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는 다음 수업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오랜만에 대학동창 기수를 교내 까페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그 전날 기수가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와서 내일 강희의 대학 근처를 지나간다며 볼수 있냐고 물어왔다.
그렇게 해서 둘은 몇년만에 마주 앉았다.
"야, 너 신수가 훤하다"라며 기수는 커피를 홀짝이며 너스레를 떤다.
"영감말투하군..."하며 강희는 살짝 눈을 흘긴다.
"근데 너 그 얘기 들었냐? 영준이 돌아온거?"
영준이란 말에 강희의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한다. 그를 본 지도 20년이 흘렀는데 여태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시리다.
"가족이 전부 다?"
"아니...이혼했대. 혼자 왔나봐"
강희와 영준은 결혼까지 약속했던 캠퍼스 커플이었다. 그런데 영준이 제대를 하고 얼마후 그 집안 전체가 남미로 이민을 떠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때 강희는 대학원 석사과정중이었고 졸업과 동시에 영준과 미국유학을 가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는 이민이라니, 그것도 낯선 남미라니...
"넌 안가도 되지?"라며 강희가 은근 영준을 붙잡았다.
"가서 자리 잡히는대로 나는 돌아올게"라며 영준은 기어코 가족을 따라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떠났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강희의 집안에서는 당연 결혼반대의사를 표명했고 집안에서 정한 남자와 결혼하라는 압력을 넣었다. 하지만 강희는 그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결국 미국 유학에 올랐고 교대로 한번은 자기가 아르헨티나에 그 다음엔 영준이 미국에 오는 식으로 장거리 연애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의류사업을 하던 영준의 집이 결국 파산하면서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 와중에 강희는 영준을 잃고 말았다. 어느때부턴가 그와 연락이 닿지 않더니 어느날은 아예 문자며 메일까지 차단당했다. 박사고 뭐고 다 필요없다는 심정에 그녀는 귀국하였지만 부모의 강권에 굴복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고 거기서 박사과정을 마치고는 눌러앉았다. 그렇게 10년을 현지대학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강의하다 이곳 모교에 자리가 났다는 이야기를 대학원 지도교수로부터 듣고 귀국하였다. 그리고는 알게 되었다. 영준이 귀국해서 결혼해 이곳에서 살고 있다는...당장이라도 강희는 그를 만나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이가 둘이나 된다니 이젠 다 그른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그녀를 머뭇거리게 했고 그러는 동안 영준은 처자식을 데리고 다시 본가가 있는 아르헨티나로 갔다고 한다. 그리고는 그의 소식은 끊어졌는데 그가 혼자몸으로 다시 나와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참만에 기수로부터 영준의 소식을 전해들은 강희는 오후에 이어진 수업시간에 자꾸만 실수를 한다. 그녀의 머릿속엔 '지금이라도'라는 일말의 희망과 가능성, '이젠 글렀어'라는 체념과 포기하고픈 마음, 이 두가지가 불꽃을 튀기며 싸우고 있었다. 그러다 강희는 강의도중 쓰러져 구급차로 대학병원에 실려간다. 눈을 뜨자 학생 두엇이 걱정스레 곁을 지키고 있다. "가봐 그만"하고 강희가 몸을 일으키는데 어지럼증이 그녀를 덮쳐온다. 아직도 영준의 존재가 이렇게도 자기를 지배한다는게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인정할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평생의 남자는 그 하나라는 걸...
"알아볼순 있지..근데 , 왜? 만나보려고?"
업무도중 강희로부터 영준의 연락처를 알아봐줄수 있냐는 전화를 받은 기수는 얼떨떨하다. 둘의 러브스토릴 훤히 꿰고있는터라 지금 다시 만난다 한들 무슨, 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도울수 있다면 돕고싶다. 그렇게 기수는 영준의 연락처를 알아내서 강희에게 문자로 보내준다.
영준의 연락처를 받아든 강희는 이번에 실기하면 두번다시 기회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수업이 없는날 일찍 영준에게 전화를 건다.
"나야 이 강희"
그말에 전화너머 긴 침묵이 흐른다...
"나야. 기억하지?"
그말에 영준은 어렵게 말문을 연다.
"안그래도 궁금했어..볼까 한번?"
그날 마침 강희가 수업이 없다고 하자 영준은 자신이 강희의 오피스텔로 픽업을 오겠다고 한다. 그렇게 오피스텔 앞에서 영준을 기다리는 강희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것만같다. 그래서 그녀는 그 심장이 터져나오지 못하게 왼쪽 가슴을 손으로 꾹 누르고 있다....
저만치 아마도 영준의 차인듯한 아담한 suv가 다가오는게 보인다. 차는 강희 앞에서 멈춘다. 그리고는 거짓말처럼 영준이 차에서 내린다.
20년만의 만남인데 서로가 변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영준은 멋쩍어하며 악수를 청한다. 강희는 애써 웃으며 그 손을 쥔다. 커다란 그의 손안에 자신의 조막만한 손을 넣으니 마치 아기띠로 둘러싸인 아이가 된 기분이다.
"너, 안 변했다 하나도"라며 영준이 씩 웃는다.
"거짓말..."
그렇게 영준은 강희를 옆에 태우고 예전 둘이 자주 가던 강촌으로 차를 몬다.
"아직도 거기 폭포 그대로 있나?"그가 궁금해한다.
안그래도 강희는 영준이 생각나면 강촌을, 그곳 폭포를 찾곤 하였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왠지 할수가 없다. 그가 여태 자신을 사랑하는지 알수 없으므로....
"넌 왜 혼자야 여태? 너 정도면,"
"그냥 뭐...그렇게 됐다. "
"내가..소개시켜줄까?"
그말에 강희는 얼어붙은 겨울 강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런 자신을 영준이 물끄러미 보는게 느껴진다.
"내가 왜 혼자냐면...니가 갔으니까..날 버리고 간 걸 잊을수 없었으니까"라고 강희는 애써 용기를 내서 답을 한다. 20년간 참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주르륵 훌러내린다. 그러자 영준이 팔을 뻗어 강희의 어깨를 안는다. 예전 느낌이 되살아난다. 강희가 쓸쓸해 할때나 아파할때나 공부에 지쳐 힘들어할때면 영준은 이렇게 어깨를 안아주곤 하였다.
"미안 . 그때는 그게 널 위한 거라고 생각했어"라고 영준이 힘겹게 말을 한다.
"..."
"근데 널 잊을수가 없었어. 애를 낳고 살아도 니가 지워지질 않았어"라며 이번엔 영준이 울먹인다. 그러자 강희가 영준의 언손을 감싸쥐고 말한다.
"우리 헤어지지 말자 이제는"이라고.
매서운 강바람이 둘을 강타하고 지나간다. 영준이 자신의 외투를 벗어주려하자
"하지마 그거 신파야"라며 강희가 말린다.
그런 강희를 영준이 살포시 안아준다.
"서울갈때는 내가 운전할게"라고 하자
"아서라"하며 영준이 고개를 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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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가 모는 차가 중앙선을 침범한 세단을 아슬아슬 피할때까지는 좋았다. 그렇게 위기를 모면한 강희가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전에 뒤에서 대형 트럭한대가 자신들의 차를 들이받는다. 그러자 작은 suv는 그대로 튕겨져나고 절벽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두사람 다 즉사로 판명돼 최소한 고통없이 갔을거라고 경찰은 유족에게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