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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영 Oct 04. 2022

소설 <현의 사랑>

이현..이현..그가 누군가..이현..아, 그 남자.

 그 정도는 스스로 챙겼어야 했다.. 학교 개교 기념일 정도는 누가 귀띔해주지 않아도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은가. 그래도, 이미 한 학기나 기제 교사로 근무를 해 온 터에 말이다.

 서무실 여직원의 놀리는 듯한 웃음을 뒤로 하며 현은 본관 문을 나선다. 그녀는 잡무가 남아있어 나왔다고 했다. 운동장은 텅 비어있다..이상하다, 아이들이 없는 학굔 마치 폐가와 같은 섬뜩함을 준다. 힐끗 돌아보니, 그녀는 일 대신, 전화기를 붙들고 바쁘다.

 어디로 가나..피식, 맥없이 웃음이 흘러나온다. 전화를 해봐야, 형기 놈은 분명 되도 않는 핑계를 대며 내뺄 테고 은우, 은우는 어떨까, 지난달 약혼한다는 이메일 카드를 받아놓고 답장도 안했으니, 이럴 때 좀 나오라고 하기도 뭣한 지경이다. 만나면, 또 그 말..     

  선배 바보네...지현 언니 그렇게 보냄 안되는 건데.. 난 그 말 믿어,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말..안 보고 어떻게 사랑을 해, 어떻게 그 사랑을 지키구..     

  지현에게선 벌써 두주일 째 소식이 없다. 뉴욕에 도착해선 하루가 멀다 하고 이메일에 전화에 정신없이 안부를 전해오던 그녀가 벌써 보름째 무소식이다. 바빠서 그러겠지, 처음엔 그렇게 자신을 추스려 봤다. 정인情人을 이역으로 보낸 사람이면 누구나 다 해대는 상상들. 물 설고 말 선 곳에서 적응하느라, 정도로 참아댄 며칠..하지만, 그게 일주일을 넘기고 부턴, 하루하루, 그녀의 부재를 셈하기 시작했다.

  “꼭 가야겠니?” 그날따라 까페 "뮈르"의 불빛이 어두웠다.

지현에게선 답이 없다.

  “꼭 가야겠냐구. 응?”

  “답답하잖아 여기..”

 현은 무언가에 얻어 맞은 기분이 된다. 내가 있는데..10년을 니 남자로 지내온 내가 있는 이곳이 답답하다니..그럼 난, 뭐니..꼭 뉴욕엘 가야 그림이 되니? 화라도 내고 싶었지만,

  결혼할래? 불쑥 튀어나온 이 말. 하지만 당황한 건 현, 혼자였다. 지현은, 말없이 디스 한 개비를 꺼낸다. 현은 습관적으로 테이블 위의 성냥에 손이 간다. 당겨진 불 끝에, 멀리 날아갈 새 한 마리가 앉아있다.     

 학교를 나선 현은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한다. 아침 아홉시..어느모로 보나, 할 일 없는 실업자 꼴이다..실업자로 지내온 지난 몇해..

  “너 도 닦냐” 친구들은 하나같이 비아냥 거렸다. 그러니, 박사과정 졸업하고 처음, 오라던 그 지방 전문대로 가랬지,그거 잘 됐다, 라는 눈치들이었다.

 지방이고 전문대여서가 아니었다. 지현이 그곳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부재한 공간으로 현은 갈수가 없었다.     

  “..저런 거 꼭 '추억'같아..”

 세상에 이렇게 애매한 말도 다 있나. 추억같아..

열려진 까페 문 너머로 시멘트 담이 이어지고 그 모퉁이 폭우 속에 낡은 의자가 하나 비스듬히 기대 서 있다. 저 아이의 이미지 사전엔 저런 풍경이 "추억"인가 보다. 현의 시선이, 맞은편 신입생, 지현에게 가서 머문다.

  “어머, 선배두 나랑 한자漢字가 같네 ,나도 炫 쓰는데”.

  지현은 그렇게 현에게로 찾아 들었다. 삼수 끝에, 허겁지겁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들어온 H 대학에서 현은 그렇게 지현을 만났다. 국립대만 고집하면서 보낸 2년이란 세월에 현은 이력이 나 있었다. 아버지 노릇을 해온 형을 위해서라도, 가고 싶었던 그 대학. 하지만, 자기 키를 넘어서는 수위임을 이미 두 번이나 경험한 뒤가 아닌가.

