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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제 르포소설 <여수역>리뷰

"운동장에서 안보인께 총 소리만 내면 되는 거시여"

by 박순영

작가 양영제는 후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일본작가 하루키는 개개인에게 그림자가 있듯이 사회, 국가에도 그림자가 있다고 했다. 이 그림자를 직시하지 않으면 그림자는 더 강한 존재가 되어 돌아온다고 했다’

그런가하면

‘불안은 생존욕망의 하녀이고, 이런 하녀 불안의식을 지속적으로 심고 가꾸어 시혜를 받는자들은 다름아닌 친일과 독재권력의 끈을 잇는 권력지향 주체들이었으며 대상은 불안에 중독된 시민이다”라고 쓰고 있다.

양영제의 장편소설 <여수역>은 귀향의 내적 형식을 빌려 1948년 일어난 여순사건의 실체, 특히 정통성을 상실한 국가 권력이 무고한 민간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비극적 양상을 형상화해내고 있다. 이 작품은 여순사건에 대한 그동안의 침묵을 깨뜨리고 여순사건과 국가폭력의 문제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해냈다는 점에 큰 의의를 갖는다.

이 소설에서 귀향과 함게 서사의 중심축은 주인공의 어린 시절의 추억과 기억이고 그것은 참혹하다. 이렇듯 ‘훈주’의 여수에 대한 기억은 수많은 학살과 죽음의 이미지들로 가득 하다.





서울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던 훈주는 어느날 초등동창 형선 부친의 부음을 듣게 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고향인 여수로 내려가면서 어린시절 여수를 기억해내려 애쓴다.

여수에는 당신 귀환정판자촌이라는 빈민촌이 있었고 선로 확장을 위한 철도청 부지 불법 시설물 강제철거가 이루어져 주민들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귀환정 판잣집들은 집이라기보다는 남우세스러운 창고같았다. ..그많은 귀환정 쪽방 사람들이 똥 누는 변소라곤 딱 하나밖에 없었다...귀환정쪽은 철길로 단절되어 기차를 타고 지나가야 스치듯 보이는 섬같은 곳이었다. 공간적으로 단절도 되어있지만 시내사람들과도 단절되어있었다“


어느날 훈주의 조모가 죽음을 맞이하고 밤늦은 시각 훈주의 부친 윤호관은 모친의 시신을 손수레에 얹고 집을 나서고 어린 훈주가 뒤따른다.그렇게 모친을 ‘불법매장’한 그는 아들인 훈주에게 자신이 죽으면 여수에 묻지말고 화장해서 오동도 앞바다에 묻어달라고 한다.

”다시 밤이 되었다. 여수가 어둠에 휩싸이고 사람들 발걸음이 사라졌다. 교회종소리가 울리기전에 윤호관은 시신을 얹은 손수레를 끌고 덕충동을 나섰다. 훈주도 아버지를 따라나서야했다. 할머니 시신은 관에 들어가지도 못한채 손수레에 실렸다.

아부지 왜 우요

훈주야, 니는 말이다. 에비가 죽으면 절대로 여수에 묻으면 안되야..화장을 해서 오동도 앞바다에 뿌리란 말이다“


어느날 훈주의 친구 양숙의 어머니가 업둥이 막내를 업고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굶주림 때문이다.

이야기는 다시 막 해방을 맞은 시기로 거슬러올라가 미군정은 미곡수집령을 내린다. 거기에 경찰 경무대가 합세, 그렇게 일제 강점기때보다 양민들은 더 굶주리게 된다. 미군정은 일제 순사들을 다시 경찰로 고용, 그들은 야수처럼 주민들을 탄압한다. 그리고 미군정은 일제의 재산을 무상분배하지 않고 조건적 불하를 해 주민들의 원성을 산다.



어느날 수정동 일대에 한 미친 여자 거지가 나타난다. 아이 몇이 재미삼아 여자에게 돌을 던진다. 호관은 연탄을 나르다 이 광경을 보고는 아이들을 혼내주기 위해 서로 뺨때리기를 시킨다. 이것은 당시 위정자들이 흔히 시키는 짓이었다. 훈주의 친구 부영과 형선은 돌을 던지지 않아 다행히 굴욕을 면한다.

몇 달후 훈주학교에 소문이 도는데, 그 여자거지가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다. 훈주의 부친, 호관이 거지여자를 동정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폭압과 굶주림이 극에 달하자 전국적으로 미군정에 대항해 봉기가 일어나는데 제주도 4.3 항쟁 진압명령에 항명한 여수 14연대가 군사행동을 일으키고 거기에 좌익계열 시민들이 가세한다. 14연대가 제주진압에 항명한 그날이 1948년 10월 19일이다.

다음날 그들은 마을사람들에게 생필품을 나눠주고 세금감면도 약속한다. 그들은 여수역에 지휘본부를 차리고 기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여수읍 사무실에는 행정공백을 메꾸기 위한 여수인민회가 설치된다. 김구나 김규식과는 달린 민족지도자들을 척결하는 이승만 정부에 대한 저항이었다.

