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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영 Oct 04. 2022

소설 <그 남자의 방>

”가지 말아요. 또 혼자 헤매게 하고 싶지 않아...‘

   “이만한 월세 얻기 힘들어요. 교통도 이만하면 좋은 편이구”

  나이 오십쯤 돼보이는 부동산 남자가 서영에게 원룸을 보여주며 교통이 편리하다는 걸 강조했다. 하긴, 도신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이런곳에, 이만한 월세러 원룸이 나와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한 서영이었다. 서영은 빠듯한 자기의 월급을 생각하지만, 더 이상 ‘내방을 빼앗긴 그집’에선 살기가 싫었다.

  “언제 입주할수 있어요?”          


  3주일전, 늦은 저녁을 마치고 설거지를 시작하는데 거실 전화벨이 울렸다. 9시 뉴스전에 하는 일일 연속극에 매달려있던 노모가 전화를 받았다.

 “별일 없니..”

 노모의 어투로 봐서 또 부산에서 걸려온 전화다. 바로 이틀전에 전화를 하고, 또 건걸 보면, 그 일을 매듭짓겠다는 것이리라.

  “...글쎄, 서영이가 답을 안주네 ...나야 뭐, 불편할거 있니. 서영이가 신경 쓸게 많아져서...”

  하면서. 노모는 서영의 눈치를 살폇다. 서영은 일부러 요란하게 설거지를 했다.

  서영이 유일한 피붙이인 오빠 기영이 부산에 살고 있다. 올케의 말인즉, 삼수를 하고 있는 아들 , 서영의 조카인 종혁을 서울로 올려 보낼테니 서영에게 뒷바라질 하라는 얘기였다.

  “아가씨, 종혁이 몫 생활비는 물론 드려요 ”

  30대 중반에 아직도 노모와 어렵게 살아가는 시누이에게 올케는 ‘생활비’만으로 큰 짐을  떠맡기려는 것이었다. 이래서, 이집을 마련할 때 오빠한테 돈을 빌리는게 아니었어...후회가 밀려왔다     

  기영이 열 살, 서영이 다섯 살때 부친은 사업에 실패하고 뇌춣혈로 쓰러져 그대로 세상을 떴다. 당시 큰집에서 다달이 부쳐주는 얼마간의 돈으로 기영과 서영, 모친은 근근이 생활했다. 조숙했던 기영은, 이제 자기가 아버지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는 걸 알고 일찍 어른이 되어갔다.

  서영에게 그런 기영은 세상에서 제일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대학 3학년때 결혼할 여자라고 지금의 올케를 데리고 온 것이다.

  올케는 당시 뱃속에 종혁을 가졌을 때라, 어차피 언제 들여도 들일 장가, 좀 일찍 보낸다, 하면서 노모는 승낙을 했다. 기영은 결혼과 함께 처가에서 마련해준 소형 아파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고 그때부터 일정액의 생활비를 보태주는 일 외에는 가족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1년만 데리고 있어달래잖니”

  이미 노모는 전화상으로 올케에게 승낙을 해놓은 상태였다. 서영을 설득하는게 아니라 차라리 통보였다. 레스토랑 홀서빙을 하면서 어렵게 구한 22평 짜리 이 아파트엔 방이 두개밖에 없다. 물론 거실이 있지만 이런저런 노모의 옛날 물건들로 차라리 창고나 마찬가지였다. 방 얘기를 꺼내자 노모는 대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대꾸했다.

 “ 니가 내 방을 같이 쓰면 되겠구나”

  서영은  기가 찼다. 직장생활 10년만에 융자안고, 그러고도 모자라는 돈을 오빠에게 빌려 이집을 마련할 때 언젠가 이런날이 오리라는걸 예상했어야 했다. 결국, 이런식으로 빚을 갚는구나,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리고는 바로 1주일후, 오빠 기영은 먼지가 하얗게 앉은 SUV에 종혁을 태우고 왔다.


  “그래도 집안에 남자가 있는게 낫다”

  오히렬 기영은 서영에겍 감사하라는 투였다. 서영은 기가찼다. 종혁이 온뒤로 노모는 조금이라도 공부에 방해가 될까봐 매사에 조심스러워했다. 발소리 하나, 숨소릴 하나라도 시끄러우면 안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정작 종혁의 방에선 낮이나 밤이나 컴퓨터 게임하는 소리만 들려왔다. 옛날, 서영의 그 방에서...