  후기에서 현은 H 대학의 장학생을 지원해 4년을 장학생으로 다녔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남의 과 신입생 환영회에 불려나갔다 그렇게 현은, 지현을 만났다. 그날 이후로,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쉬우면 불러내는 심심풀이 땅콩 역할을 서로 기꺼이 해주었다. 이따금 현에게도 익숙한, 르느와르니 고호니 , 뭉크니 하는 이들의 그림 전시회가 열리면, 지현은 당연히 현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런 그녀에게서 , 벌써 두주째 아무 소식이 없다. 단 한줄의 이메일도. 언젠가 한번, 뉴욕 시간으로 오전 11시 무렵 국제 전화를 넣어봤지만, 지현이 남겨둔 서툰 영어 메시지만이 들려왔다. Hello, I'll call you back, leave your message please..

  결혼을 생각한 건 아마, 2년쯤 지난 무렵이었던 거 같다. 처음 그녀와 밤을 같이 보낸 그날, 잠결에 돌아눕는 그녀의 숨소릴 들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날 저녁 늦게 화실에 들어서자, 지현은 자기 키를 한참 넘는 캔버스와 씨름하고 있었다.심한 기침으로 어깨가 들썩이는 걸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어 나가서 감기약을 사서 들어와보니, 지현은 보리차 한잔을 반쯤 마시고 잠들어 있었다. 어떡하나, 망설이다, 그녀를 깨워 약을 먹이고 일어나는데, 지현이 현의 손을 잡아왔다. 그녀의 손은 열이 올라 뜨거웠다. 그날, 깊숙이 손을 넣자 그녀의 머리에선 그녀를 닮은 파랑새들이 줄지어 손에 잡혀왔다. 그녀. 지현.     

  현은 다시 한번 시계를 본다. 이제 막 아침 10시를 넘기고 있다. 지금 집에 들어가 봐야 형수의 낭패한 얼굴만 마주하게 된다.

  어머 도련님! 오늘 학교 안해요? 빤한 질문에, 예..그게..개교 기념일이라고..그것도 몰랐어요? 선생님이?..일요일날 아이들이 낮잠자고 일어나 허겁지겁 학교 간다드니, 내가 그꼴이 아니든가...

   “우리 삼촌 있잖아. 시동생말야. 대학 4년 장학생으로 다니구 석박사 나와서 어디 갈데 없어 빈둥거리구 있잖아. 그러다 군대 갔다 오니, 누가 받아주니? 다 늙은일? 그 덕에 나 이렇게 팔자에두 없는 시동생 시집살이 하잖아..시어머니 없는 자리 찾아 왔더니, 시동생이 시어머니 노릇해. 그래서 팔잔 어쩔수 없나 봐”     

  오전 수업만 하고 집에 일찍 들어온 지난봄 어느날, 현은, 형수의 전화하는 소릴 들으며 비어버린 담뱃갑에서 열심히 담배를 찾았다.

 “저게 안 팔려..”

  말년의 아버진 ,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6개월을 살다 그리 갔다.  지어놓은 연립주택이 부동산 파동을 겪으면서 일체 팔리질 않자 아버진 쓰러졌고, 그렇게 아버지가 가고 난 뒤, 어머니마저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따라갔다. 그때부터 형이 가장 노릇을 했다. 나이 터울이 컸던 형은 당시 군에 있었고, 그래서 중학생이던 현은 고모 집에서 형의 제대를 기다리며 눈치밥을 먹었다. 그 후 달라진 거라면, 눈치밥을 이젠 고모 대신 형수가 챙겨준다는 것.

  “뭐하긴.. 무슨 여고 기간젠가 뭐 나가잖아. 뭐라두 붙잡구 있어야 여자두 달라붙는 거지..그러게, 내가 미쳐” 형수의 타박은 늘 같았다.

  지현의 화실로 갈까..그때 지현은 전시회 준비로 한창 바쁠 때였다.     

