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청혼

by 박순영

다시 보면 이말을 해야지,하고는 여러번 되뇌었던 그 어떤 말도 형석 앞에서 입으로 나오질 않는다. 이상한 일이었다. 1년만에 걸려온 그의 전화를 받고 어젯밤에는 잠까지 설쳤는데.

작년 이맘때 그와 헤어진 대학로 그 까페의 내부까지 그대로 기억났고 실제로 그곳에 몇번 가보기까지 하였다.그럴리는 없지만 혹시라도 만나질까 하고..


애린은 오랜만에 마주앉은 형석과 서로 눈만 껌벅이며 어색하게 시간만 보낸다. 별일 없었냐는 그의 물음에도 그저 고개만 끄덕일뿐 별 감흥이 없다.

" 우리 연극 하나 볼까? 실은 내가 예매했는데"

라며 형석이 슬쩍 운을 뗀다. 애린은 그러나 그의 제안에 이렇다 저렇다 대답을 하지 않는다. 봐도 그만 안봐도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헤어져있는 동안 다른사람을 마음에 둔적도 그렇다고 애써 형석을 잊으려 한것도 아닌데 오히려 그의 전화며 연락을 애면글면 기다리다시피 하였는데 그것이 현실로 다가오자 정작 어떻게 대응하고 반응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커피를 반쯤 마시고 그녀는 마지못해 물어몬다. 무슨 연극인데? 하자 형석은 그제야 안도하는 얼굴이 되면서 , 너 좋아하는 에드워드 알비,거야. <동물원이야기>


그 연극이라면 애린도 꼭 한번은 보고 싶었다. 학부 미국문학사 시간에 원어로 그 희곡을 읽으며 애린은 '부조리문학'에 눈을 떴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를 죽여서라도 소통하자'는 마지막 메시지가 그만큼 강렬하게 와닿은 것이다. 그런데 10여년이 흘러 이제는 연극으로 볼수 있게 된것이다. 원작의 감흥을 얼마나 살려냈는지는 모르지만....

"언젠데? 나 요즘 자주 야근걸려서"라고 애린이 답하자 형석의 얼굴이 금방 어두워진다.

"내키지 않으면 말고"라며 그가 주섬주섬 일어나려 한다. 이대로 헤어지면 아마 다시는 볼수 없으리라..그런데도 애린은 애써 그를 잡고 싶지가 않다.


둘은 어쩌다보니 거의 동시에 대학로 까페를 나와 종로쪽으로 길을 잡고 있다.

"건강은 괜찮지?"

그말에 애린은 쿡 웃음이 나온다. 뜬금없이 건강은....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나이 서른 초반에 무슨 일이 있을까...그런데 곧이어 자신도 똑같은 질문을 한다.

"너도 건강하지?"

이쯤되면 서로 할말은 다했다 봐야 했다. 그럼 연극은 다음에 보자..꽤 길게 하거든...하면서 형석이 헤어지는 운을뗀다. 애린은 잡으려면 지금 잡아야 한다 느끼면서도 왠지 그럴 마음이 강하게 일지 않는다.


그렇게 형석과 이도저도 아닌, 재회도 재이별도 아닌 애매한 만남을 갖고 집에 들어선 애린은 형석을 만나기 위해 그나름 공들여 했던 화장을 천천히 지우기 시작한다. 그러자 드러나는 민낯이, 자신도 이제는 더이상 팽팽한 10년전 여대생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내 마음이 변했나...


이후 일주일은 그야말로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 특근수당도 없이 허구한날 야근에 주말까지 반납하며 근무를 해서 겨우겨우 납품을 마친후 애린은 동료들과 함께 회사 근처 호프집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눈발이 날리는 휴일 저녁이었다.

그렇게 술집 가까이 이르렀을때 뒤에서 짧게 자동차 경적이 울린다. 애린이 힐끔 돌아보자 눈에 익은 흰색 suv가 자신을 향해 천천히 다가온다. 형석의 차였다. 자신이 수도없이 보조석에 탔던 그 차였다. 아마도 지난번 봤을때 요즘 주말에도 근무를 한다는 얘기를 했던 거 같다. 그렇다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애린을 형석은 하루종일 기다렸다는 얘기가 된다. 동료들을 먼저 호프집으로 들여보내고 애린은 그 자리에 남았다.

