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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영 Jun 13. 2022

소설 <바람의 도시>

세월이 흘렀음에도 서로가 서로를 한눈에 알아본다...


                          


  “이런곳에 까페가 있다니..”

휴일 오후, 그래도 3개월을 지낼 H시를 한바퀴 돌아볼 요량으로  차를 몰고 나온 기수는 외진곳에, 간판도 잘 보이지 않는 까페 하나를 발견한다. 삶의 환락을 포기한 그 누군가가 최소한의 호구지책으로 문을 연 그런곳이리라 짐작한다.     

  “H시?”

  영서는  난감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바로 얼마전 펜데믹 확산으로 인해 결혼식까지 연기된 마당에 이번엔 기수가 로테이션 발령이 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됐어”

  기수가 머쓱해하며 조직이 정한건데 따라야 하지 않겠냐며 씩 웃는다.

  “자기 괜찮겠어 혼자?”

  “겨우 3개월인데 뭐 ”     

  둘은 2년전 신입사원 환영회에서 처음 만났다. 부서에 상관없이 모두가 모이는 자리였고, 기수보다 두살 어린 영서는 신입 아나운서로 신고식을 톡톡히 치뤘다. 선배들이 쉴새없이 돌리는 술잔을 고지식하게 다 받아 마신 바람에 결국 인근 종합병원 응급실 신세를 져야했고 그런 그녀를 들쳐업고 뛴 사람이 기수였다.

  기수는 당시 라디오 조연출이었고, 대학시절을 같이 신촌에서 보낸 것만으로도 영서에게 친밀감을 느꼈다.

  영서는 기수의 등에 먹은걸 다 게워내고 의식을 잃었다

  “준다고 다 먹는게 어딨어요?”

  기수의 그말에 , 의식을 찾은 영서는 민망해했다.

 “죄송해요 선배님”

  선배, 라는 그 호칭이 기수는 싫지 않았고 둘은 그후 우연이라면 우연일 수도 있게  같은 프로의 MC와 조연출로 일하게 되면서 가까워졌다.

  신촌대학 소재의 대학이라는 공통점 외에 영서의 때 묻지않은 나이브함과 매사에 반듯한 처신이 기수는 맘에 들었다.

  1년반정도의 조연출 기간을 거쳐 처음 자기 프로를 맡았을 때 기수는 당연히 영서를 MC로 선택했고 둘은 매일 얼굴을 보게되면서 결혼얘기까지 나오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둘은 순조로운 2년여를 함께 하고, 영서의 부모쪽에서 먼저 결혼이야기를 꺼내왔다. 너무 오래 연애하는거 아니라고.

  “결혼하면 나 회사 그만 둬도 돼?”

  어느날 영서가 맥주를 한모금 마시며 물어왔다.

  “왜? 힘들어? 그래도 어렵게 들어왔는데”

  “ 내가 고루한가? 난 그냥 애낳고 집에 있구 싶어. 내가 촌스런가봐”

  아닌게 아니라 영서는 늘 해맑은 미소로 타인을 대했고 그 자체가 그녀에겐 긴장이었을테고 피곤함이었으리라, 기수는 생각한다.

  “너 좋을대루 해. 대신,난 못 노는거네?”

  하며 기수가 남은 영서의 술잔을 비웠다.  

  둘은 웨딩업체를 찾아 빠르게 일을 진행했고 모든건 순조로웠다.

  “너무 순조로워서 불안해”라고 영서는 운을 뗐다.

  “뭐가 불안해 인연이니까 그렇지”하고 기수가 영서를 다독였다.

   하지만 영서의 불안은 결국 결혼식 연기라는 극한 상황을 몰고 왔다.  코로나 확산세가 걷잡을수 없이 커지자 각종 경조사에 대한 이러저러한 제재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기수는 식을 생략한 채 혼인신고만 하고 같이 살자고 했지만 영서네가 반대했다. 개혼인데다 그렇게 살면 남의 입방아에 오른 내린다는 게 이유였다. 