 “어디 싼 월세로 방하나 얻을수 없을까...”          


  그렇게 해서 서영은 북한산자락에 묻혀있는 그 원룸을 얻게 됐다. 주간엔 직장일 때문에 모친의 집에서 있었지만 , 토요일오후, 근무가 끝나기가 무섭게 서영은 자기만의 공간으로 서둘러 왔다. 산자락이 보이기 시작할때면 서영의 가슴은 뛰어왔다. 세상에 유일한 나만의 공간. 이제 그 누구도 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하변서.

 전에 살던 이가 주인이어서 그런지,  집은 달리 도배나 장판을 새로 할 필요조차 없이 깨끗했다.문턱도 고스란히 원형을 보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실 천장의 형광등 세 개 가운데 하나가 이사오는 날부터 깜빡거리고 있었다. 저걸 어떻게 갈지, 간이 식탁에 딸려온 의자를 놓는다 해도 우선,키부터 닿지를 않았다.

 저걸 갈아야 할텐데...     


  “이게 저희집 우편함에  꽂혀있어서요”

  옆집 남자가 머쓱해하며 가스요금 고지서를 내밀었다.

  “아 예...”얼결에 받아들면서도 서영은 홋수가 맞나를 확인한다. 303호.틀림없이 자기집이었다.

  “그럼..”하고 그는 옆집, 304호로 들어간다. 저집 남자구나, 서영은 생각했다. 열평남짓한 자기만의 섬을 갖고 살아가는 이 건물안 익명의 이웃들이 잠깐 궁금했지만 이내 가스요금에 눈이 갔다.

  한달, 벌써, 그렇게  됐구나, 서영은 이 원룸을 얻은게 벌써 한달이나 지났음을 다시한번 확인했다. 초봄이라 가스요금은 그리 많이 나오지 않았다. 한 층에 겨우 네 가군데 우체부는 그것도 헷갈려 고지서를 잘못 넣었단 말인가.     

  “오늘 생선이 싱싱하네요”

   토요일 오후, 원룸으로 오는길에 근처 수퍼에 들러 장을 보던 서영은 그렇게 두 번째로 그와 마주쳤다. 생선코너 앞에서 저녁에 뭘좀 졸여먹을까, 고민하던 터였다.

  “아, 안녕하세요” 서영도 얼결에 인사를 했다.

  “너무 비싸죠?”“

  그가 한마디 툭 던져본다. 갈치 한 마리가 만원이었다. 다른 생선들을 몇 마리 뒤적이다 그는 ”아무래도 오늘은 콩나물이나 무쳐 먹어야겠어요“라며 야채 코너로 간다. 돌아서는 모습이 닮았다, 문득 서영은 그리 생각한다.

          

  세 번째로 그와 마주친건, 시위행렬로 도심이 정신없던 그 다음주 토요일이었다. 그날은 아예 아침부터, 오늘은 지하철로 가야겠그니. 생각하고 집을 나선 서영이었다. 일이 끝나자마자 서영은 지하철역까지 택시를 탔다. 그리고는 한시간을 사람들에 부대끼며 북한산자락까지 와서 내렸다. 온몸에 땀이  흥건했다. 휴...출구를 빠져나와 역사 주차장을 지나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세요“

 누군가, 하고 코팅된 차창을 들여다보는 서영에게 그가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이웃. 하지만 차를 같이탈 만큼 가까운 사이든가 우리가.

 ”괜찮아요. 걸을래요“

 ”타세요 얼른“

 그가 개구쟁이 같은 얼굴을 하며 얼른 타라고 재촉했다. 그렇게 해서 서영은 그날 처음 그의, 민기의 차에 올랐다. ”홍민기라고 합니다“ 그가 후진을 하며 먼저 이름을 말했고 ”강서영이예요“하고 서영이 받았다. 그의 차안에선 레몬향이 묻어났다. 이사람, 레몬을 좋아하나보다...     

