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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영 Oct 05. 2023

소설 <늪>

기수는 뜬금없이 걸려온 민지의 전화에 뜨악하기만 하다. 헤어진 게 언제가. 이후 그녀는 의사와 결혼해 쌍둥이를 낳았다는 얘기까지 들려왔다. 

전화기너머에서 민지는 예의 천진함으로 그의 안부를 물어왔다. 잘 지내냐고...

그리고는 불쑥, 너 a 아파트 살지 않니? 하고 묻는 것이다. 난데없이 사는 곳은 왜 묻는걸까, 기수는 영 개운치가 않다.



헤어지던 그날도 민지는 너무나 태연하게 기수와 저녁을 같이 먹었다. 그의 원룸에서.

"나 결혼해"

"뭐?"

"우리 그만 만나"

"야!"

이게 그들이 나눈 대화였고 민지는 마지막으로 한번 자자는 말까지 남겼다. 갑작스런 이별통보에 결혼이야기까지, 그리고 마지막 의례처럼 동침을 요구하는 민지를 기수는 더이상 봐줄수가 없어 끌어내듯 그녀를 원룸밖으로 내쳤다. 그리고는 답답해서 창을 열자 겨울바람이 확 끼쳐 들어 왔다.



그렇게 5년 넘은 연애를 뒤로 하고 그녀는 강남에서 피부과를 한다는 의사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기수는 애써 무감하게 듣는척하고 이듬해  반은 오기로 소개받은 지금의 아내 현경에게 두번째 만난 자리에서 청혼을 했다. 

"우리, 서로 아나요?"

하며 현경은 보조개를 파며 청아하게 웃었다. 그 미소가 나쁘지 않다고 기수는 생각했고 그로부터 두달후, 둘은 초고속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이듬해 딸 진이 태어났다.



"우리좀 볼래?"

전화기너머에서 민지는 둘의 길었던 연애며 일방적 결별통보 따위는 없었다는듯이 너무도 태연하게 만남을 제안해왔다. 

"우리가...불일이 있을까?"

기수는 다 된 기획안을 검토하면서 대답한다.

"할 얘기가 있어. 양해를 구할일도"

양해,라는 말에 기수는 겁부터 난다. 또 어떤 폭탄을 터뜨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잔뜩 긴장한다.

그리고는 민지는 일방적으로 약속을 정하고 역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는다.



여기저기 거래처며 지인들 때문에 오랫동안 전화번호를 바꾸지 않은게 기수는 여간 후회가 되는게 아니었다. 결혼까지 한 민지가 여태 자신의 전화번호를 갖고 있다는 것 역시 탐착지 않고 조금은 의아한 부분이다.


"나 a아파트로 이사 하려고 해"

민지는 다리를 꼬며 그렇게 내뱉는다.

"왜 하필!"

기수가 발끈하자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는다.

"대한민국은 거주의 자유가 있어. 몰랐니?"



기수는 의아하기만 하다. 남편이 의사면 굳이 서울 중심도 아닌 a단지로 이사를 올 이유가 없다. 강남 한복판도 가능할텐데...그런 기수의 마음을 읽었는지, 민지는 잠시 텀을 두었다 입을 연다.

"나 이혼했어"

그말에 기수는 , 이 여자는 뭐든 쉽구나. 오랜 애인을 쳐내는 거나 요란스레 한 결혼을 파투내는거나...그리고는 이제 자기가 사는 a아파트로  이사를 오겠다고 한다. 



"니가 뭐가 모잘라서 우리 단지로 온다는거야?"

"우연히 알게 됐어. 성욱이한테 들었어. 걔가 그러드라. 너 거기 산다구"

성욱은 기수의 대학동창이고 민지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그랬다면 헤어진 이후에도 민지는 기수의 근황을 들어왔을게 뻔하고 거기까진 생각이 미치지 못한 자신의 둔감함에 기수는 화가 치민다.

"그러니까 왜 하필 우리 단지냐구!"

발끈한 기수를 민지는 재밌다는듯이 바라본다. 

"내가 가진 돈이 그거밖에 안돼. 나도 센터에 살고싶지. 근데..."

기수는 순간 궁금하다. 의사와 살다 이혼했으면 위자료를 어느정도 받았을테고 그러면 굳이 지금 외곽의  a 아파트까지 흘러들어올 올일이 없을텐데, 하는 생각과 함께 짜증이 치민다.

"너 몇동 살아? 몇평이야?"

그말에 기수는 더이상 민지와 마주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저기 이사하네"

둘째를 가진 아내 현경이 부른배를 쓰다듬으며 건너편 동에서 이삿짐 올리는 사다리차를 보며 말한다.

"부동산경기가 회복세는 맞나보네" 하고 현경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게.."라며 부부가 돌아서려는 순간 기수의 눈에  이삿짐 인부들에게 음료를 돌리는 민지가 눈에 들어온다.

"저게...저게..."

당황한 기수를 보며 현경은 왜?라는 표정을 짓지만, 기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씩씩대며  자기집이 있는 동으로 향한다. 왜 저럴까, 하는 표정으로 현경이 그 뒤를 따른다.