  그래서 둘은 이듬해로 결혼식을 미루고 커플 반지를 주고받는 걸로 둘만의 약혼식을 대신했다.

  “ 그동안 자기 맘 변함 안돼”

  영서가 눈을 흘겼다. 기수는 그런 영서를 안아주며 영서외에 다른 여자를 만날 일은 없으리라고 안심시켰다.

  그리고 나서 기다렸다는 듯이 갑작스런 기수의 지방발령이 떨어진 것이다.


  H시라면 쉬는날 기수와 영서가 가끔 내려와서 딸기를 먹곤 하던 곳이다. 바다가 없이 육지로만 둘러싸인 그곳 M방송에 기수가 3개월간 내려가 있어야 한다. ‘조직’운운하며 오피스텔 짐을 싸는 동안 영서도 옆에서 거들었다. 가구야 모두 붙박이었고 짐이라고 해봐야 다 낡은 옷가지와 책, 컴퓨터가 전부여서 굳이 포장이사를 부를 필요도 없었다.

  “3개월 금방 갈거야”라며 기수는 영서를 달랬다.     

  서울에서 한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H시엔 거센 바람이 분다. 소도시답게 거리는 한산하고 그래서 바람의 위세는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간판이 흔들리고 엄마 손을 잡은 아이들의 몸이 휘청거린다. 바람의 도시, 기수는 그렇게 생각한다.     

    첫출근날, 오전 8시가 조금 넘어 라디오 제작국에 도착한 기수는 자기 자릴 찾아 두리번거리고 그때 마침 아침 방송을 끝내고 들어오던 PD영민과 마주친다.

  “혹시 서울에서 오신...”하고 영민이 먼저 말을 걸고

  “ 아 네, 한기숩니다”하고 기수가 악수하기 위해 손을 내민다.

  영민은 기수의 자릴 알려주고 기수는  서울에서 고지 받은대로 여자 PD홍.의 후임으로  그날 첫방송을 하게 된다. 홍은 임신해서 배가 불러오자 휴직계를 낸 상태였다.

  “잘 부탁해요”

  하며 MC은희가 말을 건네온다.

  홍은 재빠르게 인수인계를 마치고 부스를 나간다. 그날 2부부터  당장 기수가 연출을 맡게 된 것이다. 은희는  자기보다 연배가 한참 위인 작가 민.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키고 그런 은희가 기수는 처음부터 못마땅하다

  “그럼 내일 ‘음악이 흐르는곳에’는 어김없이 여러분을 찾아오겠습니다”

   은희가 판에 박힌 클로징 멘트를 마치자 작가 민.은 잠깐 할 얘기가 있다며 기수를 밖으로 불러낸다. 민이 이끄는대로 부스밖으로 나온 기수는 민으로부터 1주일치 원고를 건네받고 당황한다

  “이렇게 갑자기 그만두시면,”

   하지만 민.은 완강하다. 새사람을 찾아보라며 복도를 나간다. MC와 작가의 기싸움은 흔한일이어서 이것도 아마 그 종류리라 생각한다. 음악이 나가는 동안 폰을 만지작거리고 커피 심부름을 시키고  원고 타박을 일삼는 은희와 충돌했을 것이다.

   다급해진 기수가 국장  윤.에게 작가가 그만뒀다는 얘기를 하자   윤.은 무슨 소리냐고 되묻는다. 하지만 기수가 보여주는 1주일치 원고를 보고는, 이바닥에선 드문 일도 아닌데 뭐, 하며 대수롭지 않게 자기가 처리하겠다고 한다.     

  “첫방송 잘했어? ”

  퇴근하고 원룸에 들어서자 영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다.그 목소리가 구원처럼 느껴진다 기수는. 그런 영서에게 작가가 사라졌단 말 대신 H시엔 바람이 분다고, 바람이 많이 분다는 말만 한다.     