 ”주말에 주로 뵙는거 같아요“

 ” 네...주간엔 엄마집에 있어요. 일하는것도 있고 “

  민기가  왼쪽 깜빡이를 키며 말을 건네온다. 운전을 오래 한 사람이다. 여유있게 핸들을 돌리는 모습에서 서영은 그렇게 느낀다. 지난번, 돌아서던 모습에서, 여유있게 차선을 바꾸는 모습에서 또다시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현...

 ”난 친구놈들이랑 벤처 하나 하나 하는데 영 시원치가 않네요“

  민기가 멋쩍어하며, 음악을 튼다. 요요마의 첼로가 낮게 흐른다...

  건물 계단을 오르며 민기가 차 한잔 하겠냐고 제안하지만 서영은 정중히 거절한다.

  ”태워주셔서 고마워요“

  서영은 깍듯하게 인사하고 자기집으로 들어간다.        




   ”언니가 좀 올라와주세요“

  얼마전부터 눈꺼풀에 뭐가 씌운 것 같아 답답하다는 노모를 데리고 병원을 찾은 서영은, 의사로부터 백내장이니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얘길 들었다 .수술하고, 사나흘 정도 입원해야 한다는 얘길 듣고  병간을 위해 부산 올케에 전화를 걸었지만 대답은 예상한대로였다.

 ”어떡해요 아가씨. 여기 일이 많아서....“

  알았다고 짤막하게 답변하고 서영은 전화를 끊었다. 그렇다고, 허구한날 컴퓨터 게임에만 열중해있는 종혁이 병실이 지킬리도 만무했다. 사정을 들은 레스토랑 사장은 마지못해 1주일의 휴가를 내주었고 결국엔 서영이 노모를 간호했다. 말이 레스토랑이지, 서영은 발권업무까지 같이 보았다. 여행에 취미가 있는 사장은 레스토랑매출이 어느정도 궤도에 오르자 자그마한 여행사를 겸했던 것이다. 그래서 주로 저가 항공을 찾는 고객들에게 발권업무까지 서영에게 맡긴 것이다. 서영역시 단순 노동인 서빙업무보다 여행사일을 더 즐겨하기도 했다.     

  그렇게 노모를 오롯이 떠맡은 서영은, 두평도 안되는 병실에 갇혀 지낸다는게 답답했다. 보호자용 침대라는 것도 말만 침대지, 불편하기 이를데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혼자서 또 이 짐을 맡았다는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서영을 자꾸 튕겨나가게 만들었다.

  올케는 노모가 입원해있는 동안 딱 한번 병실로 전화를 걸어왔다. 어머니 죄송해요. 제가 가있어야 하는데...서영이 있는데 니가 왜 오니...여기 걱정은 말아라. 종혁이도 잘있어. 염려마...노모는 바로 조금전까지도 수술 후유증으로 구역질이 난다며 서영에게 신경질을 부리다, 며느리의 전화엔 씻은 듯이 다 나은 사람이 돼 있었다.     

  하지만 집에 온 모친은 퇴원후에도 심한 현기증에 시달려 서영은 일주일을 더 노모곁을 지켜야했다. 볼모...그런 생각이 자주 서영의 뇌리를 스쳐갔다. 노모의 현기증이 가라앉자 그 현기증은 서영에게 옮겨왔고 서영은 그날로 집을 나와 자기 원룸으로 향했다. 비어있는 방....그 비어있는 방을 얾마나 그리워했든가. 그리곤 도어락 숫자를 누르는데 뒤에서 민기의 소리가 들려왔다


  ”오랫만이네요“

  민기는 지난번에 거절당했던, 같이 차 마시기를 다시 제안했다. 서영은 그러고 싶었다.          

  민기의 방은, 남자 방치고는 깨끗이 정돈돼 있었다.  서영이 남자방에 들어와본건, 현의 방 이후로 처음이었다. 여기저기 책이 가득하고, 음악 CD와 노트북, 소파베드, 그리고 레몬향...그의 차에서도 묻어나던 이 내음. 레몬을 좋아하는구나, 하다가 저만치 벽에 걸린, 제임스 리찌의 그림에 눈이 간다. 국내에서 그리 알려지지않은 확가인데도, 리찌를 알고 있구나, 싶어 신기했다. 뉴욕이라는 대도시의 서정을 익살스럽게 그려낸 리찌의 그림을 오래전, 현과 함께 본적이 있다.