  서울 야경을 그리겠다고,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진 그 밤, 이젤과 캔버스를 세워놓고 육교 위에서 지현은 밤을 새웠다. 괜찮으니 선밴 들어가, 했지만, 그녀만 남겨두고 들어올 순 없었다. 안 춥니? 지난번 기침이 아직 남아있어 그 작은 어깨는 또다시 들썩거렸다. 형수 모르게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를 한잔씩 나눠 마시며 지현의 캔버스 위에 그려지는 서울을 보았다. 온통 까만 밤, 점점이 찍혀가는 불빛, 서울역사의 돔 지붕이 스케치된다. 팔리면 한 턱 낼께 선배. 그래, 결혼한다면 너랑 하겠어. 그 말을 해야했다 그때.     

  현의 시선이 저만치 사거리 너머 PC방에 가 닿는다.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한다 10시. 이제 겨우 한시간 지났구나. 할 일없는 날의 일분일초가 얼마나 더디 가는지, 현은 익히 알고 있다.

 스르륵 자동으로 열리는 문 너머로, 한산한 아침의 PC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넛쯤 돼보이는 남자들이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다. 컴퓨터 몇 년에 게임 한번 안해 봤다는 생각이 든다.

 한시간에 1500원인데요. 쿠폰을 건네며 대학 아르바이트 생쯤 돼 보이는 20대 초반의 종업원이 말한다. 아무데나 앉으세요.

  현은 구석으로 자릴 정해 앉는다. 자판은 불결하기 짝이 없다. 옆으로 옮겨봐도 마찬가지. 파워power를 누르고, 윈도우가 켜질 때까지 , 이제 자기 안의 기대감을 기다림으로 바꾸는 일만이 남아있다. 오늘 꼭 지현의 이메일이 와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내일, 아니, 며칠 더 걸릴 수도 있다.     

  “이제 왔어요. 이틀 예정이었는데 현지에서 일정이 바뀌는 바람에..음식이 맞지 않아 고생좀 했어요. 잘 지내요?”     

 누군가 깜빡, 로그아웃을 잊은채 메일 박스를 나간게다. 받은 편지함은 비어있고 보낸 편지함만 가득 찼다. 오고가는 마음의 배분이 야릇하다. 답장 없는 편지. 아마도 연서 戀書인 듯 싶다. 그리고 아마도 여자가 남자에게. 한때는 자기의 것이었을 남자에게. isle..왜 하필 섬일까..아이디에서 고독이 묻어난다.     

  지현이 처음 차를 뽑았다며 서툰 운전실력으로 달려간 곳이 바로 그 섬이었다.여기서부터, 하늘새의 땅입니다.  햇살 아래 둥둥 떠있는 부표 (浮漂)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아빠가 한번 만나고 싶으시대”

“얘기했니?”

“응. 아빠, 다음달에 다시 일본 들어가셔. 그 전에 만나서 얘기하고 싶은가봐”

“무슨 얘기...”

   걸어서 대충 섬을 돌아본 다음 둘은 민박집을 찾았고, 방에 들어 짐을 풀며 지현이 이야기했다. 나를 뭐라고 했니, 묻지는 않았다...조금만 더 시간을 두면 안될까? 이렇게..이렇게 실업자로 아버님 뵐 순 없잖아..또 그 소리..지현이 토라진다. 수건을 목에 두르고 방을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안스러웠다. 지현이 나가면서 열어놓은 문 너머로, 달이 올라와 있다. 이 사실감 없는 풍경.     

  그때 , 잘 했더라면 지현은 뉴욕행을 포기했을까. 현의 마음이 어지러워 진다...     

 “신간 코너에 당신이 찾든 그 책이 나와있어 두권 샀어요. 하나는 내가 읽으려고. 생일 축하해요. 내일, 핸드폰 종일 켜놀께요”     

  그 핸드폰은 울리지 않았겠지. isleblue. 왜 하필 "파란섬"이라고 했을까. 그래서 남잔 숨겨논 배를 타고 뭍으로 빠져나갔는가. 이별 노랠 좋아하면 살면서 이별이 많다는데, 이 여자, 그렇게 남자를 잃었구나. 어릴 때 어머닌, 현이 파란색을 좋아하는 걸 걱정했다. 그럼 니가 외로워 진단다.     

  현은 파란색이 고독을 의미한다는걸 뒤늦게 알게 됐다. 바다 하늘 구름 섬, 모두가 파랗게 채색되던 어린 시절. 그 섬에서 이 여잔 지금 살고 있는가.

