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는 메일을 다 써놓고도 보내기를 망설인다. 괜한 오지랖이 아닌가, 하다가 그는 결심한듯 보내기버튼을 누른다. 그렇게 민수의 메일은 현수에게로 날아간다.
그리고는 바로 그날밤 예상했던 해진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왜 그랬어....
해진은 현수와 되지도 않는 연애를 2년 넘게 끌어오고 있다. 해진의 오랜 친구인 민수가 보기에 현수는 결단코 해진을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는 남자가 어떻게 2년이 넘도록 여자를 한번도 안지를 않는다는 말인가. 말로는 '지켜주고 싶어서'라고 하지만 같은 남자 입장에서 보면 죄다 헛소리다. 좋으면 만지고 싶고 안고싶고 섹스하고야 마는게 남자가 아니던가.
해서 민수는 여러번 해진에게 현수와의 관계를 정리하라고 충고했다. 그러면 해진도 ,자기도 석연치가 않다며 그와의 관계를 곧 끝낼것처럼 하다가 1,2주후면 둘은 다시 붙어다녔고 여전히 돈드는 건 해진이 도맡았다. 현수의 월세, 차유지비, 여행비..
현수는 한때 잘 나가던 소설가였다. 그러나 세상이 변해가는 속도에 맞추지 못해 낙오된 그런 케이스다. 해서 그후로는 칼럼, 리뷰, 심리상담등 잡문을 이곳저곳에 기고하면서 간신히 생계를 이어나가다 영화리뷰를 실었던 영화잡지 기자인 해진을 만나게 되었다. 현수는 특유의 '마초이즘'으로 , 무뚝뚝함으로 해진을 끌어당겼고 해진은 늘 사분사분한 도시남자들만 만나다 신세계를 만난듯 빠르게 그에게 빨려들어갔다.
"너 그러다 시집가겠다"
민수가 해진으로부터 현수의 이야기를 처음 전해듣고 그렇게 말했을때 해진은 빙긋이 웃으며 동의하는 눈치였다. 축의금은 한 30이면 될까, 민수는 미리 셈을 해두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둘의 연애는 진척이 없어보였고 해서 혹시 헤어졌나 하면 또 그런것도 아니었다. 그러다 어느날 해진은 자는 민수에게 전화를 걸어와 급히 돈 100만원을 빌려달라고 하였다. 직감적으로 그돈이 해진이 아닌 그, 그러니까 현수에게 갈거라는 생각에 민수는 화가 치밀었다. 뭐야 그자식! 하고 내뱉으려다 꾹 참고 민수는 더묻지 않고 그자리에서 돈을 해진에게 이체해주었다. 사흘후 해진이 월급을 타고 곧바로 입금해주면서 "다음에 너 급할땐 나한테 콜해"라며 5만원 이자를 얹어주었다.
해진에게 전혀 마음이 없었던건 아니지만 대학신입생때 알게 된 터라 알아온 세월만 15년이 다 돼 간다. 그동안 각자의 연애 스토리를 훤히 알고 있는터에 새삼 '연애하자'들이대기도 뭐하고 해서 민수는 애써 해진을 이성으로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이성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오히려 동성끼리는 털어놓지 못하는 이야기까지 시시콜콜 나누게 되었다.
그런 해진이 현수를 만나면서부터 전에 없이 얼굴에 그늘이 드리우는걸 민수는 확연히 느꼈고 시간이 한참 흘렀음에도 손 한 두번 잡은게 다라는 해진의 말에 화가 치밀기도 했다. 현수가 원하는건 해진이 아니고 그녀의 물질이며 돈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어느날 해진은 민수에게 이메일이 복사된 문자를 보내왔다. 보아하니 현수와 싸울때 오고간 메일 같았다. 현수는 해진을 '망상장애와 의심으로 뭉쳐진 여자'라고 비난하였다. 그 메일을 받고나서 민수는 고심끝에 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이 연애 꼭 해야 돼? 아니, 이거 연애 맞긴 해?"라고 하자 해진은 전화너머로 울먹거렸다. 그리고는 "아무래도 헤어져야 할거 같아"라고 하였다.
하지만 해진은 그러고도 다시 현수에게 돌아갔고 뒤늦게 현수가 한번 결혼했던, 아이까지 있었던 남자라는 걸 알고는 기함을 하였지만 그것도 묻고 가려 하였다.
