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영은 마주앉아 있는 석진의 표정을 꼼꼼히 살펴본다.
만난지 한달만에 해영에게서 그만 보자는 말을 들은 그는 적잖이 실망한 눈치다.
"좀 성급한거 아닐까요? 우리 이제 겨우 두세번 보았는데..."
해영도 석진이 싫지는 않았다. 우현과는 달린 안정된 직장에 대리에서 진급을 코앞에 두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성이 좋았다. 하기사, 이제 두세번 보고 상대의 인성을 논한다는게 어불성설이지만, 그래도 느껴지는게 선했다.
우현의 예리하고 시니컬함과는 거리가 있는 둥글둥글하고 상대를 품어보고자 하는 성의가 느껴지는 그런 인품이었다. 그것은 석진이 나이가 좀 있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제 나이가 넘 많아서?"라며 그가 멋쩍어한다.
석진은 한번 결혼했던 이혼남이다. 그런데 그것이 사기결혼이었다. 자세한 사항은 얘기를 안했지만 중간에 소개한 대학 선배가 넌즈시 알려주며, 그래도 아이가 없고 직장이 안정됐고 무엇보다 성품이 좋다고 해서 만나게 되었다.
우현과 동거까지 했던 해영으로선 석진의 이혼따위를 문제 삼을 마음은 없었다. 그리고 그가 싫지 않았고 진중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부분까지 있어 해영의 얼굴이 어두울때는 어떻게든 웃게 해주는 재능도 있었다. 이런 남자를 놓치면 아까울 거라는 생각이 안 드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현의 연락을 받고도 다른 남자를 계속 본다는게 양다리를 걸치는 거 같아 해영은 결단을 내린 것이다.
우현과는 1년 조금 넘는 동거끝에 헤어졌다. 그는 친구들과 벤처회사를 차린다고 해영이 유산으로 받은 돈을 거의 다 끌어다썼고 급기야 회사는 문을 닫게 되었다. 그일로 둘 사이는 냉랭해졌고 우현은 끝내 '니 돈 갚는다 갚아'라며 마침내 문을 박차고 집을 나가버렸다. 그리고는 여태 아무 소식도 없던 그가 이틀 전에 메시지를 보내왔다.
"몸이 안좋다. 그래도 재기하려고 어떻게든 노력중이다. 너한테는 늘 미안한 기분이다. 하지만 니 돈은 어떻게든 갚을 거고 너와 다시 시작할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즉 "재기해야 돈을 갚는다"라는 단서가 있긴 하였지만 문제는 그의 메시지 한통에 해영의 마음이 움직였다는 것이다.
거의 부부처럼 지낸 사람이고 그만큼 서로를 속속들이 아는 만큼 결혼이란걸 한다면 그런 상대와 하는게 맞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녀는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리고는 석진에게 이별을 통보한 것이다. 이제 한달된 상대에게 '이별 '운운하기도 멋쩍어 그녀는 몇번 그의 메시지에 답을 안하는 걸로 마무리하려 하였지만 그런 부분, 석진은 또 치밀해서 기어코 만나게 되었고 정식으로 결별을 통보받는 모양새가 되었다.
석진은 더 이상 설득해도 가망이 없음을 깨달았는지 그날은 저녁을 같이 하자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둘은 어색하게 한시간여를 흘려보내다 해경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도 마지못해 의자를 밀며 일어났다.
우현의 '기다리라'는 말이 해영에게는 한줄기 빛처럼 스며들었다. 그말은 언젠가 돌아온다는 뜻이고 그 '언젠가'가 가까운 미래가 될것이라 여겼다.
당장 남자가 급한것도 , 섹스에 굶주려하는 타입도 아니니 ,까짓거 기다려보자,라는 심정으로 그녀는 백화점 남성복 코너에 들러 우현의 사이즈로 와이셔츠 몇장과 넥타이를 사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날따라 운전도 잘되었고 석진도 기대보다는 깔끔하게 떨어져나가 이 모든게 자신의 인연은 우현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었다.
기다리라,는 운을 뗐다는 것은 간간이라도 연락을 주겠다는 것으로 그녀는 받아들였다. 하지만 우현은 그 메시지를 보낸 뒤 보름이 가도록, 한달이 지나도록 그 다음 메시지나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슬슬 불안해진 해영이 용기를 내서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기로 하고 담담하게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하는게 우현에게 부담이 가지 않을것 같아 ,잘지내지? 라고 말문을 열었다. 연인 사이에 오고갈수 있는 그저 그런 이야기를 조금은 길게 쓴 뒤 그녀는 클릭버튼을 누른다.
상대가 메시지를 읽으면 '읽음'이라는 글씨가 뜨길래 해영은 번역을 하다가도 간간이 폰을 들여다본다 .그러나 사흘이 넘도록 우현은 자신의 메시지를 열어보질 않는다. 처음엔 바쁘겠지, 하고 기다렸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에 대한 의심이 증폭돼 갔다. 혹시 메시지가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나 싶어 그녀는 테스트겸 두번째, 세번째 메시지를 보내고는 '읽음'표시를 기다렸다. 그러나 결국 그 메시지는 읽히지 않은채로 오랜 시간이 흘렀고 우현의 '기다리라'는 그 말이 해영의 삶을 한없이 유예, 지연시키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러고보니 퍼뜩 생각난게 있었다. 둘이 헤어지기 직전 돈때문에 싸우면서 '이러면 법적으로 갈수밖에 없어'라고 던졌던 자신의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우현은 만약에 있을지 모르는 고소고발 사태를 의식하고 그런 메시지를 보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해경을 스친다. 그녀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그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그러자 자동응답이 그녀의 번호가 차단되었다는 걸 알려준다.
같이 살때도 우현은 대단한 남성우월주의에 젖어 박사수료까지 한 해영을 무지렁이 취급하고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런 그가 헤어진 후에도 이렇게 자신을 농락하는 걸 더 이상 참아줄 필요가 없다 생각한 그녀는 서둘러 외출 차비를 한다.
그때 전화벨이 울린다. 혹시나 우현인가 싶어 다급히 폰액정을 확인한 그녀는 발신자가 석진임을 알고는 조금은 실망한다.
"우리, 다시 노력해보면 안될까요"라며 석진은 여러날 고민한듯 힘들게 운을 뗐다.
지금이라도 우현이 아닌 석진을 택하면 우현으로부터 받은 조롱이며 농락, 기만과 무시가 상쇄될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해영은 더이상은 이 남자에서 저남자로 옮겨다니면서 그들에게서 받은 상처를 달래는 식의 방법은 쓰지 않기로 한다. 해서 석진에게 "기다려줄수 있나요"라는 의뭉스런 질문을 던져본다. 그러자 상대는 잠시 침묵하더니 "알겠습니다"라며 포기하는 눈치다.
평소 이 시간이면 차량으로 도로가 꽉 미어질텐데 그날은 뻥 뚫려 신기하기까지 하였다. 그렇게 그녀는 가속페달을 힘껏 밟아대며 법조타운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