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수북한 뒷머리며 후드가 달린 브라운색 패딩,무엇보다 180이 좀 안돼보이는 키, 비록 뒷모습이지만 기영이 틀림없다.. 은혜는 얼른 몸을 돌려 식장을 빠져나오다 허겁지겁 들어서는 한남자와 부딪친다. 그바람에 남자가 "어이구 죄송합니다"라 말했고 그 소리에 기영이 뒤를 돌아다본다. 은혜는 얼굴이 화끈거려 더 이상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남자는"괜찮으세요?"라며 또한번 묻는다. "네,네"하고는 빠르게 식장에서 빠져나오는데 팔 하나를 누군가 잡는다. 안봐도 안다 기영이다.
하필 남의 결혼식에서 이렇게 마주칠건 또 뭐람, 하는 표정은 은혜나 기영이나 마찬가지였다. 둘은 피로연이 준비된 홀에서 멀뚱히 마주 보고 앉았다.
"뭐라도 먹을까?" 침묵이 어색한건 기영도 마찬가지였다.
"난 별로 생각없어. "하고 은혜는 별다른 일정도 없는데 시간을 보는 시늉을 한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보던 기영이 "안그래도 연락 한번 해볼까 했어"라고 말하고는 이마의 땀을 닦아낸다. 한겨울에 땀이라니...뷔페홀의 난방은 적당해서 땀이 흐를 일이 없는데 그렇다면 이 남자 긴장했구나싶다.
은혜는 이 자리를 어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과 그반대의 생각사이에서 갈팡거린다.
"당신 회 좋아했지? 있어. 내가 갖고 올게"라며 기영이 음식을 가지러 간다.
은혜와 기영은 회사 선후배로 만나 몰레 만남을 유지하다 발각이 됐고 그 즈음 은혜의 뱃속엔 2달된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그렇게 둘은 결혼했고 회사는 은근 은혜에게 퇴사를 종용했다. 사회가 아직은 남성위주라는걸 알기에 은혜는 별저항없이 퇴사해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정성스레 키웠다. 기영도 그만하면 착실한 가장이자 남편이고 은혜를 살뜰히 챙겨주는 셈이었다.
그런 그가 부하 여직원과 일본 출장을 다녀온 뒤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한밤에 그여자의 전화를 받고는 허둥지둥 뛰쳐 나가질 않나, 속옷 선물을 받아와서 들키지를 않나...
은혜는 영낙없는 외도라 판단하고 주저없이 이혼을 요구했고 기영은 그런게 절대 아니라고 하였지만 결국에 둘은 갈라섰다.
"그럼 진이는 당신이 맡을래?"라며 그는 아이를 은혜에게 키우게 하고 매달 꼬박꼬박 양육비를 보냈다.
그러나 이혼후 한번도 밖에서 만나거나 한적은 없었다. 진이를 볼수 있는 권리가 있음에도 기영은 이따금 아이와 전화통화만 하고 보러 오지는 않았다. 그것도 은혜는 마땅치가 않았다.
예식 하객으로 만나 결혼까지 간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이런 경우는 들어본적이 없는터라 은해는 마음이 뒤숭숭했다.
접시 가득 회며 해산물을 담아온 기영이 자리로 돌아오자 은혜는 자세를 고쳐앉는다. 긴장이 풀리질 않는다.
"먹자"하고 기영은 예전 둘이 부부였을때처럼 허겁지겁 먹기 시작한다.
기영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게걸스레 먹는다는, 그것이었다. 거의 씹지도 않고 꿀꺽꿀꺽 삼켜버리는 그를 타박한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다 은혜가 일어나 물을 가져온다. 그리고는 그에게 물을 건넨다.
"물 마시면서 먹어. 그러다 체해"
그말에 기영이 멈칫한다.
"누구, 있어?"
기영은 작심한듯 물어본다.