  현은, 그녀의 파란섬을 나와 이제 자기의 섬으로 옮겨간다. inbox (8), bulk (15). 지현의 메일이 와 있을까. 갑자기 울렁, 속이 메스껍다 . 긴장하면 찾아오는 현상이다. 그곳에 지현은 없다. 하지만 가끔, inbox로 와야 할 메일이 bulk로 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지현은 그곳에도 없다. 온통 광고 메일뿐이다. 현의 밤을 책임져주겠단다, 그의 정력을 두배로 높여주겠단다.     

  섬을 돌고 와서 그날 지현은 먹은 걸 다 토해냈다. 멀미라고. 신경 쓸 거 없다고 . 하긴 그날의 배 타기는 적잖은 고역이긴 했다. 아침까지 멀쩡하고 바람 한점 없던 날씨가, 오후부턴 먹구름과 함께 파도를 일으켰다.

  작은 배는 풍랑을 만나 난파했다. 갑판 위에 올라 망원경으로 바다 구경을 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아래 선실로 내려 왔고 드디어 여기저기서 구역질이 시작됐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하지만 서둘로 돌아가고 있으니 걱정말라는 기사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어느 30대 여잔, 당황해서 오줌을 지리기까지 했다.

 “약 먹어야 되잖아.”

 ”싫어. 괜찮아. 자구 나면 다 나아...“

 ”니가 의사야?“

  현은 지현에게 화를 냈다. 하지만 현의 속도 말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토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해 꾹 참고 견뎌냈지만, 지금이라도 변기로 달려가 입을 벌리면 오장육부가 전부 쏟아져 나올 거 같았다.

 밤이 깊어서야 둘의 신음소린 조금 잦아 들었다. 지현은 등을 보인 채, 벽을 보고 누워있다. 그녀의 작은 어깨가, 새처럼 떨고 있었다. 오한이 났나. 벽장을 열어보니 예상대로, 예비담요가 한 장 들어있다. 그 담요 밑에 작은 새 한 마리가 들어온다. 날개를 파닥이며 작은 새는 울고 있다.

  ”니 전시회 끝나면 아버님 뵙자.“

  지현은 말 없이 고갤 끄덕인다.

  그녀는 작은새다.     


  호텔 커피숍이란 곳이 이런 곳이구나. 현은 마치 TV를 보는 느낌이다. 지현으로부터 ‘백번 다짐받은 대로’ 30분 먼저 약속 장소에 나와있다. 둘러봤지만,아버지와 함께 와있는 지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평일 저녁인데도 빈 테이블이 거의 없을 정도다. 딸랑딸랑..TV 드라마 속의 그 풍경.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종업원이 손님 이름이 쓰인 피켓을 들고 실내를 돈다. 피켓에서 시계로, 현은 눈을 옮긴다. 약속 시간에서 10분이 지나있다. 다시 눈을 들었을 때, 그 피켓의 이름이 눈에 익다. "이현님" 이현..내가 아니든가.. 내가 왜..서둘러 카운터로 가며 자기의 휴대전화가 꺼져있음을 그제야 확인한다.          

  ”실은 논문 통과되고 곧바로 지방에서 자리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지현이와 떨어져있을수 없어 가질 못했다는 말은 차마 나오질 않는다. 

 ”그런데?“

 지현 부친은 마치 취조하듯 물어온다.

 일단 지방에 가서 눌러 앉으면 다신..뻔한 변명. 이미 상대의 입가에 조소의 빛이 흐른다.하두 졸라서 불려나온거다. 너두 알겠지? 상대의 눈이 그렇게 말한다. 니깟놈한테 내 딸을 줄 리 있나. 연애 정도로 끝내라는 말이다.     

  이미 문은 닫혀 있었다. 지현도 알고 있었을까.

그것을 증명하듯, 상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오히려 한결 부드러워진 말투로 돌아가신 부모님과, 4년내내 장학생으로 다닌 학부 얘기, 또, 기회가 되는대로, 학교 연구직이라도 찾아보라는 조언을 남긴다. 어차피 내 것이 아니라면 이리재고 저리 재고 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지현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진다.

  지루하다. 현이 먼저 시계를 본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지현의 아버지가 제안을 한다.

  ”저녁해야지?“

  ”다음에 제가 모시겠습니다.“

  정중히 사양하고 호텔문을 나서는데, 전화할게, 하는 지현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PC 방을 나서는데, 비를 안은 바람이 휙 하고 현에게 달려든다. 개교기념일이라고 , 이놈들 쾌재를 부르고 있겠구나. 문득 아이들 생각이 난다. 선생님, 모드곤이랑 예이츠랑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정작 구문 해석엔 관심이 없는 아이들이다. 멀고 먼, 그것도 아주 오래 전, 이역만리의 러브스토리에 10대들은 온통 정신이 팔린다. 