딸 진이는 이제 한창 이쁜 짓을 한다. 태어날때 미숙아로 태어나 한달을 인큐베이터 신세를 졌지만 퇴원후 부부의 극진하 보살핌으로 이제는 양볼이 터져라 살이 올랐고 엄마보다 아빠 기수를 더 따르는 눈치다. 

"딸들은 다 그래"라며 성욱이 언젠가 말한적이 있다. 성욱은 연년생 딸을 두었고 해서 아들 욕심에 하나 더 낳을까 한다면서도 딸들이 이뻐 죽겠다는 눈치다.

"당신 아까 왜 그랬어?"

저녁설겆이를 하며 현경이 물어왔다.

"뭐? 아...아니....그냥..."

이제 와서 오래전 헤어진 여자 이야기를 못할것도 없지만, 그 여자가 같은 단지, 것도 맞은편 동에 왔다는 이야기는 차마 할수가 없었다. 기수는 끊었던 담배 생각이 나는걸 억지로 참는다.

"응..."

현경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기수는 다음날 아침 차에 시동을 걸면서 맞은편 동 9층을 쏘아보며 이를 갈았다. 며칠전부터 시동이 한번에 걸리지 않아 조만간 공업사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몇번의 시도끝에 시동이 걸리자 그는 오전에 잡힌 바이어와의 미팅이 시급해 재빠르게 단지를 빠져나간다.


"얘기했잖아. 대한민국은 거주의 자유가 있다고"

단지 근처 까페에서 미진은 뻔뻔하게 대답한다.

"꼭 여기여야 했냐고"

"애들은 남편이 맡았어"

"내가 그런거 묻는거 아니잖아."

"잘 지내보자 기수씨"

그녀는 지난 세월의 뒤틀림과 망각은 완전 무시하고 그렇게 기수의 삶을 휘젓기 시작했다.



기수는 그 다음날 성욱을 만나 왜 미진에게 자기 사는 곳을 알려줬냐며 화를 냈다. 

"왜, 걔가 그리로 이사라도 갔냐?" 라는 성욱의 말에 기수가 대답이 없자 "설마..."하며 성욱의 입이 크게 벌어진다. "개 대박이다."라며 성욱은 머쓱해한다. 그리고는 "미안.."이라며 어찌할바를 몰라한다.


대단지도 아니고 마트라고는 아파트 상가를 이용하는게 태반인지라 현경과 미진이 마주치는건 시간 문제였다. 물론 서로의 얼굴은 모르지만, 말이라도 섞는다든가 그러다 친분이라도 쌓는 날엔 완전히 싸구려 영화를 찍는 꼴이  되고 만다는 생각에 기수는 회사에서도 불안해했다. 해서 어느날은 문득 현경에게 전화를 해서, "마트 가지 마"라고 까지 했다. "뭐? 뭐라구?" 이유를 알리 없는 현경은 되묻기만 했다.

여자들이라고 꼭 마트에서만 마주치랴...단지를 산책하거나 인근 미장원이나 베이커리, 그밖의 어느곳에서도 마주치고 말을 섞을 수가 있는게 아닌가...

이런 생각들이 증폭되자 기수는 미진이 반드시 목적이 있어 이곳으로 온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같은 말 몇번이나 해야 돼? 대한민국은"

"그래, 아무데서나 살수 있어. 근데 왜 하필 여기냐고!"

기수가 큰 소리를 내자 까페안의 다른 커플이 기수네를 힐끔거린다.

안되겠다 싶어 기수는 민지의 팔을 잡아 끌며 까페 밖으로 나온다. 그러자 맞은편 철물점 사장이 아는체를 하며 인사를 건넨다. 이 동네에 산 지도 꽤 됐으니 이런저런 인연들이 생겨난건 당연하다. 사장의 인사에 기수는 잡고 있던 민지의 한팔을 빠르게 놓는다. 아팠잖아...라며 민지가 투덜댄다.



기수가 줄담배를 피우는 동안 민지는 공터에 아무렇게나 적재돼있는 건축자재 위에 말없이 앉아있다...

"언제까지  담배만 필거야?"

민지는 조금 짜증스레 물어온다.

"너 이사가!"

기수는 잔뜩 화난 얼굴로 민지에게 다가온다.

"싸구려 영화찍는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이야!"

그말에 민지는 피식 웃는다. 그리고는 한참 기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내가 이사와서 너하고 뭐 하자고 했니?"라며 되레 발끈해한다.

"니가 왔다는 자체가 나한텐 스트레스야. 애들 엄마한테 미안하고!"

"니 와이프는 연애한번 안하고 시집왔다니? 대박..."

"너 그럴래 정말?"하고는 기수는 자기도 모르게 한손이 올라갔다. 

"너 그러다 치겠다?"

민지는 그러면서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댄다. 때려보라는 식이다.

기수는 흙바닥에 침을 퉤뱉고 공터를 빠져나온다. 밤이 내리고 있어 자칫 불량배라도 드나들수 있다 생각돼 힐끔 뒤를 돌아보았을땐 이미 민지는 그 자리에 없었다.



