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민의 꿈을 꾸었다. 현실에서는 서로 안보고 지낸지 한참 된 그가 꿈에서는 활짝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그리고는 그녀의 언손을 꼭 쥐고 호호 녹여주었다.
잠에서 깬 보경은 이게 무슨 꿈일까, 혹시 그에게 안좋은 일이라도 생긴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차라리 무표정했더라면 덜할텐데 왜 그렇게 마지막 만남처럼, 마지작 인사처럼 웃고 있었을까,하면서 그녀는 전화에 아직도 저장돼있는 그의 연락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때 마침 전화벨이 울린다. 동민이었다. 세상에...하면서 그녀는 하마터면 폰을 떨어뜨릴뻔 한다.
"어...웬일이야" 그녀가 더듬거리자 상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네 꿈을 꿨어..너, 혹시 시집가니? 하얀 드레스를 입고 활짝 웃고 있더라"면서 동민은 자못 불안해하는 눈치다.
둘이 동시에 서로의 꿈을 꾸었다는게 신기하면서도 무슨 징조나 조짐처럼 느껴졌지만 보경은 자신도 동민을 꿈에서 보았다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지금 동민의 처지나 상황, 그 옆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말을 할수도 없지 않은가.
"아무일도, 없지? 건강하지?"라며 그녀는 에둘러 물어본다.
"그렇지 뭐...시집, 안 가는 거니?"그가 그렇게까지 그녀의 결혼여부에 관심을 갖는다는건 그도 아직 싱글임을 말해준다고 그녀는 뒤늦게 간파한다.
"우리, 좀 볼까?"
동민이 잔뜩 용기를 내서 물어본다
그말에 잠시 뜸을 들이던 보경이
"오늘 저녁 , 퇴근하고 돼?"라며 물어본다.
따져보니 근 2년만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오해'였던 일로 당시엔 크게 싸우고 누가 먼저랄것없이 돌아섰다.그리고는 마음속에서 서로를 버리고 그렇게 살아온 시간이 2년이었다. 둘다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니 이따금 생각하면, 결혼했겠지,하는 생각이 드는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둘다 아직 싱글이라는게, 어쩌면 서로 돌아서기만 했을뿐 실은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보경이 회사 근처 까페로 들어서자 저만치, 늘 먼저와서 앉아있던 그 자리에 동민이 앉아있다. 동민은 그새 조금은 여위었지만 혈색은 좋다고 생각하면서 보경은 그에게로 간다. 그러자 동민은 예전에도 가끔 하던 '의자빼주기'를 한다.
"왜 이래 쑥스럽게"하면서 보경이 그 의자에 앉는다.
"너 이뻐졌다"라며 동민이 짓궂게 웃는다.
"아무일...없는거지?"
아무래도 꿈속에서 서로를 보았다는게 길몽일수도 흉몽일수도 있다는 생각에 보경은 재차 물어본다.
"나...형하고 사업 합쳤어 얼마전에. 아니, 형 밑으로 들어간거지"
"그럼, 꽤 크게 하겠네"라며 보경은 메뉴판을 들여다보는 척 한다.
동민의 집안은 대대로 사업가 집안이었다. 해서 동민은 대학 졸업 무렵 친구들이 앞다투어 취업전선에 뛰어들었을때 친구 몇과 자그맣게 it관련 벤처회사를 차렸다. 그때 보경을 만났고 보경은 그의 사무실에도 여러번 갔었다.그런데 가구수입을 하는 형과 사업을 같이 한다고 한것이다. 그 벤쳐는 잘 안됐구나 싶지만 더는 묻지 않기로 한다. 세상사가 어디 뜻대로만 되랴, 싶다. 비록 회사는 잘 안됐어도 여전히 건강하니 그것만도 고맙고 다행스런 일이었다. 게다가 아직 싱글....
혹시, 둘이 결혼이 성사된다는 꿈인가,보경은 은근 설레인다.
"왜 여태 혼자야?" 동민이 또한번 그녀가 아직 혼자인지, 왜 그런지를 물어온다.
지난 2년간 보경은 남자와는 일정 거리를 둔 생활을 했다. 동민에 대한 미련과 실연의 아픔이 깊어 금방 다시 연애라는 걸 하기가 두려웠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가능하면 그런 자리에 나가지도 만들지도 않고 지냈다.
"어디 가서 밥 먹을까?"
동민이 저녁식사를 제안한다.
"내가 살게 파스타"라며 보경이 환하게 웃자 동민도 건치를 드러내며 해맑게 웃는다.
동민을 만나고 온 날, 보경은 대학친구 희선에게 전화로 그 사실을 알리며 꿈 이야기까지 털어놓는다.
'어머, 니들 결혼하는구나'라며 희선이 반색을 하며 성급히 축하의 말을 전한다. '아직 몰라'하면서도 보경은 계속 심장이 벌렁거리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샤워를 하는 순서마저 까먹을 정도다...그러다 문득 얼마전에 읽은 '샤워시 제일 먼저 씻는 부위에 따른 성격유형'이란 기사가 떠올랐다. 보경은 당연하다는듯이 얼굴부터 씻는데 그것은 '남의 시선을 많이 의식한다'는 성격이라고 써있어서 '말도 안돼'라며 웃어넘긴 적이 있다. 아무른, 그렇게 샤워를 하면서 언젠가 동민과 함께 욕조에서 사랑을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는 서로 장난치며 샤워를 했던 기억까지...
