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88'드라마는 가난하지만 정감 넘치는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소개된 쌍문동이 배경이다. 보통사람들이 모여사는 이 동네는 번듯한 양옥집에 무엇보다 평지 위에 집이 있어서 그나마 형편이 나은 지역이다. 산 아래 있다고 '산동네', 달을 코앞에서 볼 수 있다 해서 '달동네'라 이름 붙인 지역은 그보다 평지보다 가파른 언덕이나 더 열악한 곳을 말한다. 대표적인 곳이 관악구 신림동 난곡지역, 성북구 정릉과 삼선동, 용산구 한남동이다.
현재 서울 정릉은 근사하고 세련된 동네이다. 하지만 30여 년 전만 해도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 동네였다. 나는 이곳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형편이 가난한 빈민들이 모여사는 달동네 정릉에서도 그보다 한참을 더 깊이 올라간 곳이다.
집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렸다. 삼양사거리 대로변에서 내린다. 우르르 쏟아져 나온 많은 사람과 함께 마을버스에 오른다. 마을버스는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날 수 있는 골목길을 곡예하듯이 지난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낡은 판잣집과 누가 일하는지 훤히 보이는 마찌 まち 꼬방 (주로 봉제, 피혁 등 영세한 작업장이 붙어 있는 모습을 표현하는 일본어) 사이를 용케 빠져나간다. 도로가에 나와 있는 장독이나 양동이 등 가재도구들이 버스와 부딪치지나 않을까 걱정하며 곡예운전에 멀미가 날 때쯤 드디어 종점에 도착하였다.
끝이 아니다. 내가 일하는 곳은 마을버스 종점에 내려서도 오르막 길을 더 올라가야 한다. 경사진 언덕을 오르느라 숨이 가빠질 때쯤 나타난 그곳에 동네가 있다. 동네는 한 사람도 지나기 어려울 정도 폭의 골목길이 마치 개미집처럼 서로를 이어준다. 집은 낡은 나무판자를 이어 붙여 만들어 칙칙한 색이다. 대문이라 할 것도 없는 문을 열면 다닥다닥 붙은 방들이 보인다. 어떤 집에서는 그 방마다 서로 다른 가구들이 살기도 한다. 가장 고역인 것은 집마다 있어야 할 화장실이 없거나 부족한 경우이다. 그래서 밀집한 주택가 한가운데 공영화장실이 번듯하게 있다.
그 공영화장실을 지나 좁은 골목길을 따라 도착한 곳이 내 일터이다. 이 **어린이집은 그 동네에서 보기 드문 번듯한 집이다. 그래도 그 정도면 괜찮다 싶은 슬레이트 지붕의 양옥집이다. 민주화를 어쩌고 하는 교수님과 독지가들이 빈민지역 아이들을 위해 돈을 모아서 만들었다 한다.
어린이집의 낡은 철문 대문을 열고 계단 두세 개 아래로 내려가면 시멘트로 마감한 작은 마당이 있다. 아이들은 매일 이 작은 마당에서 놀았다. 어느 날엔가 자원봉사하러 나온 대학후배가 어디선가 암수 토종닭을 얻어왔다. 주변에서 못쓰는 사과상자와 재료를 구해 와 닭장도 만들었다. 정성껏 키운 덕분인지 알을 낳았고, 정말로 작은 병아리들이 태어났다. 마당은 아이들과 병아리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아이들은 주로 보육실에서 생활한다. 보육실은 커다란 방 두 칸뿐이다. 보육실 가운데 미닫이 중문이 있는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중문을 떼어냈다. 방을 크게 사용하기 위해서다. 비록 문틀 때문에 작은 아이들이 넘어지곤 하였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며칠이 지나 용케 그 문틀을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우리 어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똑똑하다.
이른 새벽부터 일하러 나가는 부모들 덕분에 아이들은 일찍 등원한다. 출근하면서 헤어지는 아이들 중 몇은 아직도 울기에 오전 시간은 북새통이다. 아침을 먹지 않고 오는 애들이 대부분이라 아침을 먹이며, 우는 아이를 달래고, 새로 들어오는 아이를 맞이한다. 그리고 놀이와 율동, 간단한 이야기나누기를 하였다. 점심까지 먹이고 나면 그야말로 한시름 놓은 셈이 된다. 이제 모든 아이들이 낮잠을 잘 시간이 되었다. 아이들을 재우며 선생님들도 아이 곁에 누워 휴식을 취한다. 잠 못 이루는 아이는 미간을 만져거나 등을 쓸어주었다.