 그래서 뭐..예이츠는 헛물만 켰지..그럼, 그 여자가 신발 바꿔 신었네? 예이츠가 미국에서 강연을 하고 있는데, 모드곤의 결혼소식이 날아왔대.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던 여자가. 그래서 당신을 받아 들일 수 없노라던 여자가 말야. 그래서 예이츠는 쇼크를 받어서..

 지독히 말주변이 없다던 그가 노벨문학상을 탔다. 그럼, 로렌스는요? 자기 선생님 와이프랑 도망갔다면서요? 어디서, 그런 것들은 다 챙겨 들었는지. 니들, 시험이 내일 모레야! 협박을 해도 소용이 없다. 마저 얘기해달란다. 왜 로렌스가 사랑의 줄행랑을 쳤는지. 녀석들 뭘 하고 있을까... 휴대전화가 울린다. 찍히는 발신번호가 유난히 길다고 느껴진다.     

  ”네“

  ”나야”

 뉴욕에서 걸려온 전화다. 지현이.

 아-

  2주일 넘게 단 한줄의 소식도 전하지 않더니, 이렇게 전화를 하는구나.

  “나라니까”

 “어...”-

  “뭐야 시시하게”

  “아 아냐..거기 몇시니”

  후훗.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생일 축하해”

그랬나? 날짜를 들여다본다. 오늘이 내 생일인가..그랬나..

  “고마워”

  “그래서 전화했어”

  왜 2주일 동안 이메일이 없었냐고 묻고 싶지만 뭔가 가로막는게 있다.

아침에 미역국은 먹었냐는 둥, 애들한테 한턱은 쐈냐는 둥...거기다 대고, 개교기념일인 것도 모르고 학교 왔다가, 바람 맞고 PC 방에서 시간 죽이다 나오는 길이란 얘긴 차마 할수 없다.

  “지금 수업 시간 아니지?”

뒤늦게야 그게 맘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아냐 ,괜찮아”

  “그래서 했어. 해피 버스데이”

 쑥스러운가보다. 그러더니, 딸깍 끊어버린다.

 넌 아직도 나와 이어지고 있는 거니?     

  지현의 친구 미영이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 지하도에서 발을 헛디뎠다고. 응급실에서 나오는 의사의 첫마디가 , 유산입니다. 였다. 왜 말 안했니? 지현은 링거를 꽂은 오른 팔이 저린 듯 이마를 찌푸릴 뿐 대답을 않는다. 왜 저렇게 탱탱 맑은 거야..아마도 바깥 날씨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왜 말 안 했니? 두 번째 물었으나, 지현은 여전히 반응이 없다. 난 진짜 니가 배 멀미 한 줄만 알았어. 진작 알았더라면..

  진작 알았더라면 뭘 어떻게 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에 대해 현이 할 수 있는건, 싫다는 지현을 다독여 역시 산부인과로 데리고 가는 일 뿐이었을 게다. 지현이 표현한 탱탱 맑은 늦가을 속으로 현은 패잔병처럼 걸어나간다.     

  넌 아직도 나와 이어지고 있는 거니..커저는 3,4초 동안 말줄임표 위에 머물러 있다. 나의 아이를 가졌던 여자. 그녀가 2주일씩이나 연락을 끊었다 문득 전화를 했다. 생일 축하한다고. 그리곤 .다른 말없이 전화는 끊겼다. 그렇게 전화가 끊기고 나서, 현은 난생 처음, 자기의 부실한 기억력을 저주했다. 끝자리만 떠올랐다...813..그 앞에 죽 늘어져있던 이역의 전화번호. 그게 뭐였나... 커저는 계속 말 줄임표 위를 맴돈다

  넌 나와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거니. 같은 말의 반복. 블록을 만들어 모두 날린다. 끄자. 파워로 손이 머뭇거린다. 커저는 다시 비행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면, 네게 청혼하고 싶어. 그때 니가 흘려듣는거 같아서. 하지만 진심이었어. 이번엔 진짜 대답해줘. 너랑 결혼하고 싶다. 그렇게 이메일은 현의 손을 떠난다.     

