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청준(1939~2008)은 쉽게 읽히는 작가가 아니다. 부조리한 현실을 뒤틀어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가독성좋고 서정성이 넘치는 <눈길>은 여타 대작들을 뛰어넘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 1,2위를 다툰다. 그만큼 <눈길>은 우리에게 절실한 울림과 끝나지 않는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다.
서정성으로 가득하면서도 한편 "빛과 어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존재의 거울이라 할 수 있는 빛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워 하며 도망 다니는, ‘상실된 자’의 이야기다.
작품 후반부, 아들을 보내고 혼자 눈밭을 헤매이던 모친의 모습이다.
“울기만 했겄냐. 오목오목 디뎌논 그 아그 발자국마다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리며 돌아왔제.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하게 지나거라. 부디부디 너라도 좋은 운 타서 복받고 살거라 ..
갈 데가 없어서가 아니라 아침 햇살이 너무 눈에 시리더구나. 그때는 벌써 동네 아래까지 햇살이 활짝..그렇게 시린 눈을 해갖고는 그 햇살이 부끄러워 차마 어떻게 동네 골목을 들어설 수가 있더냐. 그놈의 말간 햇살이 부끄러워져서..”
이것은, 아들인 "나"에게서도 보여지는데,
“나는 아직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불빛 아래 눈을 뜨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졸음기가 아직 아쉬워서도 아니었다. 눈꺼풀 밑으로 뜨겁게 차오르는 것을 아내와 노인 앞에 보일 수가 없었다..”
이렇게 , 모자 모두 눈밭과 전구 불빛으로 그려진 "빛"앞에서 부끄러워하며 몸을 숨긴다. 외부의 빛과 마음의 어둠이 강렬하게 대비됨으로써 강한 정서적 효과를 불러오고, 그것은 난해하지 않은 이야기 전개 방식의 힘을 빌어 한층 강하게 와 닿는다.
또하나, 작가 이청준이 즐겨 다루는 모티브는 "고향"이다. <눈길>은 그러한 모티브가 매우 개인적이고 치밀하게 그려진 작품이다. 고향과 모친은, 존재의 출발점이자 근원이다.
우선, "고향"의 의미를 살펴본다. 객지를 떠돌던 사람이 돌아가 쉴 곳은 언제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묻어있는 고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고향은, 찾았다가도, 하루 이틀이면 다시 돌아서야 하는 불편한 장소로 그려진다.
“지열이 후끈거리는 뒤꼍 콩밭 한가운데에 오리나무 무성한 묘지가 하나 있었다. 그 오리나무 그늘에 숨어앉아..나는 금세 어디서 묵은 빚 문서라도 불쑥 불거져 나올 것 같은 조마조마한 기분이었다..”
고향에 내려가 모친이 살고 있는 집을 "숨어서"본다는 표현부터가 고향에 대한 화자의 불편한 심기를 나타내고 있다. 술 때문에 집까지 날리고 처와 아이들을 남기고 일찍 세상을 뜬 형 때문에,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화자는 그래서 그런 기억이 묻어있는 고향에만 가면, "빚"생각이 나고, 그것은, 멀리서 모친의 집을 보기만 해도, 또 모친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떠오른다고 표현하고 있다.