  국장 윤.이 소개한 작가 강.은 국장과  같은 연배였고 아직도 원고지에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로테이션 돼서 오자마자 국장의 심기를 건드려 좋을게 없다고 판단한 기수는 결국 작가 강.을 만나서 다른건 괜찮으니 원고만은 컴퓨터로 작성해주면 안되냐고 부탁한다. 그러자 상대방은 자긴 손으로 쓰는게 편하다며 정 컴퓨터 원고를 원하면 다른 작가를 찾아보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뭐 이런 개같은, 하고 기수는 속으로 울컥하지만 끝내 내색하지 않고 ‘잠정적’이라는 자기만의 단서를 붙이고 같이 작업하기로 한다.          

   외진 곳의 까페를 발견한 기수는 그 앞에 차를 대고 안으로 들어간다. 유리문은 가볍게 열리고 내부는 단출하고 고즈넉하게 장식돼있다. 몇 안되는 테이블마저 거리 두기를 해 띄엄띄엄 놓여있고 손님은 한 테이블 뿐이다. 이런데 장사가 될까 과연, 하고 기수가 자리에 앉다가 커피를 내리고 있는 젊은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연지.  그녀였다. 세월이 흘렀음에도 서로가 서로를 한눈에 알아본다.


  유연지.

  이름이 유원지같다고 기수가 꽤나 놀려대던 그 연지였다. 둘은 그 자리에서 서로에게 던진 시선을 거두지  못한채 우두커니 있는다.  그 정적을 먼저 깬 건 연지다.그녀가 다가와서 묻는다.

  ‘기수? 기수지? 한기수?“

  애써 웃어보이는 그녀가 기수는 안쓰럽다. 이런 외지고 한적한 곳에서 연지를 만나게 될줄은 꿈에도 몰랐던 기수는 차마 웃어지질 않는다.     

   낙권은 마치 자기 대학 도서관이라도 되는 양 거의 매일 드나들었고 기수와 연지에 섞여  밥을  같이 먹고 술을 나눠 마시곤 했다. 낙권은 연지를 ’제수씨‘라 불렀고 그럼 연지는 말갛게 웃어 보이곤 했다.

  집이 같은 방향이었던 연지와 낙권은 나란히 한 버스에 올라 귀가하고, 둘에게 기수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연지씨랑 결혼할거지?“

  언젠가 둘이 불콰하게 술이 오른 상태에서 낙권이 기수에게 물었다.

  ”결혼은 무슨...아직은 몰라, “

   기수의 대답은 늘 이런식이었다. 하지만, 기수는 자기가 누구와 함께 산다면 그 상대가 연지가 될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날, 연지가 종적을 감추고 기수는 연지가 묵고 있는 연지의 이모집으로 찾아갔지만 그 이모는 다신 연지를 찾아오지 말란 말만 되풀이하며 둔탁한 철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소문이 돌았다. 연지가 죽었다고.  

  기수는 그럴리 없다 생각하며 다시  이모집을 찾아가지만, 그녀는 이사하고 없었다. 그리곤 입대를 며칠 남기지 않은 어느날, 기수는 버스 차창밖으로 다정하게 걸어가는 낙권과 연지를 보게 된다. 연지는 거의 낙권의 품에 안기다시피 그렇게 불룩한 배를 안고 걷고 있었다. 기수는 정신이 혼미해져 잡고 있던 버스 손잡이를 놓치고 휘청인다. 누군가 옆에서 자길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쓰러졌으리라.

  집까지의 나머지 여정을 기억하지 못한채 기수는 자기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리곤 깊은잠에, 꿈도 없는 깊은잠에 빠졌다.     