기수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오랜만에 내리는 비여서 구경도 할겸 손에 비도 묻힐겸 복도로 나와 아래를 일별하다 앗! 소리를 지를뻔 한다. 우산 속에 가려져있긴 하지만 분명 민지와 현경이 딱 붙어  걸어오고 있다. 둘은 장을 봤는지 손엔 저마다 장바구니가 들려있다. 아마도 마트에서 마주친것 같다. 

설마설마 하던 일이 현실이 되자 기수는  순간 어지럼증을 느낀다. 민지의 의도가 뭘까? 그녀는 이미 현경의 존재를 알고 의도적으로 점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마주치려니 했지만 기수가 상상한 그 시간보다 한참 앞당겨 두 여자는 만났다...



"참, 나 오늘  친구 생겼다?"

현경은 나물을 무치며 자랑하듯 떠벌린다.

기수는 그말에 뜨끔하다

"어...어디서?"

"응..마트에서...저지방 우유가 하나밖에 안 남았드라구. 그걸 동시에 집었거든. 근데, 양보하는거야."

"...."

"내 또랜거 같고 감사해서 내가 언제 집에 초대한다고 했어"

"뭘 그깟일로 초대까지 해!"

벌컥 화를 내는 기수의 태도에 현경은 두눈이 휘둥그레진다. 

"애 놀라.."하며 현경은 부른 자기 배를 다독인다.

"아 미안...회사일이 좀 많아서.."라며 기수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그녀 민지...그녀의 본심은 무얼까? 그녀의 속내는 무얼까? 정말 살곳을 찾아 여기로 온건지, 다른 뜻이 있는건지 그는 혼란과 불안에 빠진다.



그날밤, 단지 놀이터로 민지를 불러낸 기수는 거두절미하고 이곳을 떠나라고 엄포를 놓는다.

"또 대한민국 거주, 어쩌구 할거야!"

라는 말에 민지는 천진한 얼굴이 되면서,

"자기 와이프 미인이대? 사진보다 더 "라며 운을 뗀다.

"그거였어. 넌 다 알고 왔어. 그런거지?"라며 그가 민지의 양팔을 쥐고 흔드는데 지나가는 경비가 힐끔거린다. 그때문에 기수는 민지의 몸에서 손을 거두고 같은 자리를 맴돌며 하늘을 올려다보다 한숨을 쉬다를 반복한다.

"나한테 원하는게 뭐야?"

"결혼했어도 자기 못잊었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그땐 미안했어 기수씨..."

기수는 당장이라도 이 여자의 뺨을 후려갈기고 싶은걸 간신히 참는다...

"나 별다른 뜻 없어. 정말이야. 위자료를 얼마 못받아서 싼 데 찾다가 성욱씨가 당신 여기 산다고 하드라구..우리,  친구 하면 안돼? 그렇게 당신 와이프랑도 친해지구..."

"너, 현경이...애들 엄마, 다 알구 접근한거잖아."

"뭐면 어때...나 초대했다는 얘기 들었지?"

기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민지의 뺨을 후려 갈긴다. 그러자 민지가 휘청인다. 그러자 기수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부축한다. 그런 자신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자기, 사랑해 아직도"

민지가 눈물이 그렁해서 기수를 쳐다본다.



며칠후 퇴근한 기수는 자기집 거실에서 나란히 배달음식을 시켜먹고 있는 현경, 민지와 맞닥뜨린다.

"여보 인사해. 지난번 우유,"

기수는 마지못해 목례를 하고 작은방으로 들어간다. 그의 심장이 요동친다.  열려있는 문틈으로 여자들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럼 내가 누구 좋은 사람 소개시켜줘야겠네"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 현경의 천진한 목소리가 기수의 고막을 자극한다.

지난번 놀이터에서 그렇게 눈물을 보인 민지에게 굴복한 기수는 결국 그녀를 안았다. 그것도 맞은편에서 아내가 잠들어있는 시각에...

"이게 끝이야. 다신 안와"라고 했지만 민지는 이렇게 버젓이 자기집 거실을 차지하고 앉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내 현경은 민지에게 남자를 소개시켜 주겠노라 한다...



다음날 새벽, 진통이 온다며 자는 기수를 뒤흔드는 현경의 손길을 느끼며 기수는 비몽사몽 옷을 갈아입고 차키를 찾는다. 그리고는 이미 산통이 심해진 현경을 부축하고 주차장으로 향한다. 그리고는 차문을 열고 뒷자리에 현경을 앉히고 운전석에 급히오른다.

단말마같은 아내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기수는 다급하게 차 시동을 건다....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몇번을 더해도  걸리지 않는다. 기수는 다급하게 119를 누르는데, 운전석 창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가 쳐다보자, 민지가 어느새 자기 차를 옆에 바싹 갖다대고 얼른 옮겨타라는 손짓을 한다.


본격적인 산통이 온 현경은 거의 사지를 헤매고 그곁에서 그녀의 식은땀을 닦아주며 불안해하는 기수를 뒷자리에 태우고 민지는 신호따위는 무시하고 인근 대학병원으로 쏜살같이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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