고향의 또다른 이름, 모친에 대해 작가 이청준은 둘은 천륜관계임에도 , 화자는 그런 모친을 끝까지 "노인"이라는 삼인칭으로 부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둘 사이를 "빚"을 조건으로 하는 단순한 거래 관계, 내지는 채무채권의 관계로 설정하고 있다. 이것은, 그 "노인"이 의치를 해넣거나 치질 수술을 받아야 할 때도 아들로부터 단순한 "말선심"정도나 끌어내는 존재로 그려지고, 집을 새로 짓고 싶어할 땐 "노망났다"고 표현된다
“어쨌든 노인이 이제라도 그 집을 새로 짓고 싶어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아무래도 알수가 없는 일이었다...노인은 정말로 내게 빚이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만 것일까. 노인의 말처럼 그건 일테면 노망기가 분명했다. 그런 염치도 못 가릴 정도로 노인은 그렇게 늙어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노인이 반듯한 집을 갖고 싶어하는 것은, "집 욕심 때문이 아니라 나 간 뒷일이 안 놓여"라고 한다. 하지만 노인의 진심이야 어찌됐든,"나"는 , 그런 노인이 짐스럽기만 하고, "빚"도 없건만, 자꾸 "빚독촉"을 하는 귀찮은 존재다. 그래서 모친이 고집스럽게 끌고 다니는 작은 "옷궤" 또한 아픈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모친의 분신이자 또 하나의 "집"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눈길>에서의 "고향"과 "모친"의 모티브는, 불편하고 어색한 , 피하고 싶은 대상으로 그려진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무리 해도 피하고 떼어낼 수 없는 운명적 관계임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작품의 인물구도역시 눈길을 끄는데, 화자인 "나"와 모친인 "노인" 사이에 "아내"라는 중간자가 개입해서 이야기의 전말을 밝혀내고 있다. 내가 궁금해 하는 것을, 아내가 알아내고 , 내가 느끼는 것을 , 아내가 표현해서, 결국 내게 슬픔과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방식이다. 이것은, 모친과 나의 관계가 , 그만큼 일정 거릴 유지할 수밖에 없는, 불편한 과거를 공유한 존재들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아내"는 독립된 등장인물이면서 "나"의 분신이기도 하다.
극적 효과를 배가시키키 위한 반어법도 등장하는데 <눈길>에서 가장 주의를 끄는 것은, 바로, "내"가 "노인"에게 절대 '빚이 없음'을 거듭 강조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 부분은, 작품 안에서 수없이 언급되고 있다.
“노인에 대해선 처음부터 빚이 있을 수 없는 떳떳한 처지였다... 빚이 있을리 없지. 절대로! 글쎄 노인도 그걸 알고 있으니까 정면으로는 말을 꺼내지 못하질 않던가 말이다..그 옷궤만 보면 무슨 액면가 없는 빚 문서를 만난 듯 몹시 기분이 꺼림직스러워지곤 하던 물건이었다..잠이나 자자. 빚이고 뭐고 잠들면 그만이다. 노인에게 빚은 내가 무슨 빚이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 "빚"얘기는, "아내에겐 한번도 들려준 일이 없는 그날 새벽의 ‘서글픈 동행’이야기가 시작된 뒤부턴, 작품에서 사라지게 된다.
“노인의 말마따나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 내가 미끄러지면 노인이 나를 부축해 일으키고, 노인이 넘어지면 내가 당신을 부축해가면서, 그렇게 말없이 신작로까지 나섰다.하지만 나는 그 길로는 차마 동네를 바로 들어설 수가 없어 잿등 위에 눈을 쓸고 아직도 한참이나 시간을 기다리고 앉아 있었더니라..”
그러나 노인의 이 기막힌 아침의 사연은, 차후, 내게 새로운 "빚"으로 남을 여지를 충분히 남기고 있다. 그렇게 해서, 나의 "빚없음"은 영원히 "빚있음"이 되고 그것은 바로, 모자관계의 본질-영원히 청산될수 없는 부채감을 공유하는-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는 얘기가 역설적으로 비로소, 모자간에 화해가 시작됐다 볼 수 있다.
그리고 끝까지 화자가 모친을 "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노인"이라 부른 것은, 모자간의 슬픔과 화해, 정화의 도를 한층 견고히 하는 (억제함으로써 더욱 강조되는) 효과를 내고 있다.
작가는, <새가 운들>을 먼저 쓴 뒤, 이듬해 이 <눈길>을 썼다고 한다. <새가 운들>은 <눈길>과 비슷한 이야기를 갖고 있으나, 다른 점이 있다면, 모친이 죽은 줄도 모르고 고향으로 모친을 뵈러 간다는 부분이다. 그래서, 작가는 <새가 운들>을 <눈길> "밑그림"이라 표현하고 있다.
“나의 시골 고향 사람들은 자기 집안이나 신상의 불상사를 늘 자신의 부덕과 허물 탓으로 돌려 스스로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곤 했다...그것은 그저 소박한 자기 원망이나 체념이 아니라 밝은 빛을 두려워 하고 그 빛 앞에 나서기를 부끄러워 하는 일종의 원죄의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도 아직 그 빛에 대한 두려움과 고향사람들에게서와 같은 원죄 의식 비슷한 것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하고..내 혈관과 뼛속에는 애초부터 그 빛에 대한 부끄러움과 원죄의식 같은 것이 숙명으로 점지되어 깃들여진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