   그리고 몇 년후, 기수가 졸업반일 때 낙권의 죽음을 전해듣게 된다. 낙권은 연지가 임신하자 곧바로 휴학을 하고 덤프트럭을 몰았다고 한다 .그것은 분명 어떻게든 식솔을 먹여살리겠다는 가장으로서의 의지였다고 기수는 생각한다. 그런 낙권은 L시에서 서울로 향하던 새벽, 졸음운전으로 중앙선을 침범해 마주오던 승합차와 충돌하면서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한다.그리고나선 연지가 딸을 지방에서 혼자 키우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그때 연지를 찾아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기수는 더 이상 자신을 배반한 그녀를 만날 자신이 없었고 음울한 자기 속내를 들키고 싶지도 않아 연지를 찾지 않았다.


   그런 연지와 기수는 H시에서 그것도 후미진 까페에서 맞닥뜨린 것이다.

  ”커피? 블랙이지?“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연지는 주방으로 돌아가서 커피를 내린다. 기수는 이 자리를 얼른 뜨고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연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느낀다. 그녀가 커피를 내려 들고 오는걸 보며 기수는 불끈 화가 치민다. 하지만 기수의 손은 이미 빈티지 화이트 색감의 커피잔을 쥐고 있다.

  ”결혼은 했구?“

  연지가 넌지시 묻는다. 기수는 아무말 없이 커피만 마신다.

  ”미안. 방해하지 않을게“하고 몸을 일으켜 그녀는 카운터로 간다.

  그때 왜 그랬냐고, 기수는 연지를 붙잡고 다그치는 자신을 상상한다. 너로 인해 내 삶이 엉망이됐다고 뺨이라도 휘갈기고 싶다. 하지만 기수는 지폐 한 장을 테이블에 놓고 조용히 까페를 나선다.


  ”뭐야, 이제서야 집들이 하는거야?“

  전화기 너머 영서의 음성은 언제나처럼 해맑고 다정하다. 연지와 마주친 며칠간 기수는 애써 영서를 떠올렸고, 맘 같아선 당장이라도 서울로 차를 몰아야 할거 같았다. 하지만 기수는 영서에게 주말에 내려오라는 말을 대신 한다.





  마트에서 인스턴트로 대강 끼니를 해결하자는 기수의 말에도 영서는 굳이 낙지볶음을 해주겠다며 재래시장을 누빈다. 그리고는 바구니 가득 장을 봐서 한참 요리를 하고 밤이 늦어서야 상이 차려진다.

  ”운전하구 와서 피곤하지 않어?“

  기수가 잘익은 낙지를 젓가락으로 한 점 집으며 묻는다. 기수가 영서의 오피스텔에 올때면 늘 해주던 그 맛이다.

  ” 그래서, 이밤에 올라가라구?“

  영서는 그녀답지 않게 안가겠다고 투정을 부린다.

  ”그럼 안 가?“

  영서는 대답없이 밥을 먹는다.

  ”나 언제 사표낼까?“

  난데없는 영서의 물음에 기수는 뭐라 할말이 없다.

  ”응?“

  영서가 답을 재촉한다. 결혼하면 회사를 그만두겠다던 그녀의 말이 떠오른다.

  ”지금이라도 싫음 그만 두든가“

  ”그럼 자기가 책임질거지?“

  ”그래. 책임져“

  하며 기수가 영서를 미소짓게 한다.  그러고는 수저를 놓고 영서 곁으로 다가와 살포시 그녀를 안는다. H시엔 바람이 많이 분다는 말을 기수는 영서에게 나직이 속삭인다.          

  새로 바뀐 작가 강.의 원고는 진부하고 상투적인 멘트로 가득했다. 까탈스런 MC은희는 아예 따로 원고를 써올 지경에 이르고 기수는 결국 작가 강을 해고했다. 그순간 기수의 머릿속을 연지가 스쳐갔다. 대학 방송국에서 직접 원고를 쓰고 읽던 그녀가.     