"우리 어디가서 저녁 먹을까?"형석이 차에서 내리면서 그렇게 말한다.




지금쯤 동료들도 호프집을 나왔을거 같다.

두번에 나뉘어 세팅된 정식을 다 먹고나자 애린은 몸의 냉기가 스르르 가시는 느낌이었다.

"나 추웠나봐.."하며 애린이 자기앞의 뜨거운물을 후후 불어대며 마셔댄다.

"나, 실은 한 사람 만났었는데"라며 형석이 조심스레 입을 연다.

다른 여자를 만났었다는데도 애린은 그 어떤 마음의 동요도 느낄수가 없다.

"좋은 사람이었을텐데..."하며 그녀는 애매하게 그말을 받는다.

"너만한 사람이 없더라구..."

그말은 지금은 '그녀'가 형석의 곁에 없다는 얘기리라..

"결혼, 할까 우리?"라며 형석이 한참을 머뭇거리다 용기를 낸다.

그러나 애린은 단번에 고개를 젓는다. 그러자 형석이 어느정도 예상을 했다는듯이 자신도 고개를 주억거린다.



"데려다줄게"

둘이 레스토랑 밖으로 나오자 형석이 자기 차로 가면서 말한다. 애린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린다. 그러자 리모콘으로 차문을 열던 형석이 뒤를 돌아본다.

"그냥 갈래 그럼?"

'응. 택시 탈게"

애린의 짧고도 분명한 거절이 그에게 그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은 눈치다. 형석은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뭐야 이건"하면서도 애린은 그손을 쥔다.

둘은 그렇게 악수를 나누고 완전히 헤어지기로 무언의 합의를 본다.

잠시후 애린이 지켜보는 앞에서 형석의 차가 부르릉 멀어져 간다...


그렇게 멀어져가는 그의 차를 보던 애린의 마음이 갑자기 동요하기 시작한다. 기회였는데 내가 놓친걸까, 하는 마음에 그녀는 갈피를 잡을수가 없다.

그러는데 잠시 멎었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눈발은 금방 굵어져서 그녀를 눈사람으로 만든다. 그녀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형석에게 문자를 날린다

"눈길 운전 조심해"

그러자 잠시후 운전중에 급히 찍었는지 오타섞인 답문이 날아온다.

"너 파서 행고켔어"라는.

그녀는 그 문장을 수정해본다 '너를 봐서 행복했어'라고. 그러는데 저만치 빈택시 한대가 애린 앞에 와서 조용히 멈춘다. 세운적도 없는 택시가...반사적으로 택시문을 열던 그녀에게 뭔가 싸한 느낌이 밀려온다. 이게 마지막이라는. 이 차를 타고가면 다시는 형석을 볼수 없다는 생각이 그녀를 덮쳐온다. 애린은 다시 택시문을 닫는다. 그러자 기사는 혼자 구시렁대더니 그대로 차를 몰고 저멀리로 가버린다.



이번에는 애린이 급하게 문자를 찍어댄다. 그바람에 오타가 난다.

"도라와주네?"

그렇게 문자를 날렸지만 형석에게서는 답문이 오지 않는다. 1년이라는 시간이 서로를 타인으로 만들었다는 조금전까지의 감정은 사실이 아니었다. 잠시 어색했을뿐, 그녀에게는 여전히 형석 하나뿐이었다...그녀가 망연자실하고 있는데 옆에 차 한대가 와서 멈추는 기척이 느껴진다. 쳐다보니 형석의 차였다.

"뭐야 . 오타나 날리고"라며 그가 운전석에서 배시시 웃는다. 애린은 그가 또 가버릴까 후다닥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탄다.

"눈 많이 온다 그치?"

애린의 속을 다 들켜버린 그 말에 형석이 "결혼, 해줄래?"라며 다시 한번 묻는다. 그말에 눈물이 그렁한채로 애린은 두팔로 그의 목을 감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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