  선배 철우가 적선하듯 던져 준 탐정 소설이 저만치 놓여있다. 20 페이지 정도 번역을 해놨다...욕실은 피로 흥건해진다. 도로시는 그것이 누구의 소행인지 알고 있다. 바로 미셸의 아내, 리즈의 짓이다. 범행에 쓰인 건 칼은 아닌 듯 싶다. 아마도 끝이 날카로운 가위 정도..지긋지긋한 치정.     

  “타세요 얼른”

  전에도 한번 그녀의 차를 얻어 탄 기억이 났다.

  “괜찮아요. 정류장까지 금방인걸요”

  “타세요 얼른...안전벨트 해요”

  그녀는 잡아 끌 듯 현을 자기 차에 태운다. 지난번 개교 기념일에도 잡무 때문에 나왔다더니 일요일인데도 일거리가 밀렸다며, 툴툴댄다. 그러더니, 이 선생님은? 묻는다..예..번역할 게 좀 있는데 집에선 조카들도 있고 영 어수선해서...어머, 번역두 하시는구나. 근사해라. 난 영어 잘 하는 사람 보면 정말 부러워.. 뭐가 신이 나는지 그녀는 가속 페달에 힘을 얹는다.

 “이러다 카메라 찍혀요”

  “한두번인가 뭐..”

  이제 막 서른이 막 넘었을까. 그저, 복사지나 프린터 토너가 떨어지면 찾는 서무실 구석에서 그녀는 늘 집기의 일부처럼 앉아있었다. 신혼인데 남편의 출장이 잦다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아직, 혼자시죠?, 이미 알고 던지는 질문이다..어디 가서 한잔 어떠냐,는 말에 현은, 다음에요, 라고 해보지만, 그녀는 이미 한적한 도로 오른편 2층 "알프스"로 차를 몰아간다.

  “운전하는데 ,그럼 간단히 커피나..제가 사죠”

  운전, 하시죠 ? 하더니 종업원에게 맥주 두병, 원두 한잔을 주문한다.

  연애 오래 해서 그냥 결혼했노라고. 이미 서로 식을대로 식은 상태에서 한 결혼이라 재미 하나도 없다고. 게다가 애도 안 생긴다고..현은 그 자릴 뜨고 싶다고 생각한다.     

  1주일 전 그날 밤, 지현에게 날아갔을 이메일은 여태 답을 듣지 못하고 있다. 그날따라 휴대전화를 집에 놓고 나온 현은 카운터에 놓여있는 컴퓨터에 눈이 간다. 잠깐 이메일만 확인하면 안되냐고 주인에게 묻고 싶어진다.

  기어이, 맥주는 운전자인 그녀의 몫이 된다. 정주란 이라고 한다. 옛날에 문주란이란 가수가 있었다면서요? 문주란이란 꽃도 있다고 들었는데..

  그녀는 빠르게 취해갔다. 나, 운전 잘 못해요. 현은 말려보지만, 맥주 두병은 어느새 네병째가 돼 있다. 현은 포기한다. 바람을 핀다고. 연애 때도 남편은 걸핏하면 바람을 폈다고. 그래서 헤어지길 수없이 했는데, 그런데도 결혼하자 애걸한 건 결국 자기 쪽이었다고. 이번 출장도 분명 여자랑 갔다고. 현은, 자기가 눌러 끈 담배가 한 갑은 족히 되리라 생각한다..

 이미 밖은 어두워졌다. 학교에서 나올 때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그만 일어나시죠.. 안기다시피 주란 그녀는 현의 부축을 받으며 조수석에 오른다 . 이제 어차피 운전은 현의 몫이다. 차 시동을 거는데 다시 이메일 생각이 난다. 잠깐 들어가 이메일만 확인하고 나오면 안될까.

피...운전 잘 하면서..주란이 눈웃음을 치며 은근히 말을 놓는다. 

  손이 떨리는 걸 보니 어지간히 취한 모양이다. ..화났나 봐요..유부녀가 추태를 부렸으니.. 웃어댄다. 그녀에게 , 집이 어디냐고 물었으나 대답은 아무데나, 였다. 내일 둘 다 출근하지 않냐고 설득도 해보지만, 이미 주란의 집은 여전히 아무데나,다. 그래. 아무데나 가자. 현도 귀찮아진다. 차를 몰고 그대로, 바다가 있다면, 그 안으로 뛰어들고 싶다고 현은 생각한다.     