 방역단계가 완화됐으니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기수는 까페로 갔고 예상대로 까페는 오픈상태였다. 기수는 한참을 서성이다 안으로 들어간다. 연지는 놀라지 않는다. 마치 기수가 다시 올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처럼. 그리고 기수가, 원고를 써볼 마음이 있냐고 물었을 때 처음엔 긴가민가한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대답한다.

  ”그때 이후로 글을 안 썼는데 될까?“

  하고 연지가 웃는다. 원래는 일주일에 두세번은 참관해야 하는데 까페를 하니까 원고만 보내라고 기수는 말한다.

  ”안그래도 까페 그만 두려고. 장사가 너무 안돼서“ 라며 연지는 생각 좀 해보겠다고 한다.     

  ”어머 작가님이 미인이네“

  하고 은희가 혿들갑을 떤다. 그동안 ’노땅 원고‘ 읽느라고 죽을뻔했다는 너스레까지 떨면서.

   ”내 대학동기“

  그렇게 기수가 연지를 소개하자 은희는 단번에 ” C.C?“ 하고 히죽거린다. 기수가 대답이 없자  연지가 대신 대답한다.

  ”그냥 친구“

   ’친구‘라는 연지의 말에 기수는 가슴이 저릿해온다. 둘이 아이를 낳았으면 그 아이가 지금쯤...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궁금한 마음에 기수는 연지의 딸에 대해 묻는다. 딸이 몇 살이야? 그러자, 여섯 살이라고 그녀가 대답한다.

  듣고있던 은희가 피식 웃는다.

  ”아줌마? 그렇게 안보이는데?“ 하면서 원고를 받아들고 자리로 가서 앉는다. 은희가 원고 체크를 하는 동안 기수는 매주 두 번 있는 코너이야기를 연지에게 한다. 청취자 사연으로 꾸며지는 시간이지만 대부분은 작가가 써야 한다고. 그러자 연지가, 그 정돈 자기도 안다,고 대답한다.          

  은희의 스케쥴 변경으로 새벽 녹음이 잡힌날, 은희는 연지에게 아침을 걸렀다면서 빵을 사오라고 요구한다.

 ” 그냥 우유 마심 안될까?“ 하는 기수의 말을 자르며 빨리 나가서 빵을 사오라며 은희가 닦달한다.연지는 서둘러 지갑을 챙겨 빵을 사러 나간다.

  인적이 드문 새벽거리. 문을 연 빵집이 있을 리 없다. 새벽이슬과 바람속을 10여분 헤매던 연지는, 지난번, 기수와 작가일을 매듭 짓기 위해 들렀던 방송국 지하 까페가 생각나고 그옆에 편의점이 있던 생각이 난다. 아, 그래, 거기 열었을거야, 하며 연지는 다시 방송국으로 뛰어간다.

  ”뭐야 이거, 그냥 마트거잖아“ 하면서 은희는 연지가 편의점에서 잔뜩 사온 빵을 내던진다. 기수는 그런 은희에게 발끈해 자리에서 일어나 한 대 치기라도 할 기세다. 심상찮은 기운을 감지한 연지가  기수 앞을 막아선다.

  ”미안해요 빵집 연 데가 없어서“라고 연지가 굴욕적인 사과를 하자 기수는 화가 치밀어 부스문을 박차고 나간다. 그제서야 은희는 누그러지면서 다음부턴 자기가 싸오겠다며 빵하나를 들고 자기자리로 가서 먹는다 .

  ”니가 병신이야? 왜 걔한테 잘못했다구 하는거야!“

  복도로 뛰쳐나온 기수는 아직도 분이 안풀려 연지를 다그친다.

  ”그러지 마. 안그래두 너한테 미안한거 투성인데“

   하며 연지가 서둘러 자리를 피한다. 그 누가 당했어도 똑같이 화가 났을거라고 기수는 스스로를 다독인다.     

 ”실은 아버지가 여기 가까운 데 계셔“

  연지가 쉬는 시간에 커피를 나눠 마시며 말한다. 아버지가 H시에서 30분거리 요양병원에 간암 말기로 입원해있다고. 