"돌싱이 문제가 아니라 처음부터 털어놨어야지 그런 건"하고 민수가 현수를 비난하자 "다 이유가 있었겠지"라며 그녀는 오히려 현수를 두둔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해진이 깊은 잠에 빠질 즈음 현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급한 일이라고 빨리 메시지를 보라고. 해서 해진이 졸린눈을 비벼가며 열어본 폰에는 현수가 보내온 여러개의 메시지가 떠있다. 현수의 은행계좌들에 압류가 걸려있다 해진은 어리둥절해서 다시 현수에게 전화를 하자 "너한테 풀어달라는거 아니고, 그냥 어이가 없어서....자동차 과태료좀 밀렸다고 이럴수 있냐? 이게 복지국가야?"라며 씩씩댔다. 결국, 그 문제는 다음날 해진이 78만원을 교퇑과에 입금하면서 해결이 되었다.
그 이야기를 해진으로부터 전해들은 민수는 현수가 '고단수'라고 여겨져 당장 끊으라고 하였다. 해진은 '불쌍하잖아 고작 78만원이 없어서..'라고 또 싸고 돌았다.
"야. 그 돈이 있었는데 너보고 쓰라고 한건지 어떻게 알아?"라고 민수가 화를 내자 해진은 설마,하는 표정이 되었다.
"남자는 남자가 알아"라며 해진을 아무리 설득하려해도 그녀나름으로 이미 현수와 결혼까지 결심을 굳힌 모양새다.
안되겠다 싶어 민수는 지난번 해진이 보내온 복사된 현수의 메일주소로 메일을 보냈다. 한번 보자고. 해진이 친구라고.
마주앉은 민수와 현수 사이에는 강대강이 만난듯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이제 그만 해진이 놔주시죠" 민수가 먼저 운을 뗀다. 단단히 화가 난 어투로.
그러자 현수가 두 주먹을 불끈 쥔다.
"너였구나. 누가 있다 싶었어 뒤에"라며 비열한 웃음을 짓는다.
"무슨, 말씀이죠? "
"아니, 멍청하고 순해빠진 걔가 가끔 나한테 이것저것 지적질하며 대들드라구 요즘 와서. 해서, 누가 있구나 싶었어"
"지금 그런 말 하는게 아니잖아!"라며 민수가 현수의 멱살을 쥔다.
"이러다 치겠다?"
둘이 옥신각신하는데 까페 사장이 와서 둘다 나가라고 엄포를 놓는다.
그렇게 밖으로 쫓겨난 둘은 대로에서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않고 치고박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입가에서 피가 흐르고 코피가 터져나오고 두 다리가 후들거린다. 주위로 구경꾼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할때쯤, 민수가 먼저 싸움을 멈춘다. 그러자 현수도 씩씩대며 한참을 노려보더니 휑하니 돌아서서 인파를 헤치고 가버린다.
"니가 뭔데. 뭐길래 남의 연애사에 참견이야!"라고 전화너머에서 해진이 소리를 질러댄다.
"난 너 위해서...미안. 오지랖인건 아는데 너 계속 당하는거 볼수 없어서"민수가 조근조근 이야기를 하지만 해진은 도중에 전화를 끊어버린다.
민수는 그날밤을 하얗게 새우고 다음날 일찍 해진에게 사과전화를 걸기로 한다. 그리고는 익숙한 그녀의 번호를 누른 순간, 자신이 차단되었음을 알게 된다. 난 자기 위해서 한 일인데...라며 민수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그날은 출근을 해서도 계속 실수만 해대서 부장에게 혼쭐이 나고 외근나가서는 접촉사고까지 냈다. 한마디로 '운수 더러운 날'이 되었다.
밤늦게 퇴근한 민수가 오피스텔 현관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려는데 저만치 어둠속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림자가 있다. 누구지? 하고 민수가 돌아보는데 날쌘 주먹이 날아온다. 안그래도 하루종일 안풀리는 일과에 파김치가 다된 민수는 그자리에 퍽,하고 쓰러져버린다. 그리고는 정신을 잃는다...
어둠속 그림자는 쓰러진 민수의 얼굴을 한번더 가격한뒤 그 자리를 뜬다.
차디찬 밤바람이 민수의 피범벅된 얼굴을 할퀴고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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