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여기서 그를 마주칠줄은 꿈에도 몰랐다. 헤어진지 거의 5년이 다 돼가는 그를. 그동안 결혼도 하고 애도 낳았겠지,하는 생각이 그녀를 스치고 그도 역시 비슷한, 어쩌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것이다.
그날따라 선주는 일찍 뒷산을 가고 싶었다. 오전에 원고를 좀 일찍 보내고 나니 갑자기 무료해져서 읽다만 책을 조금 읽었지만 몸이 근질거렸다. 나가서 해를 받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래서 근처 할인마트에서 만원에 산 허리밴딩 바지를 입고 위에 하프패딩을 걸치고 나가니 마치 봄날같다. 겨울이 이렇게 더워서야...
야구캡을 눌러쓰고 오르는 뒷산오르막은 제법 가파르다. 그녀가 헉헉 숨소리를 내가 어디선가 그소릴 들었는지 개가 컹컹 짖어온다. 움찔한 선주는 걸음을 빨리하고 그렇게 야산 정상까지 오른다. 왼쪽은 험하기로 유명한 지형이어서 그녀가 선택하는 길은 늘 오른쪽이다. 그곳으로 계속 가다보면 겨울에 특히 장관을 이루는 솔숲이 나오고 쉼터도 나온다. 그녀는 쉼터에서 혼자 바람에 흔들거리는 그네를 잠시 탄다. 약하게 멀미가 일어 그네에서 벗어난 그녀가 터덜터덜 하산하기 시작하는데 앞에서 웬 남자의 운동화가 멈추는게 모자챙 밑으로 보인다. 해서 그녀는 옆으로 길을 내주자 그 운동화도 그녀를 따라서 옆으로 움직인다. 뭐지? 하고 그녀가 모자를 뒤로 젖히자 그가 서있었다.
그리도 모질게 그녀 가슴에 대못을 박고 갔던 그가 . 기웅이었다.
그때 선주는 그와 결혼하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그래서 그가 요구하는 돈을 어떻게든 구해서 주었다. 자기집을 담보로까지 잡히고. 그러나 기웅의 사업은 기울기 시작했고 그러자 애먼 선주에게 그 화풀이를 했고 둘은 자주 다투다 급기야는 헤어졌다.
"우리 결혼하는거 아니었어?"라고 하자 그는 "서로 알아가는 단계였지 결혼은 무슨"하며 발뺌을 하였다.그순간 선주는 자신이 그에게 준돈을 영영 돌려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도 한번은 물어보자 하고는 돈 이야기를 하자 그는 "니가 자청해서 준거 아니었어?"라며 비열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도 둘은 몇번의 설전을 벌인뒤 헤어졌고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다.
지난 5년은 기웅으로 인해 진 빚을 갚는데 할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 부동산중개업소 보조, 심지어는 식당 서빙까지 해야 했던 그녀에게 한줄기 빛이 비추기 시작한건 소설 공모였다. 대학때 교내 문학상에 소설로 가작입선한 것이 떠올랐다. 그녀는 3000만원이 시상금이 주어지는 대상은 바라지도 않았고 2등찌리 500이라도 돼라 ,하는 심정으로 단편소설을 보냈고 그것이 덜컥 대상에 당선된것이다. 처음 주최측에서 전화로 그 소식을 전해들은 그녀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전화에 이은 확인 문자를 받고 그제야 실감이 났다. 그래서 세금 뗀 3000이 조금 안되는 돈을 받아서는 은행빛부터 일부 갚았다. 하지만 아직도 빚은 넘치도록 남아있어 그녀는 알음알음 드라마 pd에게 데모 원고를 보냈고 한번 보자는 연락을 받고는 pd가 써보라는 내용으로 다시 써서 얼결에 '방송작가'로 등단을 하였다. 그렇게 단막극 몇개를 한 뒤 특집극을 짬짬이 하다 미니시리즈를 하게 되었는데 사람일이 마냥 좋게만 풀리는것이 아니어서 그녀는 도중에 pd와 마찰을 빚고 작가교체라는 뼈저린 경험을 해야했다. 그래도 짧은 시간이나마 드라마 극본료를 받아 그만큼의 돈을 또다시 상환할수 있었다.