  ”그래서 여기루 정한거야?“

  ”그런것도 있구...서울에 어떻게 있어 내가. 너한테 그짓을 해놓고“

  낙권이 그렇게 일찍 간 뒤 그녀가 겪었을 맘고생과 세상의 편견을 생각하니 기수는 뭉클해진다.

  ”가겐 정리 했구?“

  그말에 연지는 고개를 끄덕인다.     

  새벽에 기수의 폰이 울린다. 자고 있던 기수는 더듬거려 폰을 집는다.

  ”아빠가 의식이 없으셔“

  기수는 난데없는 새벽 전화에 얼떨떨하다. 게다가 연지가  울먹이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을 다친다. 

  ”아 미안...너한테 거는게 아닌데..“

  하고 연지가 전화를 끊으려 한다

  ”아냐...오늘 뭐해? 

  그렇게 해서 기수는 처음으로 낙권의 아이 미소를 보게 된다. 낙권을 꼭 빼닮은 커다란 눈망울의 미소. 아이는 처음엔 낯을 가리더니 롤러코스터를 같이 타고나서는 이내 ’삼춘, 삼춘‘하며 따르기 시작한다. 그런 미소를 보며, ’삼춘 힘들어, 엄마한테 와‘하고 연지가 두팔을 벌리지만 미소는 기수 껌딱지가 돼서 꼼짝도 않는다. 그러다 셋은 비를 만나고 놀이공원 주차장에 파킹돼 있는 기수의 차를 향해 달려간다. 기수품에서 아이는 좋다고 웃어댄다.     

  ”아이가 아퍼. 토하구 열나구“

 며칠 뒤 연지가 다시 밤에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온다. 저녁까지 괜찮았는데 갑자기 그런다며 병원 가려고 해도 차가 안 잡힌다며 울먹인다. 기수는 전화를 끊자마자 자기 차를 연지에게로 몬다. 저만치 미소를 업고 발을 동동 구르는 연지가 눈에 들어온다.

  ”어서 타!“

  기수는 힘껏 엑셀을 밟아 병원으로 향한다. 아이는 뒷자리에서 또 한번 토하고 연지는 기수에게 연신 미안하다며 물티슈로 열심히 시트를 닦아 낸다. 그런 연지에게 기수는 왠지 화가 난다. 고작 이런 모습을 보여주려고 자길 배반했냐고 묻고 싶지만, 지금은 아이가 급하다,는 생각에 과거 따윈 떨쳐버린다.

  의사는 아이들에겐 흔한 증상이라며 수액을 다 맞힘 귀가하라고 한다. 연지는 그제서야 긴장이 풀려 휘청거리고 그런 연지를 기수가 부축하고 자기차에 태운후 잠든 연지를 그 품에 안긴다.

  ”들어가서 차 한잔 할래?“

  모녀가 사는 다세대 앞에  기수가 차를 대자 연지가 물어온다.

  ”시간이...“

  ”그치. 가 그럼. 이따 일찍 나갈게“

  하고 연지가 미소를 안고 집으로 들어간다.

  기수는 아이가 진정됐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돌아가지질 않아서 연지에게 다시 전화를 건다.     

  모녀의 방은 미소의 짐이 더 많아 보인다. 그림책들이며 꼬마 자동차....다 낡은 가구와 굉음을 내는 구식 냉장고.

  ”나 이렇게 살어“  하며 연지가 민망해한다.

  미소는 어느새 잠이 들고, 기수와 연지는 커피를 나눠마시다 어느샌가 서로 바투 앉아있다. 그러자 연지의 손이 기수의 얼굴을 매만지고 기수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연지를 살포시 안는다. 하지만 기수는 어느 순간 멈칫하며 그녀에게서 떨어진다.

  ”괜찮아 기수야“하고 연지가 애써 웃어보인다.

  기수는 그대로 일어나 집을 나선다.           