소련군, 미군, 다 물러가라는게 14연대의 구호였다. 이렇듯 여수 순천 인민봉기는 14연대 반정부 군사행동으로 촉발된 시민항쟁이었고 여수 인민대회가 열리고 6개 조항이 발표된다. 친일잔재 청산, 민중에게 쌀제공 등...

이렇게 인민대회가 끝나고 시민들은 여수경찰서까지 행진한다. 경찰서 앞에는 경찰로부터 뺏은 총과 14연대 무기고에서 가져온 일본식 99소총들이 쌓여있다.

청년학생들은 총을 집어들고 치안대를 조직한다. 그렇게 여수는 인민행정이 시작된다. 식량영단창고가 열리며 쌀이 배급되고 은행은 대출을 시작한다.

14연대는 소수만 남기고 순천으로 진격했다. 순천도 이미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14연대가 빠져나간 후 여수 치안을 맡고 있던 청년학생들은 황군출신 군인과 경찰에 도륙당하는 여순참변을 맞게 된다.

”여순 주둔 국군 14연대가 일으킨 군사행동으로 촉발된 여순사건은 정부진압군에 의해 여순참변을 가져왔다. 제주도가 도륙되고 있는것과 마찬가지로 여수 순천도 도룍이라는 참변을 고스란히 맞아야 했다...마을 사람들은 죄다 조합창고에 가두어져 부역자 심사를기다리고 있었다“

계엄이 선포된건 10.25. 그렇게 여수인민대회는 일주일만에 막을 내린다. 계엄군은 여수시를 불바다로 만들고 아이까지 포함된 주민들을 학교운동장으로 끌어내 무자비하게 도륙한다. 여수 부속섬은 부산 5연대 김종원 대위병력에 의해 살육되고 하늘은 미군정찰기, 바다에선 박격포,땅에서는 트럭에 매단 기관단총이 불을 뿜어냈고 결국 주민들은 ‘반란 진압 용사 환영’이라는 현수막을 내걸어야 했다.

진압군은 덕충동 마을 사람들을 밭에 모아놓고 14연대에 부역하면 다 죽인다고 겁박하고 온마을을 불질러버린다.

그때 거지여자의 부친도 죽고 머리통만 찾은 그 시신을 호관이 산에 묻어준 것이다. 이후로 딸인 그녀는 미쳤다.



양영제<여수역>좋은땅, 2020


계엄군은 부역이 확실하다 생각되면 즉각 사살, 의심이 가는 정도면 고문후 살해하는 방식을 택한다.

기가찬건 개엄군이 부역자를 가려내는 방법이었다. 머리가 짧은 남자,머리가 길어도 군용팬티를 입고 있으면 반란군으로 몰아 즉결 사살했다. 그다음은 경찰이 나섰는데 그들은 평소 밉보였던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지목했다.그렇게 끌려나온 남자들은 식구앞에서 몰매를 맞아야했고 결국엔 운동장 뒤편에서 사살되고 생존자들은 서로 뺨때리기를 해야했다.

부역 재심의를 열기도 한 계엄군은 주민들을 여수역 광장을 지나 만성리 굴로 데려가 바다가 보이는 절벽위에서 총살시켜 웅덩이에 몰아넣어 소각시키기도 했다. 딱히 부역이 확인되지 않았어도 일단 의심이 가면 오동도 입구에 가뒀다가 엄마섬, 애기섬 부근에서 총살, 수장시켰다.

이후 여수민들은 레드 콤플렉스에 빠져 침묵하기로 한다.

그리고 14연대 잔류는 지리산으로 숨어들어 빨치산의 원류가 되고 계엄군을 피해 달아난 좌익계열 사람들도 빨치산이 된다.


이야기는 다시 현재로 돌아와 50대 중반의 훈주는 부친이 있는 순천 요양병원에 가기 위해 장례식장에서 만난 동창 부영의 트럭을 타는데 차는 중간에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라는 비석과 맞닥뜨린다. 하지만 뒷면은 그저 점 여섯 개만 찍혀있는 백비인걸 보고 훈주는 착잡해진다.


드디어 순천 요양병원에서 훈주는 부친을 만나고, 같은 병실 노인으로부터 여순참변때 가짜 총질한 이야기를 들으며 뭉클해한다.

”방아쇠 땡기는거이 뭐 힘이 든단가. 그냥 손가락만 까딱하믄 되는거신디. 운동장에서 안보인께 총 소리만 내면 되는 거시여“


여수엑스포역에서 서울행 KTX를 타는 훈주는 드넓은 여수바다를 보며 하루빨리 그 ‘백비’에 합당한 문구를 써넣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작가 양영제는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여수 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소설 <아버지의 무덤>으로 등단했다. 이후 한국 이혼 현상을 사회심리적으로 파헤친 《재혼하면 행복할까》,와 여수관련 르포소설 <여수역> <두소년>을 썼다.


순천광장신문(http://www.agora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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