  비오는 어느 일요일, 도심에서 현을 만났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허둥지둥 들어선게 인사동 어느 화랑이었고, 거기서 리찌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서영은, 그 익살속에 묻어나는 따스한 느낌이 좋아다...그 그림은 아니지만 , 지금 민기의 방에도 리찌가 걸려있다 생각하니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 옛기억이 되살아났다.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어. 너만 원하면“

 서영의 동맥을 끊게 하고 가버린 현이, 결혼 한달만에 다시 서영을 찾아왔었다.

 ”뭐라구?“

 당장이라도 앞에 놓인 찻물을 끼얹고 싶었지만, 그보다 앞서 눈물이 흘렀다.

  서영은 그러는 현이 가증스러웠다. 현은 떨리는 손으로 담뱃불을 당겼다. 너만 원한다면, 우리 다시 만나. 나쁜자식. 처음으로 남의 뺨을 때리고 서영은 까페를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집앞에 이르렀을때, 현의 회색 승용차는 이미 와있었고 서영은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나쁜자식. 또다시 같은 말을 내뱉으며 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렇게 6개월을 갔든가. 내 남자였던 남자의 정부로 서영은 몰래 사랑을 했고 현은 불쑥, 아내가 임신을 했다며 또 이별을 고했다. 안되겠어. 아이가 생겼다는 말을 듣는데, 더 이상 이러면 안되지 싶었어...우리, 그냥 친구로 지내.

 매정한 얼굴로 현이 먼저 일어났다. 서영은 그런 현을 쳐다보는 대신, 자기의 빈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언제나 이런식이었어. 텅 비어버림. 어느날 갑자기 실종돼버리는 내것들.     


  ”육감이란거 무시 못해요. 아무래도 오늘 집에 손님이 올거같아, 안하든 청소를 다 했거든요“ 하며 민기가 커피잔을 쥐고 돌아보는 순간,  소파에 비스듬히 기댄채 잠들어있는 서영이 보였다. 피곤한가보다...     

  서영이 잠에서 깼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건 낯선 커튼이었다. 꿈에서 현을 봤기 때문일까, 심란했다. 그러다, 저만치 잘 모이는 곳에 놓인 메모지가 눈에 들어왔다. ”수퍼에 갔다 올게요“이런...깜빡 잠이 들었구나 남의집에서. 서영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노모에게서 이어받은 현기증은 몸살기운의 시초였다. 그래서, 원룸에 들어서기 전 근처 약국에서 몸살약을 지어먹은게 결국 서영을 까부러지게 만든 것이다. 메모를 남기면서 민기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생각하니 서영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서둘러 일어나다 서영은 다시 어지럼증에 풀썩 주저앉는다. 그때 민기가 들어선다

  ”더 자요 피곤해 보이는데“

  ”미안합니다“

  서영은 휘청거리는 몸을 추스르며 서둘러 현관으로 갔다. 급히 신발을 꿰어신는데 민기가 말했다

  ”저녁 같이 먹으려구 잔뜩 사왔는데...식사하구 가요“

  ”폐를 너무 끼쳤어요 죄송합니다“

  서영은 죄짓고 도망가는 사람처럼 서둘러 민기의 집을 나왔다. 밖엔 이미 어둠이 내려 있었다. 바로 옆의 자기집이 서영에겐 멀게만 느껴졌다.          


  다음날 일찍 서영은 겨울 트레이닝을 꺼내 입고 등산에 나섰다. 원룸 뒤로 나있는 등산로에 언제나 눈이 갔지만 이사오고 한번도 산을 오른적이 없었다. 빈속에 약을먹을수는 없어 집을 나서기 전, 간단히  수프를 끓여먹고 약을 먹은 터라 온몸이 기분좋게 나른했다. 