빚이 줄고 있다는건 안도감과 함께 기웅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둘의 사정을 아는 친구 미영이 곧잘 하는 말이 틀린 데가 없다. "지가 양심머리가 있으면 돈 1000이라도 돌려줘야지"라며 미영은 마치 자신이 당한것처럼 분해했다. 시상금과 고료로 빚은 많이 줄었지만 그보다 더 많은 빚이 남아있어 집을 줄여 이곳으로 이사하고 일부를 상환했지만 빚은 징글징글하게도 여전히 남아있어 이번집도 또 내놓은 상태였다. 지금 그녀를 지탱시켜주는건 몇푼 안되는 인세와 잡문으로 버는 푼돈이 다였다. 이러다 연체라도 되는 날에는 신용불량이 될 판이다.
"이렇게..보는구나 너를.산에서"라며 기웅이 멋쩍은듯 살짝 웃어보인다.
그도 야구 모자를 쓰고 있지만 그 밑으로 드러난 머리가 하얗게 변해 있다. 아직 40도 안됐는데 머리가 샜네,라고 생각하니 선주는 그가 안쓰럽기도 하지만 천하의 '원수'와 재회했다치면 일말의 연민도 다 사치였다.
순간 선주는 돈 이야기를 꺼낼까 하다 포기하고 그를 무시한채 가던 길을 계속 간다. 그러자 잠시후 그가 뒤따라 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화가난 그녀가 횃 몸을 돌리며 "오지 마!"라고 소리치자 그가 움찔한다.
그의 그런 모습에 선주는 미안해지지만 기웅이 자신에게 덧씌운 그 빛이 얼마며 상처가 얼만가를 되짚어보면 어서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해서 그녀는 내리막을 빠른 걸음으로 뛰다시피 내려온다. 그렇게 단지 입구에 들어서는 찰나 뒤에서 헉헉 숨가쁜 소리가 들린다. 설마, 하고 돌아보자 얼굴이 벌게진 기웅이 그녀의 바로 뒤에서 숨을 고르고 있다.
"어쩌라구!"라며 그녀는 뺨이라고 한대 갈기고 싶지만 애써 참는다. 그러는데 하필 그 순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미안해....갚으려고 했는데.."라며 기웅이 한걸음 다가선다. 그러자 선주는 그만큼을 뒷걸음친다.
"여기 사니?"하고 그가 네동짜리 그녀의 소규모단지를 눈으로 둘러보는 시늉을 한다.
"난 저기 위..."
윗단지라면 2000세대의 대단지였고 그나름의 인프라도 제법 갖춰져있었다. 선주가 자기 집을 내놓은게 1년이 다 돼가고 값도 있는대로 다운시키고 있지만 사람들은 역시 대단지를 선호해서 윗단지만 줄창 나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해서 산에서 내려오는 길목에 있는 그 단지를 지나칠때는 슬쩍 흥, 소리를 내거나 눈을 흘기거나 하면서 시샘을 하곤 하였다. 그곳에 기웅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정도 단지에 살정도면 자기돈도 줄수 있었을텐데,라는 생각이 들자 선주의 흐르던 눈물이 한순에 멈춰버린다.
"우리 이웃 사촌이네"라며 그가 다시 다가서는데 "오지마!"라고 그녀가 소리치고 재빠르게 자신의 집으로 뛰어간다.
그리고는 한동안 산에 가지 않던 그녀가 어느날엔가 눈이 밤새 내린날아침, 눈지붕을 이루는 솔숲이 궁금해 다시 산에 올랐다. 한동안 오지 않았지만 겨울이 깊어져 나무들이 더욱 앙상해진 거 외에 큰 변화는 없었고 솔숲은 그녀의 예상대로 흰눈으로 지붕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저 아래, 지난번 자신이 탔던 흔들그네가 보인다. 남자 하나가 등을 보인채 흔들거리고 있다...그녀가 물끄러미 그를 보다 방향을 트는 순간,"선주야!"라고 부르는 기웅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둘은 또다시 만났다. 기웅은 그네에서 내려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온다. 이번에도 그녀가 도망치려 하자 그가 그녀의 팔을 힘주어 잡는다.
