의 상징으로 와닿았고 그런 상황에선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차라리 ‘천리’라고 생각한 것 같다. 필요할땐 애원도 하고 과장도 해가면서 그는 마침내 자기와 일행들의 목숨을 구해내는 순발력을 보인 것이다. 꼿꼿한 성리학자 최부의 내면에 이렇게 다양한 기지가 숨어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중국에 관한 외국인들의 기록은 사실 최부의 표해록 말고도 여럿이 있지만 중국의 갈진가 교수는 “동방견문록”을 비롯한 다른 여행기들에 비해 최부의 “표해록”이 당시 중국에 대해 보다 적확하게 기술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바다를 표류하면서도 조선의 대중국 해상무역에 대해 생각지 않는 융통성이 결핍된 소중화사상에 젖어있는 최부를 볼수도 있다. 돈을 천시하는 성리학자이지만 막상 의주로 돌아와 빈한한 의주(조선)의 실정을 보면서 개탄하는 그의 모습도 아울러 나타난다. 그리고 당시 중국 정치 경제의 중심 역할을 하던 대운하에 대한 상세한 기록과 환관들의 부패한 정치, 그리고 은납으로 인한 농민의 유민화현상과 도덕적 해이등도 눈여겨 볼만하다.
“표해록” 1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제주에서 영파까지의 최부의 표류를 심리적으로 살펴보면, 부친상을 당했으면서도 이국의 바다에서 표류하면서 해적과 지역인들에게 치욕을 당해야 했던 선비 최부는 ‘작두’에 대한 서늘한 기억을 훗날 (귀국 후) 상세히 남길만큼 그 정신적 상처 trauma가 컸다. 하지만 그는 병적인 상태에 머물지 않고 삶의 희망이 보이자 파괴된 자존감을 되찾으면서 한편 현실적 타협을 마다 않는 융통성을 보여 그 상황에서도 중국에 대한 기록을 자세히 남기게 된다. 여기서 그가 범인 凡人이 아님을 다시한번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에게 제주에서 영파까지의 기억은 어차피 상처일 수밖에 없다.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바다가 죽음의 심벌로 그를 배반하던 순간의 기억들은 그후로도 오랫동안 그의 뇌리와 꿈을 어지럽히며 반복해서 나타났으리라 생각한다. 참고로, 영파 이후 최부는 당시 명중기의 다양한 사회상과 문화를 접하면서 차근차근 적응해가는 여유를 보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문화심리와 적응’에 관한 몇가지 논의들을 적기로 한다.
이문화심리를 설명하려면 우선 문화피드백에 대한 기본 지식이 필요한데 거기엔 두가지 피드백이 있다.
플러스 피드백과 마이너스 피드백이 그것이다. 문화적응능력은 단시간내에 마이너스 피드백 기능을 정상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이것은 이방인이 이문화교류에 대해 어떤 오류 반응을 보일 때 상대방이 그것을 바로 잡아주는 과정이 원활함을 일컫는다. 이를 통해 쌍방 이해와 용인이 일어나고 이 과정에서 문화충돌이 생겨나기도 한다.
다음은 이문화교류의 개괄적 논의로서, 이문화교류는 고정관념, 편견, 선입견을 갖고 시작하게 된다. 고정관념의 요인은, 정보의 양과 성원의 속성, 그리고 정보의 많고 적음에 좌우되는데, 정보가 적을수록 상대에 대해 고정관념을 많이 갖게 된다. 그밖에,오해나 꾸밈, 지나친 심리보상 (심리적 결합을 보상받기 위해 지나치게 노력하는 것), 트집, 적의형성방어조치등이 원인이 돼서 순조로운 교류방해를 일으키기도 한다. 물론 누구나 자기만의 잣대가 있는 것도 갈등요인이 된다.
쌍방에 대한 신임정도 판단은 권위성, 신망, 목적 일치성, 리더쉽, 활동과 매력 (언어/비언어의 매력) 등에 의해 좌우되고 이중에서 신임은 상대방을 설득시키고 문화의 이미지에 영향을 주며 모방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다음은 이문화교류에서 흔히 언급되는 문화충돌, 또는 문화쇼크에 관한 논의다. 이것은 문화진동이라고도 불리는데 1960년, 문화학자 오베르그가 처음 사용한 말로서, 문화쇼크란 자신에게 숙련된 사회적 교류 신호와 부호 상실, 그리고 익숙치 않은 사회 부호로 인한 심리적 초조감등이 출현하는 것을 말한다.
다음은 이문화에 적응해가는 4단계를 말하는데 밀월, 낙담, 조정, 적응단계 (이 중에서 낙담단계가 생략되는 경우도 있다.)가 그것이다. 성인의 경우 이문화에 대한 지식이 아동보다 많으므로 문화쇼크 역시 그만큼 적다.
끝으로 이문화에 대한 개인의 태도와 사회적 영향관계를 살피기로 한다. 우선 동화형은자신의 기존 문화에 대해 기본적으로 부정적이고 그래서 이문화를 절대적으로 환영하는 경향을 보이는 형태로, 이들은 민족문화 허무주의자로 발전할 수 있다.
다음은 배척형으로 이문화를 배척하고 문화쇼비니즘적 경향을 보이며 이문화에 대해 완고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
다음은 주변형으로 어쩌면 이문화 적응단계에서 가장 많은 유형이 아닌가 한다. 자신의 고유문화와 이문화를 접하고 선택, 충돌하는 과정에서 인격이 분열되고 이중화되는 경향을 보이며, 이들 주변인은 행위준칙, 가치관념 등이 상호 겸용되지 않은 두문화의 구성원이 되길 갈망한다. 하지만 늘 두 문화의 주변부를 맴돌면서 흔들리고 망연자실해하고 충돌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이런 주변인 가운데는 두 문화에 대해 이지적으로,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이도 있다. 즉, 두 문화는 각기 역사가 있어 피차간에 겸용이 어려운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유형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통합형이 있는데,이문화의 특징을 선택하고 흡수할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로 개방적 성격일 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