  보기엔 완만해 보이던 등산로가 의외로 경사가 급한것에 서영은 사뭇 놀라고 있었다. 호흡을 고르느라 잠깐 멈춰섰을 때, 저 위에서 이미 산을 탄 뒤  내려오는 역시 트레이닝 차림의 민기가 보였다. 서영은 제발 그가 아무말도 안하고 지나쳐주길 바랐다. 하지만 민기는, 서영을 보자  환히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안그래도 아까 같이 오자고 할까 하다가 어제 몸이 안 좋아보여서 그냥 혼자 왔어용“

 도대체 이게 무슨 망신이람....

  ”오늘은 좀 괜차ᆞ갆으세요?“

  ”예..“

  서영은 서둘러 자리를 뜨려했으나 민기가 한팔을 잡았다. 흠칫 놀라는 서영에게 민기는 짓궂게 말을 이었다.

  ”우리, 아침 같이 해요“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게 그 주말은 그렇게 갔다. 민기의 집에서 도깨비같은 잠을 자고, 다음날 등산로에서  마주쳐 같이 아침을 먹고, 오후엔 근처 할인점에서 서영의 소소한 전자제품 몇가지를 함께 골랐다. 누가봐도 부부라고 했을거다, 서영은 웃음이 나온다. 할인점에서 돌아와 각자의 집으로 들어가던 순간 민기는 ”언제, 초대 한번 해줄거죠? “ 하고 슬쩍 말을 던졌다.

  서영은 딱히 대답할 말이 없어 눈인사만 서둘로 하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날이후로 서영은 일하다 말고 문득, 민기의 방이 떠오르는가 하면, 등산에서 마주쳤을 때, 땀을 닦으며 씩 웃던 그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내가 뭘 하고 있는거지...서영은 다음 주말, 일부러 원룸으로 가지않았다. 대신 직장 동료 미정과 영화를 보고 그날밤을 미정의 집에서 보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줄곧, 비어있을 자기의 방, 그리고, 이어서 떠오르는 민기의 방에 쏠려있었다. 어쩜, 그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출근을 해서도 제대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두 공간. 그것 사이로 보이지 않는 통로가 나있는거 같았다.그렇다면, 비어있는 동안에도 민기는 수시로 서영의 공간으로 오갈수 있지 않을까...

  몹시도 길게 느껴진 그 한 주를 보낸 뒤, 서영은 토요일 오후 택시를 잡아타고 원룸으로 향했다. 택시로 2만원 이상이 나오는 거리였지만, 민기의 방으로 이어지는 벽속에 구멍이라도 나있을거 같았다.

  그러나 방은 안전했다. 누구도 침입한 흔적이 없고 모든 것은 제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안심하라고, 방이 그렇게 말하는거 같았다. 순간, 맥이 풀려왔다.     

 현이 떠난후, 서영은 참혹했던 그 방의 기억을 갖고 있다. 현의 방. 언젠가 둘이 함께 사용하게 되리라 생각한 것들을 사들였던 그 방....그래서 헤어진 후에도 쉬는 시간을 틈타 두세번 택시를 잡아타고 그의 방 앞에 가서 기웃거린 적이 있다. 그리곤 도어락 숫자까지 눌러봤다. 하지만 비밀번호는 바뀌어 있었다...헤어진이의 방을 기억하는 것만큼 참담한 것이 어딨을까...          

  그날밤 서영은 마치 남의 집에 와있는 것처럼 자기방 구석에서 새우잠을 잤다. 그러다 밖에서 차 시동소리가 들려와 잠에서 깨었다. 서영은 발코니로 나갔다. 아래 주차장은, 어둠에 쌓여있었다. 차 한 대가 새벾의 파리함 속으로 사라져가는게 보였다. 서영이 형광등 스위치를 누르자 예의 그 하나가 또 깜빡거린다.      

  ”내가 전구 담당이잖아요“

  민기는 믿음직한 일꾼 티를 내며 서영의 집으로 들어섰다. 새벽에 자고 있는 남자를 깨워 형광등을 갈아달라는 여자는 나밖에 없을거다, 하면서도 민기의 집 초인종을 눌렀고 민기는 예상대로 잠옷차림으로 문을 열었다. 전구 때문이라고 하자, ”그래요“하고는 더 이상 묻지 않고 현관에 비치된 철제 접이 사다리를 들고 서영의 집으로 들어섰다. 드디어 또 누군가를 들였구나, 하는 생각에 서영은 가슴 한켠이 먹먹해 옴을 느낀다. 잠시후 방은 눈부실만큼 환해진다. 이 눈부심.     

