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직도 문학이니 예술이니 창작이니 하는것들은 타고난 ‘천재’들의 몫이라는 생각이 짙어 결국엔 문학 애호가 정도로 끝나지싶다.
이렇게 서두를 시작하는건, 게이고의 <악의>엔 오랜시간 습작과 노력을 기울여 작가가 되는 과정이 흥미롭게 서술되고 있기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미숙하고 조악한글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고 끌어주는 '귀인'이라는 운도 따라줘야 한다.
그러나 등단했다고 모두가 '잘 나가는‘ 인기 작가나 일류가 되지는 않는다.모르긴 해도 90%는 종국엔 그저 문학이나 글쓰기를 좋아하는 ’아마추어‘선에 머물리라 짐작하고 실상그렇기도 하다. 그만큼, 프리랜서, 특히 문학을 비롯한 창작의 세계는 시대흐름을 잘 따라야 하고 그것을 파악한뒤에도 작가의 위신을 지켜가는 선에서 대중성을 확보해야 하는 자기모순적 시공간이라고 결론지어본다.
이 책은 어릴적 동창 둘 사이에 일어난 일이 훗날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과정에 대한 연속되는 반전의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가 흔히 ’악의‘라 부르는것의 실체에 조심스레, 깊숙이 다가가는 형태를 띄고 있다.
이미 작가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던 히다카가 어느날 작업실에서 사체로 발견되고 그것을 친구인 아동문학가 노노구치가 발견한다. 그리고는 책 중반에 이르기도 전에 범인이 밝혀진다. 이런 전개방식은 웬만큼 노회한 추리전문가가 아니면 생각해낼수도 실행해 낼수 없는 그런 플롯이리라. 그런데 게이고는 초반에 ’범인을 까버리는‘대답한 방식을 택하고 나머지 부분을 얽힌 실타래를 풀듯 차근차근 풀어가는 노련함을 보여준다. 그 범인은 바로 노노구치였다.
그렇다면 그는 왜 절친이며 자신을 문단에 입성시켜준 은인인 히다카를 죽였을까, 하는 의문이 남지 않을수 없다.
히가시노 게이고 <악의> 현대문학 2019.
이 지점에서 우리 안에 내재한 많은 ’선의‘들을 역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으리라. 우리가 상대를 배려하고 지지하고 잘못을 용서해주고 관심을 가져준다는건 우리안의 어떤것에서 비롯되는 것인가,를 이 소설은 에둘러 말하고 싶었던듯하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책을 무척 두껍게 쓰는 작가다. 그럼에도 하루면 완독이 가능한것은 작가가 그만큼 현실과 인간을 핍진하게 그려내는 재능에 기인하는 것이리라. 그만큼 게이고가 ’타고난 천재‘라는 말도 될것이다.
더 이상의 줄거리는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우린 과연 우리에게 은혜와 아량을 베푼 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는가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진정 우리의 무의식까지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는가.
그들에게 예속됐다는 불편함은 없는가.그의 호의가 버겁고 그의 배려가 부담스럽고 그의 해맑은 웃음이 위선일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가. 상대의 선의 뒤에 가려진 '우월 컴플렉스'가 감지되진 않는가.
인간의 삶은 어쩌면 자존감에서 비롯되고 지속되는건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자존감이 타인의 친절과 배려에 의해서도 짓밟힐수 있다는 것이다. 분명 그가 행한 말과 행동이 '선의'라해도 그로 인해 내가 열등감이나 질투를 느낀다면 그것은 무의식 깊숙이 ’악의‘로 커나갈수 있다.그래서 우리가 배신하는건 멀리 있는 ’ 타인‘이 아닌 내 가까이 있는 ’내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린 어떻게든 이런 심리를 숨기려한다.
"하지만 당신은 체포되더라도 진짜 동기는 끝까지 감춰야한다는 ...살인범으로 제포되는것보다 진짜 동기가 모두에게 알려지는게 훨씬 더 무서운 일이었으니까요"
히가시노 게이고 1958-
이 소설에 나오는 가가 형사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유난히 사랑하는 캐릭터중 하나다. 이 책에서도 가가는 조곤조곤 침착하게 그러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추리를 계속해 결국 상대의 가슴속 ’악의‘를 끄집어낸다. 위에서 언급한것과 같은 인간의 양면성에 괴로워하면서도 상대가 비록 가해자나 범인이라 해도 최대한의 다정함과 최고의 선으로 대하려는 높은 인격을 그는 보여준다. 이 가가 시리즈는 <졸업>에서 시작해 <기도의 막이 내릴때>까지 총 10권이 나왔다고 한다.
한국내 1위의 인기작가인 게이고는 이공계를 나와 어렵게 등단한 작가다. 처음엔 대다수의 문학지망생들이 겪는 '퇴짜'를 여러번 맞았다고 한다. 하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방과후>로 에드가와란포상을 수상하면서 작가의 반열에 들어섰고 서스펜스 ,학원물, 추리, 미스터리등 장르를 넘나들며 필력을 과시하는 어엿한 중견이 돼있다.
이 책에는’고스트라이터‘라는 존재에 대한 언급도 있고 그만큼 문학이라는 세계의 복잡다단한 이해관계와 재능, 운에 대한 많은 부분이 서술돼있어 작가를 꿈꾸는이들에게 좋은 지침서가 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