  칠흑같던 밤. 그 육교 위에서 서울 야경을 그리겠다고 이를 부딪쳐 가면서 캔버스에 매달리던 지현이 그립다. 그녀가 곁에 있다면, 이렇게 험하게 차를 몰진 않을 거다. 술을 마신 건 주란인데, 취기는 현에게로 옮겨온다. 주란은 이미 잠 들었다. 이럴 때, 불러내 이 골치 아픈 여잘 떠넘길 동료강사 하나 사귀어놓지 않은게 후회스럽다. 지독한 자신의 폐쇄성. 이 여잘 떠넘기고 싶은데..술이 취했으니 좀 데려가라 하고 싶은데..     

  모텔 주인은 엉터리 숙박계를 슬쩍 내민다. 현은, 듣도 보도 못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프로필을 작성한다. 지현의 화실에서 첫밤을 보낸 뒤, 둘은 자주 여행을 다녔다. 그때마다 숙박계 쓰는게 고역이었던 생각이 난다. 지현은 언제나 멀찌감치 떨어져 딴청을 피우곤 했다. 키를 받아든 현이 지현의 손을 잡아끌면 지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현을 따랐다.

  뉴욕에 도착하고 보내온 첫 이메일에서, 지현은 뉴욕이 "더럽게 "춥다고 했다. 당신이 없어 더 춥노라고.

  그 춥고 먼 곳에서 넌 아직도 나와 이어지고 있는 거니...          

 주란은 옷도 벗지 않은 채 그대로 침대 위로 고꾸라진다. 현은 지금 연극을 하고 있다 생각한다. 저러다 여잔 벌떡 일어나, 집에 가야지, 서두를지 모른다. 남편이 왔을지 모른다고. 그렇게 되면, 여잔, 현은 아랑곳 않고 외투며 가방을 챙겨 황망히 여관방을 나간다. 서둘러 가느라 하이힐이 잠깐 균형을 잃는다. 제발 그리 되라..하지만, 애초부터 시나리오는 달리 쓰여진 듯 하다 . 여자는 엎드린 자세에서 한 손을 들어올린다. 자기 손을 잡으란다.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결혼반지가 끼어진 여자의 손. 이럴 때, 이 여잘 떠넘길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여자가 고갤 돌려 현을 올려다본다. 그 눈이 말한다. 이건 흔한 일이라고. 오늘 당신이 학교에 나올 거 같아 자기도 나왔노라 말한다.. 어지간히 술이 깬 모양이다. 애인 있나보다..그녀가 웃는다..현은 고갤 끄덕인다. 애인 있음 뭐 안되나..그런가 보네..주란이 비웃는다.     

  그 추운 뉴욕에서 그럼 누군갈 만났다는 얘기니? 현은 모텔 유리문을 박차고 뛰어 나온다. 모텔주인은, 그것도 흔한 일이라는 듯,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다. 아무도 따라 오지 않는다..그녀로부터 탈출했다. PC 방 PC 방...어둠 속에서 저만치 영업중인 PC 방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내일은 비가 오려나..바람을 가르며 현은 달린다.     

 “메일이 잘못 온거 같네요. 죄송하지만..읽었어요. 중요한 메일이면 돌려드려야 할거 같아서..”     

  파란섬에게서 메일이 와 있다. 무심코 쳤던 아이디가 지현의 것이 아니었구나. 파란섬...현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래서 지현에게선 답이 없는가. 그래서? 사랑을 잃은 여자가 사랑을 잃은 남자에게 답장을 해왔다. 메일이 잘 못 왔다고.          

  아마도 이 남자, 여자한테 채인거 같다. 한 3년쯤? 5년쯤? 둘은 연애라는 걸 했겠지. 그러다 결혼 얘기가 나왔을테고, 둘 중 하나가 기우는 집안이거나 돈벌이가 안 좋든가. 그랬겠지한번쯤 두 번쯤, 여잔 남자의 아일 지웠을지도 모른다.


   윤서는 셔츠를 걷어 올려 배꼽밑으로 나 있는 임신선을 확인한다. 첫 아일 가졌을 때 생겨났다. 그 아일 지웠을 때 남잔 함께 울었다. 둘째 아일 지웠을 때 남잔, 이별을 고했다. 내 달에 결혼한다면서. 세상은 온통 버려진 사랑으로 가득한가.