” 제가 없는 동안, 방을 좀 봐주실수 있을까요?“

  극말에 민기가 사다리에서 내려오며 물끄러미 서영을 본다.

  ”그냥...비오고 그럴 때 잠간씩 보일러 올려주는 정도만. 비번 알려드릴게요“

 ”그래요. 그래줄게요 “

  그의 몸에서 레몬향이 난다.그의 방에서도, 차에서도 묻어나던 이 향은 서영은 오래 기억할거 같았다.


  ”오늘 니 집에 안갔니?“

  노모가 의외라는 듯, 서영을 맞았다. 그러다, 서영의 손에 들려있는 케익을 보고는, 신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종혁이 생일이라고 케익을 다 사왔니? 고모는 고모구나, 하며 웃는다.

  서영은  그날이 종혁의 생일인걸 몰랐다. 다만, 토요일 근무가 끝나고 원룸으로 가려는데 노모의 얼굴이 퍼뜩 떠오른 것이다. 민기가 갈아준 형광등이 마술을 부리는걸까, 하며 서영은 케익까지 사들고 본가로 간 것이다.

  ”고모, 내 생일이라구 케익 사온거야?“

  종혁역시 케익을 보자 싱글벙글했다.

  노모와 함께 오랜만에 TV주말 연속극까지 함께 본 뒤, 서영은 일어섰다.

  ”다 늦었는데 그냥 있어라“하고 노모는 말렸지만, 서영은 민기가 혼자 있을것이 맘에 걸려 그럴수가 없었다. 전구를 갈아준 다음부터 서영은 민기에게 뭔가 보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그 집앞에 가서 초인종을 누르려 하면 자신이 없었다. 한번은 딸기를 한접시 가득 담아 가져갔다가 그냥 돌아서기도 했다.

 원룸으로 오는 길에 서영은 할인마트에 들러 민기의 셔츠를 하나샀다. 옅은 파란색 줄무늬가 세로로 나있어 시원해보였다. 조금 있으면 여름이고, 그때 잘 어울리겠다, 싶어 망설이지 않고 샀다. 그리고 그와 함께 나눠 마실, 와인도 한병 샀다. 내일은 어디 가까운 곳에라도 다녀오자고 해보자, 내심 다짐하며 계단을 올라왔을 때, 서영앞엔 , 어떤 낯선 여자와 함께 서 있는 민기가 눈에 들어왔다. 민기가 도어락 숫자를 누르다 말고 서영과 눈이 마주쳤다.

  ”집사람이예요“

  그말에 서영은 하마터면 와인병을 떨어뜨릴뻔했다. 아내...결혼한 사람이었구나. 커피를 같이 마시고 등산을 함께 하고, 전구를 갈아달라고 하면서도,, 이 남자가 기혼자일수 있다는 생각은 왜 하지 못했을까...

  민기의 아내는 어둠속에서도 병자같은 느낌을 풍겼다. 어디가 아픈가보다...

 ”네“

  서영은 말끝을 흐리며 얼른 자기집으로 들어갔다. 잠시후, 민기의 집 현관문  여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날밤, 내내 닫힌 문 앞에서 울고 있는 자신의 꿈을 서영은 꿨다.     

  이후로 주말이 돼도 서영은 자신의 원룸으로 가지 않았다. 그런 서영을 노모는 은근히 불편해했다. 하지만, 가스요금을 내야 하는 때가 돼서 근 한달만에 서영은 원룸으로 갔다. 그러나 가스 고지서는 자기 우편함에 없었다. 혹시나 해서 민기의 우편함을 보자, 이번에도 거기에 자기 고지서가 들어있다. 불끈 화가 나서 서영은 그 고지서를 끄집어낸다. 그러다 그만 종이에 손을 베인다. 칼에 베이는것보다 종이가 더 기분이 나빴다. 뭔가, 기만당한 느낌...그때 민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랫동안 안보이길래...어디, 갔었나요?“

 목소리에 소심한 원망이 섞여있었다. 서영은 대답않고 계단을 뛰어올라간다.      