샤워를 마친 보경은 침대에 걸터 앉아 물끄러미 전화기를 바라본다.
그러다 용기를 내서 동민에게 전화를 거는데 '통화중'이라는 자동안내가 나온다.
이 밤중에 누구와 왜 통화를 하는걸까, 궁금해하다 그녀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잠을 청한다. 그러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야, 넌 한밤중에 어디다 전화질이냐?"라며 동민이 짐짓 나무라는 , 하지만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톤으로 말을 한다 . 동시에 서로에게 전화를 했다는 것 또한 분명한 '조짐'으로 여겨져 보경은 마치 '결혼'이 임박한 느낌을 받는다.
"이번 주말에 뭐하니?"
주말이라고 해봐야 내일 모레다. "왜?"하고 보경이 묻자 "어디좀 가자"라며 동민이 제안한다. 아마도 동민의 본가가 되지 싶다.
그렇게 그 주말, 보경은 동민이 모는 지프형 suv에 올라 강원도로 향한다. 보경의 기억에 동민의 본가는 부산이었다.. 그런데 왜? 하는 순간 동민이 말한다.
"애가 어려 아직..."
그말에 보경은 흡, 하고 숨이 멎는다. 그러다 휴, 하고 다시 숨을 내쉰다. 애라니...하는데
"너랑 헤어지고 견딜수가 있어야지. 해서 곧바로 선봐서 결혼했어. 그리고 애를 낳았는데 와이프가 암으로 갔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럼 그 꿈은 뭐야'라며 보경이 투덜거리자 '너 뭐하냐'라며 동민이 유심히 쳐다본다.
'처가가 강릉이야. 남자 혼자 어린 애 못키운다고 장모님이 키우고 계셔'라고 말한다.
그 이후 보경은 어떻게 강릉까지 갔는지, 어떻게 동민의 처가 어른들과 인사를 나눴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룻밤 강릉에서 묵고 올 예정이었던 동민은 보경이 내켜 하지 않는걸 알고는 그날밤 차를 몰아 서울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보경의 오피스텔 앞에 차를 세우며 내내 궁금했던 질문을 한다. "싫지? 이런 상황?"이라고.
그말에 보경은 "가서 자 얼른. 늦었다"라며 서둘러 그를 떠나 건물 안으로 들어선다. 현관 유리문을 열자 센서등이 파리하게 점멸하는게 동민의 눈에 들어온다. 고장났구나, 하다가 그는 다시 차에 시동을 건다.
'다 헛꿈이었어'라며 보경은 투덜대며 샤워를 하기 시작한다. 개꿈, 똥꿈...하며 툴툴대는데 챠임벨이 울리는거 같다. 설마...하고는 젖은 몸을 대형 타월로 감싸고 현관문을 열자 간줄 알았던 동민이 멋쩍어하며 서 있는게 보인다.
"너무 늦었나?"
그말에 보경은 잠시 생각한다. 헤어진 후의 결혼한거니 양다리나 외도도 아니고 결혼했으니 아이를 낳은것도 당연하고 젊은 나이에 것도 신혼때 와이프가 갔으니 한편 동민이 안됐다는 생각도 든다...
"들어올래? 나, 라면 먹을건데"라며 보경이 길을 내준다.
그러자 동민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익숙한 그방에 들어선다.
"다 늦게 무슨 라면. 그러니까 아까 휴게소에서 우동먹자고 했잖아. 너 좋아하는 유부우동"이라며 이번엔 동민이 툴툴댄다.
"나 우동도 있어. 해줄까?"라며 그녀가 주방으로 가는데 뒤에서 동민이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는다. 그리고는 '보고싶었다'라고 말을 한다. 그런 그의 행동과 말에 보경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해서 한동안 우두커니 있다가 보경이 결론을 내린듯 그의 두팔을 허리에서 거두며 돌아서서 마주본다. 동민은 자못 불안한 얼굴이다. 거절이라도 당하면 어쩌나 하는..
"아들 이름이 빈이라고 했나? 이쁘드라...우리 둘 사이에 애를 낳았어도 그렇게 생겼을거 같아"라고 하자 동민의 얼굴이 다시 빛을 발한다. 그순간 보경은 '꿈의 계시'를 따르기로 한다. 둘이 같은 꿈을 꾼것도 , 동시에 서로에게 전화를 건것도 , 다 맺어지라는 , 그리 된다는 계시였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그리고는 동민의 목을 두팔로 감싸 안는다.
"우동 끓여준다며"라고 말하는 동민의 입에 그녀는 너무도 여러번 상상하고 바랐던 재회의 입맞춤을 한다. 그 순간 짜릿한 통증같은 것이 그녀의 가슴을 찌르고 간다. 차라리 전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