이혼뒤 은혜의 소식을 어찌 알았는지 동창 민우가 대시를 하긴 했었다. 하지만 두어번 가벼운 데이트를 끝으로 그녀는 '친구로 돌아가자'고 하였다. 은혜의 딸 진이가 아직도 아빠를 찾는다는 말에 민우도 더이상은 밀어부치지 않았고 들려온 말로는 그후 두달있다 한참 어린 피아니스트와 결혼하였다고 한다. 그도 청첩장을 보냈지만 그래도 잠깐이나마 이성으로 만난 사람의 결혼식에 간다는게 어색해 은혜는 계좌로 축의금만 보냈다.
은혜는 '누가 있냐'는 기영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들의 결혼을 파경에 이르게 한 '그녀'가 떠오른다.
"그래서 당신은, 했구 결혼?"하자,
"니가 이러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결혼을 해"라며 기영이 정색을 한다.
아이까지 있는 유부남이 바람을 피울땐 언제고 이제는 전처가 아직 싱글로 있다고 자기도 재혼을 안했다는말이 앞뒤가 들어맞지 않아 은혜는 피식 웃음이 새어나온다.
"나 약속있어. 갈게"라고 그녀나 음식엔 손도 대지 않고 일어난다.
"왜...좀더 있다 가지"하며 그가 그녀의 옷자락을 슬며시 잡는다.
"진이 보고 싶으면 하루전에 전화해. 언제든 보여줄게"라고 은혜가 말하자,
"보면 데려오고싶고 그럴거 같아서 안갔어. 애도 힘들어할거 같고"라며 그동안 진이를 찾지 않은 이유를 해명한다.
"그럼 마음대로 해"하고 은혜는 뷔페홀을 빠르게 빠져나온다.
발레 파킹된 자기 차로 가서 차문을 열고 시동을 거는 은혜의 눈에 저만치서 두리번거리며 자신을 찾는듯한 기영의 모습이 보인다. 그동안 차를 바꿔서 아마도 찾아내지 못하는거 같다. 은혜는 경적을 울려줄까 하다 그만두고 그대로 차를 몰고 예식장을 빠져나온다. 사이드미러를 힐끔하자 여전히 이차저차 살피는 기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왜 찾아. 그렇게 갔으면"
30미터쯤 가다가 유턴해서 다시 돌아온 은혜가 싸늘하게 쏘아붙인다.
"차 바꿨구나..."
" 다신 만나지 말자. 진이 보고 싶으면 애만 봐."라고 은혜가 돌아서는데
"너 걱정 많이 했어. 그리구"
은혜가 냉소를 머금고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걱정? 그렇게 걱정하는 남자가 후배여직원이랑, 것도 한참 어린애랑 바람을 펴?"
"오해야...그냥 우린 선후배라고 했잖아."
"그럼 속옷선물은...그건 뭐였어?"
"그건..."
더이상 말을 섞기조차 싫은 은혜는 따귀라도 한대 후려갈기고 싶은걸 간신히 참는다. 이혼후에 서로의 결혼식에도 가서 축하해주고 하는건 확실히 이 나라의 정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어디가서 얘기좀 하자"하는 기영을 뿌리치고 은혜는 다시 자기 차에 오른다. 그런데 이번엔 시동이 걸리질 않는다. 그녀는 난감해진다.
그러고 있자 기영이 다가와서 자기가 시동을 걸어보더니 은혜의 의향은 묻지도 않고 견인차를 부른다.
공업사에서 차가 수리되는 동안 은혜와 기영은 사무실 좁은 장의자에 앉아 직원이 뽑아준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있다.
"걔하구는...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믿어줘. 이제 와서까지 거짓말 할 필요는 없잖아"라는 기영의 말에 은혜는 약간 동요하지만 이제와서 사실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랴는 심정이 된다. 다 물거품이 된 지금...
"일본 출장 가서도 방을 따로 잡았고 밤에 전화한건 야근하다 모르는게 있다고 급히 도와달라고 해서 간거고 도와줘서 고맙다며 속옷 사준거야."라고 그는 해명을 하였다.
그러자 은혜는 어이가 없다. "고맙다고 팬티를 사주는 부하 여직원이 어딨어"라며 그녀가 목소리 톤을 높인다. 그때 수리를 끝낸 직원이 들어서며 둘의 대화가 끊어진다. 직원은 견적서를 은혜에게 내보인다. 은혜가 신용카드를 꺼내려고 장지갑을 꺼는데 그녀보다 앞서 기영이 카드를 직원에게 준다.