    

  그리곤 열흘후, 서영은 레스토랑 사장에게 사직서를 내민다. 10년이 되도록 단 한번도 월급을 인상해준 그가 미웠다. 그래서 보름전, 최후 통첩하듯 답을 달라했지만 그날까지 사장은 침묵했고 서영은 더 이상 그 밑에서 일할수 없다고 판단했다. 사장은 처음엔 서영을 붙드는 시늉을 했지만, 서영이 완강하자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여길 그만두면 다음이 막막해진다..그래도 일단은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싶었다 . 민기의 아내를 본이후로 모든게 번잡스러웠다 서영은.     

  그렇게 레스토랑을 그만 둔 다음날, 부산 올케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날, 노모가 또 전화를 했겠지, 하고 서영은 올케가 이번엔 또 무슨 말응ㄹ 할까,  기다렸다. 올케는 서영에게 종혁을 데리고 호주로 나가라고 했다. 종혁을 호주 대학에 넣고 서영은 뒷바라지를 하라는 얘기였다.

  ”돈은 있어요 언니? “

 돈 얘기를 함으로써 빨리 단념시킬수 있다 판단했다.

 ”그거야...아가씨, 종혁이랑 떠나구 나면, 어머니 혼자 계시기도 그렇고, 저희가 모셔야죠“

  그렇게 되면, 지금 집을 처분하겠다는 말이 아닌가. 이 여자, 해도 너무 한다, 는 생각이 들었다. 서영은 후회가 스쳤다. 처음 이 집을 마련한 다음, 자기 명의로 하라는 노모의 제안을 듣지 않고, 엄마 노후 자금으로 해줄게요, 하고는 노모의 명의로 했던게 여간 후회스러운게 아니었다. 이 집의 권한은 자기에겐 없는 것이다. 그때 내 이름으로 했어야 한다...뒤늦은 후회가 가슴을 후벼팠다. 올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걸어 닦달했다. 열 번찍어 안 넘어가랴 싶은 눈치였다. 서영은 아예, 전화코드를 빼버렸다. 그러자 이번엔 서영의 휴대전화에 장문의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서영은 올케와 오빠의 전화번호를 차단하고 , 그길로 자기 짐을 꾸려 집을 나왔다. 노모는 은근 아들네와 살게 돼 좋은 눈치였다. 서영은 다신 이집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집을 나섰다. 그러나 막상 트렁크 두 개를 들고 집을 나서자 갈곳이 없다는 생각. 어디로 가나..  

        

  결국, 서영은 밤늦게 자기 원룸에 도착했다. 그래도 여기뿐이구나. 하지만 그날밤 서영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욕실 천장에서, 물이 새는지 밤새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닫아도 그 소리는 예민하게 서영을 자극했다. 다음날 아침, 날이 밝기를 기다려 서영은 윗층으로 올라가 얘길 했으나 눈꼽도 떼지 않은 얼굴의 윗층 여자는 매몰차게 내뱉었다. 자기네도 위에서 물 새는걸 몇년째 참고 있으니 , 아쉬운 사람이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말하곤 문을 쾅 닫아버렸다. 화가 난 서영이 다시 초인종을 눌러댔지만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서영이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저만치, 방바닥 위를 줄지어 움직이는게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새까만 개미떼였다. 서영은 소름이 돋았다. 이 방 어디에 이런 개미집이 있었단 말인가, 서영은 노트 한권을 집어 사정없이 개미들을 후려쳤다. 그리고는 개미집을 찾아 여기저기  훑었다. 마침내, 거실 창틀과 벽 모서리가 만나는 지점에 조그맣게 구멍이 나있는 것이 보였고 거기, 개미들이 바글대고 있었다. 세상에....순간, 방 전체가 개미떼에 물어뜯기는 모습이 서영을 스쳐갔다. 개미에게 먹혀버리는 자기의 모습도 본 것 같다.          



 부동산 중개소에 원룸을 내놓고 나오다 민기와 마주쳤다.

 ”왜 여기서 나와요?“

  ”이사하려구요“

  ”어디루..?“

  난감해하는 민기를 무시하고 서영은 걸음을 재촉했다. 민기가 서영을 잡았다.

