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환은 다 늦은 시각에 들르겠다고 한다..지난주에도 대학로에서 만나 저녁을 만났는데 뭐하러 또 오겠다는것인지, 그것도 이 늦은 시각에.
"야근이 걸려서..그래도 꼭 갈게"라며 그가 고집을 피운다.
세영은 그가 유해보이는 겉과 달리 자기주장이 강한 타입이라는 걸 알아서 맥없이 "알았어"라고 말을 하고 전화를 끊난다.
영환은 현재 아내와 별거중이다.. 영환의 사업이 휘청거리면서 부부는 자주 다투다 급기야는 별거에 들어간것이다. 그런 영환을 처음에는 위로한다고 자주 보았지만 어디까지나 그는 어엿한 우부남이고 아이까지 있다. 세영은 그와의 '일정거리'가 필요하다 느낀다.
그렇게 영환은 9시가 다 돼서 초인종을 울려댄다.
"다음에 오라니까.."라고 하자 "너 줄거 있어서"라는 그의 한손을 보니 케익상자가 들려있다.
"너 당근케익 좋아하잖아. 거래처 사람이 가져왔드라구"
그말에 세영은 쿡 웃음이 나온다. 이걸 주려고 강남에서 강북 끝자락의 자기집까지 왔다는게, 것도 야근까지 하고..하는 생각이 들자 얼른 커피라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해서 그녀는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끓기를 기다린다.
"넌 여태 커피 머신도 없냐"라고 투덜대는 영환의 말이 조금은 정겹게 들린다. 둘이 대학동창이니 알아온 세월만해도 20년이 다 돼간다...
허물이 없다면 없는 사이여서 별거까지 이른 자기 부부의 속내를 털어놓을때도 세영은 그닥 놀랍지 않았다."이젠 부부관계도 안해"라던 그말까지도.
"나 어쩌면 완전히 갈라설거 같아"라는 그의 말에 , 다 끓은 물을 커피잔에 따르던 세영의 손이 멈칫한다.
"그러지 마..아이들은" 하자, "그거 다 핑곈거 알잖아"라며 그가 세영으로부터 커피를 받는다. 그리고는 주섬주섬 케익상자를 푼다.
세영도 아이를 가져본 적이 있다. 영화 음악을 하는 t와 잠시 사귀는 동안 아이가 들어섰지만 t가 신인여배우와 눈이 맞으면서 둘의 관계는 흔들렸고 그래도 그를 붙잡겠다는 생각에 세영은 이미 떠나간 남자의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사산이었다...
이런 그녀의 사정을 다 아는 영환인지라 아마도 '아이따위는 핑계'라고 이야기하는 건지도 모른다. 비록 낳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세영의 자궁밖으로 나온 그 아이 이야기를 뒤늦게 t에게 했을때 그가 보인 반응을 세영은 여태 잊을수가 없다.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했어. 너만 곯았잖아. 진작에 지웠어야지"라던 t....
그리고 얼마후 t는 약물중독으로 자신의 욕실에서 죽은걸로 기사가 떴다. 괜한 오지랖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아이 아빠'였다는 이유로 세영은 그를 조문하고 오는데 첫눈이 내렸다.
"그러지 말고 아이들 생각해서라도 다시 잘좀 해봐"라며 세영은 영환이 가져온 당큰케익을 한입 베어문다. 그러자 그가 물끄러미 자신을 보는게 느껴진다. 얼굴이 달아오른다. 볼거 못볼거 서로 다 보고 온 사인데도 오늘따라 그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고 불편하다.
"만약..."
그말에 세영은 다음말을 알아차린다.
"아니...너하고 어째볼 생각없어."라고 그녀는 딱 잘라 거절한다.그러고나자 조금은 후련해지는 기분이다.
그럼에도 자정이 될때까지 영환은 갈 생각을 않고 피곤하다며 소파에 누워 잠들어있다. 밤운전이 힘들다던 그의 말도 떠오르고 아무리 별거중이라 해도 엄연한 유부남과 늦은시각 이러고 있는게 내키지 않아 세영은 자는 그를 살며시 흔들어 깨운다. .그러자 그가 어...하면서 졸린눙르 비비며 일어난다. 12시야. 라고 세영이 말하자, 어, 미안, 하고는 부시시 일어나 갈 채비를 한다.
"나오지 마. 늦었어. 춥기도 하고" 라며 그는 마치 대학생처럼 배낭을 둘러메고 현관으로 향한다.
"와이프랑 잘 얘기해봐"라고 세영이 말하자 영환은 씩 웃는걸로 대답을 대신한다.
"멀리 안 나갈게"라며 세영이 엘리베티어앞에서 말하자 그가 "그래 들어가"라고 한다. 엘리베이터가 거의 다 올라왔을때쯤이다. 그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더니 손으로 그녀의 뺨 한쪽을 살며시 어루만진다. 순간 그녀는 흠칫 뒤로 물러서며 "뭐하는거야 너?"라고 기분이 상해 내뱉는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영환이 머뭇거리더니 "미안"하고는 기계에 오른다.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으로 그의 모습이 점점 축소된다. 마침내 문이 다 닫히고 복도를 걸어 자신의 집으로 오는데 세영의 기분이 말이 아니다. 뭐였을까 ? 자기 얼굴을 어루만진 그의 행동은? 설레임대신 얼른 들어가 얼굴을 씻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해서 그녀는 남은 복도를 뛰다시피 해 자기 집 현관 비번을 급히 누르고 안으로 들어간다. 이어서 둔중한 철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