"아파"라며 그녀가 그의 팔을 뿌리치자
"어디 가서 커피라도 하자"라며 그가 앞장선다. 어디를 간단 말인가 이 상황에서...
"괜찮으면 내집에 갈래?"
그말에 선주는 헉, 하고 숨이 멎는것만 같다. 외로움이 느껴진다. 혼자구나 이사람도...
둘은 어느새 기웅의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다.
그의 집은 단지 한가운데, 마천루를 연상시키는 30층짜리건물 25층이었다. 로얄이다..이러면서 내 돈은 안줬다구? 하자 그녀는 환하게 쏟아져들어오는 거실 햇살부터 마음에 안든다. 자신의 집은 서향이어서 종일 어둡고 음울한데 기웅은 눈이 부신 집에 살고 있는것이다.
"앉아있어"라고 말한 기웅이 커피 머신에서 커피를 내린다.
우린 지금 뭘하는 걸까,하는 생각이 선주를 앉지 못하고 계속 서있게 만든다.
"앉으라니까"하고는 커피를 한잔만 뽑아온 기웅이 소파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그렇게 나란히 소파에 앉자 더더욱 어색해진 선주가 "나 갈래"라며 일어서자 그가 말한다.
"너한테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 빈몸으로라도 가야 한다고 ..니가 받고 있을 여러가지 압박과 상처를 생각하면 내가 다 잠이 안왔다."
"거짓말" 다시 털퍼덕 소파에 주저앉은 선주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나, 이 집 내놨거든..실은 부모님 유산이야. 나중에 너 만나면 이거라도 주려고 형하고 싸워서 내가 차지했어"
그말에 선주는 입이 떡 벌어진다.
"집 나가는대로 니 빚 갚을게"라며 그는 선주의 선처를 바라는 모양새다. 선주는 할말이 없다. 이제 만났는데 둘다 이사를 계획하고 있다. 만나자마자 이별이라는 말이 이럴때 쓰는건가 싶다...왜 이렇게 가슴이 저릴까, 다시 보면 뺨부터 갈기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되지를 않고 그의 품으로 파고들고 싶기만 하다.
"나도 집 내놨는데.."라는 선주의 말에 기웅이 잠시 머뭇거린다. "혼자니 여태?"라며 뒤늦게 그녀의 현재 상황을 물어온다. 선주는 대답대신 그가 내린 커피를 한모금 마신다. 온몸에 온기가 돈다..그리고는 나른함이 몰려든다..그렇게 그녀는 그의 소파에서 잠이 든다. 깨어났을때는 창으로 들어오던 햇살도 다 사라진 뒤였고 자신의 위로 양털 담요 한장이 덮여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대단지에 사는 기웅의 집은 빨리 나갔다. 향도 층도 모두 로얄인데다 시세보다 싸게 내놓았고 그에 비해 집 컨디션이 좋아서라고 선주는 생각했다..
조금 있으면 기웅의 이삿짐이 저 언덕을 넘어오려니 하고 그녀는 언덕을 올려다본다. 그러자 아닌게 아니라 1톤 트럭이 미끄러지듯 , 썰매를 타듯 언덕을 빠르게 내려온다. 그리고는 선주네 단지 입구로 차는 들어선다. 언손을 호호불며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선주를 본 트럭 조수석 기웅이 살짝 웃어보인다.
기웅이 집 팔고 돌려준 돈으로 선주는 은행빚을 깨끗이 청산하고 그와 합치기로 하였다. 그렇게 살다 선주집이 빠지면 둘이 좋아하는 호수가 있는 신도시 대형 평수로 가기로 약속하였다. 그곳에서 아이를 두엇 낳자는 기웅의 말에 선주는 '나이가 있는데 될까'하는 조바심이 일지만 일단은 노력해보고 안되면 시험관 시술이라도 받기로 하였다.
기웅의 마지막 이삿짐이 선주의 집 열린 창으로 올려질 즈음,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일기 예보에서는 이번 눈은 사흘 계속 간다고 하였다. 둘은 서로를 꼭 끌어안고 사흘간의 동면에 들어가기로 한다.
goog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