  남자의 회사 앞에서 그를 기다린 적도 있다. 퇴근하는 남자 앞으로 흰색 중형차 한 대가 와서 멎는다. 그의 아내..내 자리의 그 여자. 그 남자의 아내.

  방이 좁다고 불평 할 때부터 남자는 이미 멀어지기 시작했던 거다. 다락방은 난생 처음이라며 신기해하면서 들어서던 그였다. . 뾰족 지붕의 다락방..너 어릴 때 동화책 많이 봤구나, 그렇게 윤서를 놀리던 남자였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부턴가 방이 좁다고 투덜댔다. 감기 때문에 결근한 날, 마지못해 약을 지어 찾아온 그는 30분도 되지 않아 일어섰다. 왜, 가려구? 너 이사줌 해라. 공기가 나빠서 그런거야..갑갑한 듯 넥타이를 느슨히 하면서 남자는 윤서의 방을 나갔다.

  신경질 적으로 닫히는 차의 문소릴 들으며 윤서는 그가 떠나고 있다고 느낀다. 그의 모든 것이 하나 하나 그녀로부터 거두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에게로 가는 모든 길이 이제 막혔음을 안다. 전화도 문자도 이메일도, 그의 회사 앞에서 기다리는 그 일도, 어느 것 하나 윤서에게 허락된 건 없었다. 24시 편의점에서 사다 놓은 맥주와 샌드위치가 냉장고 안에 남아있을까..그리고 한알, 그거면 된다. 간단한 일이다.     

  윤서는 천천히 자기의 좁아터진 옥탑방을 둘러본다. 남자가 쳐준 못들이 여기저기 옷을 걸리고 백을 걸리고 그밖의 너절한 잡동사닐 얹고 있다. 고마웠던 남자. 그에게 감사한다. 어느 전시회에서 "니가 좋아할거 같아서" 사왔노라며 내밀던 그림 하나가 잊혀진 채 오랫동안 겨울 외투 뒤에 숨어있다. 외투를 걷어본다. "서울야경"이라 제목이 붙어있다. 아마, 아마츄어 화가의 전시회에서 사온 모양이다.

  저걸 그린 사람도 사랑을 잃었을까. 그림 오른쪽 하단의 조그만 빨간 직인이 눈에 들어온다. 炫. 화가의 이름. 아마도 추운 밤, 건물 옥상이나 육교 위쯤에서 이 그림을 그렸으리라..사랑을 잃은 이의 그림은 아니었다. 야경인데도, 환하지 않은가. 그리 많지 않은 불빛들이 몇 만배의 어둠을 몰아내고 있다. 빛나는 밤. 사랑이 있을 때 그려진 그림이다. 그때 화가 옆엔, 그의, 혹은, 그녀의, 애인이 함께 있었겠지. 사랑하는 이를 혼자 그 추운 밤 세워뒀을 리 없다. 아마도 집에서 커피를 담아와 그걸 나눠 마셨겠지. 

  이 그림을 사다준 그 남자 역시 그땐 날 사랑하고 있었다. 아마 그랬겠지. 그런데 왜 여태 저 그림을 간직하고 있는 걸까? 헤어지고 난 뒤 그에게 주려고 샀던 책 마저 지난주에 버리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저 그림만은 간직하고 있다. 추운 밤, 따스한 불빛...그런 시간이 내게도 찾아오리라     

 그가 나를 구할수 있을까. 윤서의 기억대로 24시 편의점에서 사다 놓은 맥주와 샌드위치는 냉장고 안에 있다.

  창을 연다. 비를 몰고 올 텁텁한 공기가 방 안 가득 밀려든다. 사흘동안 꺼뒀던 핸드폰을 켠다. 무단 결근 사흘에, 메시지는 하나도 없다. 회사에서도, 그에게서도.

손을 뻗어 샌드위치를 집어든다. 그 순간 , 새메일 알람이 울린다.

  거짓말같은 이 소리에 윤서의 뒷목이 뻣뻣해온다.. 난파하는 작은 배처럼. 그인가... 시력을 잃어가는 노인처럼 화면 앞으로 바짝 다가 앉는다. "이현님이 보낸 편지가 왔습니다" 이현..이현..그가 누군가..이현..아, 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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