 ”무슨 일이야? 왜 여태 안 와?“

 그날 오후가 돼도 출근을 안하는 연지에게 기수가 전화를 건다.

 ”미안, 아빠가...아빠가 위독하시대“ 하며 전화 너머 연지가 울먹인다. 그말에 기수는 PD영민에게 1부를 맡아 달라며 방송국을 빠져나와 연지에게로 가서 모녀를 태우고 30분거리의 그 요양병원으로 향한다.     

   노인은 이미 마지막 숨을 내쉬고 있고 연지는 아빠를 외쳐대다 실신한다. 미소는 처음보는 엄마의 그런 모습에 놀라 자지러지게 울고 기수는 자기가 처한 상황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힘들다.

  방송이 비는 틈틈이 장례식장을 찾는 기수를 보고 도우미들은 연지의 남편인 줄 안다. 아마도 연지가 그렇게 둘러댄 모양이다. 

  3일장을 치르고 초주검이 된 연지를 집에 데려다 준 기수는 그 길로 서울 영서의 오피스텔로 향한다. 잠옷차림의 영서가 문을 열어주며  어리둥절해한다.

 ”보구싶어서“

 ”... 들어와“ 하고 연지가 길을 내준다. 그날 기수는 으스러져라 영서를 안는다. 이 여잘 배반하면 안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연이틀 비가 내리더니 이어서 다시 바람이 불어온다. 밤늦게 편집을 하던 기수는 문득 로테이션이 끝나면 연지 모녀와 헤어진다는 사실에 울적해진다 . 바람이 가득한 이 도시에 그 둘을 남기고 떠나는 자신이 잔인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언제까지 과거에 발목이 잡혀있을 수 없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편집이 늦어져 동이 틀 무렵, 편집실 문이 열리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기 있었구나 “

   기수가 문쪽을 보자 연지가 보온병을 안고 다가선다. 

  ”커피 타왔어“

  ”자판기 커피면 되는데, 왜?“

  기수는 연지가 내미는 커피를 받아들며 말한다.

  ”나 이래봬도 까페 하던 여자야 “하고 연지가 웃는다.

  ”...좋아졌네 많이?“

  ”그래야 아빠두 편하니까...저기...딱 한번이었어“

  그말에 기수는 낙권의 이름이 튀어나올것만 같은 예감에 휩싸인다. 아니나 다를까 연지는 낙권과의 이야기를 한다.

  ”낙권씨랑 나랑 방향이 같아서 매일 바래다 줬잖아. 그러더니 어느날 그러더라구. 더 이상은  도서관에 안온다구. 기수한테 못할 짓이라구“

   ”무슨 말하려구 그래?“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술 한번 먹자고 해서 같이 마셨어. 근데 그날밤 너무 취해서 그만..“

  ”  지금 그런 말 한다구 뭐가 달라져?“

  ” 그건 아니지만...그날 딱한번 잤는데 미소가 들어선거야. 믿기지 않겠지만 낙권씬 지우라고 했어. 그리고 너한테 돌아가라고“

  기수의 시선이 편집실 밖 풍향계에 가서 꽂힌다.

  ”그럼 그때 지우지 그랬어?“

  하고 기수가 시선을 거두며 묻는다.

  ”너한테 용서해달라는게 아니구...실수로 널 떠났다는 얘길 하는거야. 내 진심이 아니었어“

  그말에 기수는 더 이상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연지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포갠다. 그러자 연지의  두팔이 기수의 얼굴을 감싼다. 기수는 편집실 문이 잠겼나를 확인한 뒤 연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사랑해 “하는 희미한 신음소리가 연지로부터 들려왔지만, 기수는 아랑곳 않고 더 이상 가질 수 없을만큼  충분히  연지를  갖는다.      