공간은 다용도이다. 보육실은 놀이장이며, 식사장소이다. 수면실로 바꿀 때는 보육실과 닿아있는 현관의 통로를 따라 설치된 커튼을 한쪽으로 치면 끝이다. 아주 단순한 장치이지만 꽤 그럴싸한 수면실이 되었다. 현관 오른쪽으로는 부엌이 있고, 부엌 안쪽으로 교사실 겸 사무실이 있다.
아이들 20여 명에 교사는 3~4명이다. 저소득층을 위한 어린이집을 표방했기에 교육비는 아주 저렴했다. 이렇게 교육비가 저렴한 데는 후원자의 기부금이 많아서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의 일부이다. 한참을 지나 나중에 깨달은 일이지만, 저렴한 교육비가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거기서 근무하는 보육교사의 낮은 임금과 처우 덕분이다. 점점 나아지기는 했지만, 첫 달 월급은 20만 원이 안되었다. 적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적었다. 4대 보험은 물론 다른 복지 혜택도 없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정말로 그때는 그랬다. 당시 어린이집( 보육사업)은 현재처럼 국가사업이 아니기에 국가의 재정 지원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책임져야 할 아동복지사업을 개인의 자선, 희생과 선한 마음에 의지한 것이다.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한 아동복지사업을 말이다.
젊은 시절에 가졌을 법한 의협심이 조금이나마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자선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그 시절 첫 마음을 나는 기억한다. 우리는 새파랗게 젊고 인생 경험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모르는 풋내기 교사들이었다. 어린이집 부모 대부분은 우리 교사보다 어렸으나 한두 명의 아이들을 키웠다. 그러나 그들은 자녀를 보살펴준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를 교사로 대우하고 존경하며 따랐다.
이들은 우리나라 경제성장 정책에 따라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들이었다. 고단한 삶에서 아이들은 희망이고 삶의 이유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우리나라 곳곳에서 방치되었고, 죽어갔다. 논과 밭에서 아이들은 뱀에 물리고, 영등포 공단 웅덩이에 빠져 다쳤다. '혜영이 용철이'는 농촌에서 농사짓다 서울로 올라와 막노동과 파출부 일을 하러 나간 부모님이 잠그고 간 망원동 반지하 방 안에서 하루종일 있다가 생긴 불에서 죽었다.
그 이후로 이어진 아이들의 사망, 사고 소식이 1990년대를 열었다. 그리고 '탁아소가 필요하다', '아이들에게 보호교육받을 권리를, 어머니에게 일할 권리를'를 외치며 시위에 나섰다. 전국 100개 밖에 안 되는 어린이집들이 모여서 사회에 부르짖었다.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어린이집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우리의 활동은 1991년 영유아보육법이 제정을 이끌었다. 자녀보육은 부모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사회문제라는 인식이 자리하게 된 것이다. 본격적으로 국가가 맡아서 책임지는 보육사업과 제도가 마련되었다.
첫출발을 기억하자. 낯선 시도를 망설이지 말기.
언젠가 서울 정릉에 간 김에 그 어린이집을 찾은 적이 있다. 모든 것을 허물고 새로 건설된 도시를 보았다. 빽빽한 아파트 사이로 대충 눈대중으로만 이곳이었지 싶은 위치에 서 있었다. 사회에 내디딘 첫출발이 이곳이 된 이유는, '야누스 코르착'의사처럼 나찌수용소에 아이들 손을 잡고 들어가 목숨을 바칠 정도로 아이들을 위한다거나 '에글렌타입 젭' 여사처럼 적대국 아이들조차 사랑하라는 숭고한 마음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출발점은 엉성하기 짝이 없던 단순한 자원봉사, 그보다 더 나을 것이 없던 초짜의 유아교사였을 뿐이다. 다만 그 시절 어린이집은 흔적 없이 사라졌으나, 여전히 아이들 권리는 해결해야 할 숙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