"왜 당신이?"라는 은혜의 눈빛에도 기영은 아무말이 없다.
그렇게 공업사를 빠져나온 둘은 각자의 차로간다.
"정말 진이 보러 가도 돼?"기영이 차에 타면서 물어온다.
"그러든가..다 그렇게 해. 어쨌든 아빠잖아"라고 은혜가 대답한다.
내부 순환도로를 타며 은혜는 기영이 한 말이 참일까 거짓일까를 곰곰 생각해본다.
여러 정황상 그를 의심할만했다. 하지만 그는 그때도 지금도 아니라고 하지 않는가...하지만 아무에게나, 것도 어려운 선배에게 속옷 선물을 한다는게 말이나 되는가...그녀는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기로 한다. 기영은 여태 거짓말을 하고 있다. 사연은 모르겠지만 그 둘은 잘 안됐고 아마 헤어졌으리라. 아니면 쉬쉬 하면서 사내연애중이든가. 그러다 자기를 우연히 만나고 보니 마음이 조금 흔들렸을테고 아이생각도 났을테고 해서 간보기식의 접근을 한것이라고 그녀는 결론내린다. 그러고나니 혹시 자신이 '오해'로 이혼한걸지도 모른다는 후회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느낌이다.
그렇게 아파트 정문을 지나쳐 102동 앞에 주차를 하는데 저만치 먼저 와서 자신을 기다리는 기영이 보인다.
"진이 보고 싶어서.."라는 그의 말을 은혜는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창밖으로 함박눈이 내리자 진이는 오랜만에 본 아빠의 손을 끌며 나가서 놀자고 하였다. 슬금슬금 은혜의 눈치를 보던 기영은 잘됐다 싶은 마음에 진이를 번쩍 들어올려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부녀는 굵은 눈발을 맞으며 열심히 눈을 굴린다. 눈뭉치기 쉽지않을텐데, 라는 생각을 하며 10층 발코니에서 은혜가 내려다본다. 부녀는 은혜의 예감대로 조금 눈을 뭉쳤다 싶으면 이내 허물어지고 다시 뭉치면 또 무너져버리고를 반복하더니 결국엔 눈사람 만들기를 포기하고 대신 눈싸움에 돌입한다. 아이가 먼저 눈을 날리자 얻어맞은 기영이 잔뜩 눈을 뭉쳐 아이를 위협하고 아이는 이리저리 도망다니며 까르륵 웃어댄다. 10층까지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진이가 저렇게 웃은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그런 둘의 모습을 보녀 은혜는 무엇이 나을까, 어떤것이 최선일까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의문은 남지만 기영을 다시 받아주는게 맞을까, 아니면 내쳐야 하는걸까, 사이에서 그녀의 마음은 요동치기 시작한다.
그때 불에 올려놓은 찌개가 넘치는 소리가 들려 그녀는 얼른 가스불을 줄이고 냄비 뚜껑을 연다. 그러자 부풀어올랐던 찌개가 다시 가라앉는다. 비록 냄비는 국물로 뒤범벅 되었지만 씻으면 되는것이다...
그리고는 밖을 내다보니 부녀는 그동안 비록 자그맣고 여기저기 찌그러졌지만 자그만 눈사람 하나를 완성해놓고는 좋아라 하고 있다. 숨을 고른 그녀는 식탁에 놓여있는 전화기를 집어든다. 그리고는 기영에게 전화를 건다.
"올라와 밥 다 됐어"
그말에 기영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고맙다 은혜야"라고 답한다.
은혜가 테이블 세팅을 마치고 주방을 나서는데 어디선가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응? 하고 돌아보니 자신이 식탁을 지날때 기영의 물컵을 건드린 모양이다. 자잘한 유리 파편이 바닥에 흩어져있다. 아이가 다치기라도 할까, 그녀는 서둘러 휴지로 유리파편을 치우다가 기어코 손가락을 베이고 만다. 검붉은 피가 뚝뚝 바닥에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