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웃픈 스토리가 하나 있다.
영문학사를 대강당에서 한학기 들은적이 있는데
늘 내 뒤에 앉아서
내 필기노트를 빌려가곤 했던 사람이 있다.
한30쯤의 벌써 머리가 벗겨지던 사람인데
그게 몇달 반복되다뇌 나는 자연스레
내게 관심이 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학기말쯤 돼서 나는 용기내서
점심을 같이 하자고 했다.
그러자 그는 당황해하면서도
나와 점심을 같이 먹었고
오후에 수업이 없다며 나도 시간이 되면
어디 좀 나가보자고 하였다.
처음엔 그저 '아저씨'정도로만 여겨지던 그가
점차 좋아지고 있던 터라
나는 그를 따라 태릉행 버스에 올랐다.
그는 영어과 재학생이 아니라
교육대학원 영어교육이 전공인데
학부 수업 일부가 필수라 듣고 있는거라고 했고
학부는 k대 화공과를 나왔노라 했다.
그리고 어딘가 고궁에 내렸는데
(그 이름은 모르겠다)
그와 나는 거의 밀착하다시피 나란히 앉아
어둠이 내리는걸 응시했다.
몇마디가 둘 사이에 오가고...
거의 손이 닿을락말락한 그런 분위기...
그렇게 돌아오는 길에
그가 다음주에 연락할테니
그때는 자기 차로 와괵으로 나가보자고 했다.
하지만 그의 연락은 오지 않았고
그는 더이상 그 수업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이따금 셱스피어 수업에 들어오는걸
기억해내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매번 기다렸더니 어느날 드디어 들어왔다.
그리고는 이번엔 바로 내 앞자리에 앉았다.
해서 수업이 끝나고,
'왜 연락 안했냐'고 했더니
발끈하면서
자기는 제주도에 약혼자가 버젓이 있다는
대답을 해왔다.
한학기 내내 내 뒤에 껌딱지처럼 앉아서
필기한걸 빌려간 이유를 묻자
그는 딱히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여름방학
비가 몹시 내리던 날
나는 빈강의실에 있었는데
그가 어떻게 알고는 찾아왔다.
왜요?라고 묻자
잠깐만 나와,라고 했고
우리는 지금은 허물어지고
새 건물이 들어선
그 당시 교내 동산에 우산도 없이
나란히 앉아있다.
결혼은 언제 하냐고 묻자
그는 아무 대답없이 한참 나를 보더니
그만 가겠노라, 하고는 일어나 언덕을 내려갔다.
그렇게 멀어져가는 그를 보면서
처음 그와 데이트를 하던때
자기 집안이 나름 '명문가'라는 얘기를 한게 떠올랐다.
그럼 집안에서 정해준 혼처가 있거나
아무튼 나정도는 눈에 차지 않는다는 뜻이려니 했다.
그럼에도 그 비오던 날
나를 왜 찾아왔고 왜 그렇게 응시를 한걸까?
어린 마음에도 그도 날 좋아했다는 결론밖에 나지 않았다.
이후로 간간이 교정에서 마주치면
내쪽에서 먼저 다른 길을 잡거나 외면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