 ”아낸, 그날 와서 딱 하루 있다 다시 내려갔어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죠? 왜 그런 얘기해요?“

 ”아낸...“

 서영은 민기를 뿌리치고 근처 화장품 가게로 들어갔다. 살 것도 없이 들어서고 나자 막막했다. 낮잠을 자던 중이었는지 주인 여자가 눈을 부비며, 어서오세요,를 하는데 입에서 단내가 났다. 얼결에 아이라이너를 하나 사들고 나와 주위를 둘러봤으나 민기는 없었다.

   딱히 이사할집도 없었다. 단지, 혼자사는 회사 동료였던 미정에게 한달만 신세를 지기로 한게 다였다. 그 한달 안에 새집을 구해야했다. 얼결에 산 아이라이너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원룸 계단을 오르는데 저만치 민기가  벽에 기대 서 있다. 화가 나있는게 역력했다. 그걸 보자 서영도 화가 났다. 그를 무시하고 지나치려는데 뒤에서 민기가 안아왔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서영은 사흘 꼬박 짐을 쌌다. 소파베드와 전기포트, 종이컵과 나무젓거락만 빼고 모두 박스에 쑤겨박았다. 이제 내일이면 떠난다. 뻐근한 몸을 소파베드에 눕힌다.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나른한 취기가 몰려든다. 지난번 민기가 갈아준 형광등이 너무 밝다...괜한 짓을 했구나..휴대폰 진동음이 신경을 자극했다. 한참을 그러더니 진동은 멈춘다. 그리곤 도어락 누르는 소리에 이어 민기가 들어선다.

 서영은 그의 시선을 피하느라 요란하게 테잎을 찢어 박스에 붙인다. 민기가 서영에게 오다 잠깐 붙박이장을 본다. 반쯤 열린 장 안에는 지난번 민기에게 주려고 샀던 샤츠가 걸려있다. 민기가 서영을 돌아보자,

  ”남편한테 가요. 그동안 사정이 있어서 떨어져 있었어요 “

  하고 서영은 거짓말을 둘러낸다.

 ”그래요..“ 하고 한참 뜸을 들이던 민기가 말을 이어간다.

 ”어제 전화로 얘기했어요. 아내한테 헤어지자고“

 서영이 놀라서 그를 쳐다본다.

  ”아내가 여고 2학년때 집에 2인조 강도가 들어 장인과 아내를  포박하고 그 앞에서 어머니, 그러니까 장모를 성폭행했대요. 윤간이죠“

  ”...“

  ”그 이후로 장모님은 신경증에 시달리다 1년후에 자살하셨고 아낸 우울증에 빠졌어요...처음 만났을 때 다 얘기했는데 내가 괜찮다고 했어요.다 이해한다고. 하지만 아낸, 그 충격으로 부부관계를 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내 말 안 끝났어요...아내쪽에서 헤어지자고 한걸 내가 붙들고 있었어요. 아직도 사랑하는지, 정이 남은건지 그런건 돌아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냥 떠나면 안된다고, 이 여잘 버리면 안된다고 생각했는데....어제 , 전화했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이제 당신을 떠나야겠다고“ 

  서영은 왠지 화가 치민다

  ”나, 남편한테 간다고 했어요. 벌써 잊었어요?“

  그러나 민기는 붙박이장에서 묵묵히 셔츠를 꺼내더니 자기 몸에 대본다.

  ”나한테 꼭 맞는군요“

  서영은 얼굴이 화끈 딸아올랐다.

  ”가지 말아요. 또 혼자 헤매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러면서, 서영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민기의 얼굴이 다가왔다. 자기곁을 떠나지 말라고 민기의 두눈이 그렇 말했다. 아내에겐 이미 이별을 고했노라고.     

  다음날 새벽, 서영의 이삿짐을 부리는 인부 둘의 새벽 기침 소리가 주위의 고요를 깼다. 저 안에서, 그 방에서, 민기도 이 소릴 듣고 있을까, 하며 서영은 마지막으로 민기의 헤몬향이 묻어나던 그 방을 올려다본다. 깜빡 잠이 들었던 그 방...그랬든가 잠깐,하며 서영은 이삿짐 용달에 오른다. 차가 골목을 나와 우회전을 할 때 서영은 이미 잠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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