  그렇게 연지를 보내고 남은 편집을 마저 하면서 기수는 연지가 한 말을  되뇌인다. 단 한번이었다고. 술김에 벌어진 일이라고. 이제 기수는 연지 없는 삶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래, 상처는 나만 받은게 아니었어,   그날 오후, 기수는 서울  영서에게로 차를 몬다. 그렇게  달려가 그는 연지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한시간 내내 발작같은 비명과 웅얼거림을 되풀이하던 영서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다.     

  다시 차를 몰아 연지네 앞에 대고 기수는 전화를 건다. 그렇게 연지가 나오고 기수는 그녀를 차에 태우고 다시 구석구석 그녀를 탐한다. 연지도 거리낌없이 기수를 받아들인다. 그녀에게 얘기했다고. 니 얘길 다 했단 말에 연지가 눈물을 흘린다. 그러면서 사랑한다고 기수는 수도 없이 되풀이해서  말한다. 연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자기 안으로 기수를 끌어들인다.      


  그러고나서 며칠후 국장은 기수에게 정직 한달 처분을 내린다. 그것도 제작국 식구가 다 보는 앞에서. 어이없어 하는 기수에게 국장은 ,개새끼,를 연발하며 나간다.  안그래도 연지가 그날 이후로 원고만 팩스로 보내오고 도통 연락이 닿지 않아 조만간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한  기수는 그런 국장의 처분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자 앉아있던  PD영민이 음흉하게 웃으며 기수에게 다가온다.

  ”너 편집실에서 그거 했다며?“

  ”그거? 그게 뭔데?“

  ”너 유작가 덮쳤다며?“

  그말에 기수는 다리에 힘이 풀린다.  제작국의 눈들이 일제히 기수를 쏘아본다.

  기수는 어이가 없다. 연지가 왜 자기를 무고했는지 알 길이 없다.그 길로 기수는 연지의 집을 향해 차를 몰고 마침 미소와 함께 집을 나서는 연지와 맞닥뜨린다.

  ”할 얘기가 있어“”

  하고 기수가 다급하게 먼저 말을 꺼낸다.

  “미안. 미소 , 어린이집 가야 돼. 좀 있음 차 와서,”

  “잠깐이면 돼”하고 기수가 연지의 팔을 잡는다.

  ’아파!“  하며 연지가 기수의 손을 뿌리친다. 무언가 험악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걸 느낀 미소가 울기 시작한다.

  ”너 왜 그런 거짓말했어?“

   하자 연지는 금방 낯빛이 변한다.

  ”나두 살아야 해서“라고 그녀가 다부지게 대답한다.

  ”뭐라구?“

  ”내가 언제까지 널 볼 수 있겠어? 넌, 내가 편해? 우리 둘중에 하난 관둬야하잖아.“

  ”야, 유은지, 그럼 너,“

  ”난 까페도 정리해서 이일 없음 안돼. 니가 양보해“

  ”뭐라구?“

  ”좀 놀다가 서울 올라가면 되잖아. “

  그말에 기수가 충격을 받아 성큼 다가서자 미소가 연지 앞을 막으며 소리친다.

  ” 삼촌 미워! 가! 가란 말야!“

  그말에 기수는 주춤하고 아이와 연지를 번갈아 본다. 그제서야 연지가 속내를 얘기한다.

   ”너 참 순진하다. 그럼 내가 너랑 결혼이라도 할줄 알았어? 평생 죄인 모드로? “  하며 연지가 미소의 손을 끌며 통학 차량이 기다리는 골목입구로 향한다. 기수는 벽을 맨손으로 쾅쾅 쳐댄다. 그러자 기수의 손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기수의 문자 알람이 울린다. 기수는 영서일거라고 짐작한다.     

  ”생각해봤는데 안되겠어, 우리“ 

  영서, 그녀가 파혼을 알려온다. 그 문자를 보는 기수의 몸에 날선 바람이 휘감긴다. 지독한 바람이라고 기수는 생각한다. 그리고 어디선가  그보다 더 날선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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