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2015년 겨울, 어느 대통령 영결식장. 영결식에 참석한 소년소녀 합창단 사진 한 장이 눈길을 끌었다. 이날 많은 눈이 내렸고 영하의 한겨울 날씨였다. 사진 속 아이들은 초등학생들로 보이는데, 우산도 없이 펄펄 내리는 눈을 맞으며 앉아 있다. 방한용 겨울 외투는 물론 모자, 장갑, 목도리조차 없다. 겨울용이 아닌 게 분명한, 합창단 쟈켓에 서늘하게 드러난 목덜미, 뺨과 입술은 시퍼렇게 얼어있다. 이 아이들은 이곳에 앉아 무슨 생각을 했을까? 보호자나 행사관계자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이들을 이렇게 놔둔 걸까?
수년 전, 영국 텔레그라프 지는 한국아이들이 등장하는 사진을 '올해의 사진'으로 선정했다. 사진 속 아이들은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인다. 바닷가 뻘밭에서 훈련을 받는 장면이다. 모든 아이들은 마치 군인과 같은 복장이다. 00 훈련단이라고 쓰인 빨간색 옷은 귀신 잡는 해병대를 연상케 한다. 진흙 범벅인 채 뒤로 눕다시피 한 아이들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 있다. 고통스운 표정에 울음이 가득한 아이도 보인다. 이 사진에 붙여진 제목은 bizarre. 뜻을 찾아보니 “기괴한”의 미를 가진 말이다. 외국 기자 눈에는 기괴해 보였으리라. 이상하고 괴상망측해 보였으리라.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한국 부모들이 자녀를 이런 고통스러운 현장 캠프에 보내다니 말이다.
그때는 그것이 큰 문제없었던 시대였다. 외부 행사에 아이들이 찬조 출연하거나 학교 밖 기관에서 진행하는 위탁교육에서 아동인권을 고려하지 못하는 시대말이다.
그리고 20여 년이 흐른 후 세상이 바뀌었다. 이제 더는 추운 날씨에 얇은 옷만 입혀서 국가행사에 들러리로 아이들을 내세우지 못할 것이라 했다. 무슨 수련원이니 훈련원에서 아이들에게 고통을 주며 일깨우려 했던 '교육'을 더는 하지 못할 거라 했다. 기존에 우리가 '교육',이나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해왔던 것이 맞는가, 정당한가 의문을 갖고 재검토하는 시대에 왔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고통을 주는 교육, 훈련을 왜 할까? 가학적 행위를 해서라도 훈련시켜야 할 덕목이란 무엇일까? 과연 그것이 교육이며, 진정한 배움이 일어나는가? 그때 맞았던 것이 지금도 맞는가? 질문하는 시대이다.
그럼에도 가정, 학교는 물론 유아교육기관과 사설학원 등에서 아동학대사건은 잊을만하면 등장한다. 집에서, 학교에서 학원에서 힘들게 배우면 잊히지 않을 거라던 어른들, 그렇게 안 하고 요새 어떻게 애들 교육시키냐던 어른들은 틈틈이 일어난다.
나름 그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일도 있다. 예로, 몇 년 전 초등 6학년 아이가 담배 피우는 장면을 훈계했으나 도리어 그 부모에게 고소를 당했다며 인터넷 커뮤니티에 공개한 어른이 있었다. 자신이 사는 아파트 놀이터에 옆 동네 아이들의 출입을 금지시킨 어른들의 기사도 있다.
흡연하는 아동을 봤으니, 어른이라면 당연히 '교육을 해야' 하는 게 아니냐 와 아무리 그 아이가 잘못했다고 해도 보호자 없는 상황에서 아동 훈계는 문제의 소지가 있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는 기사였다. 내 아파트에 옆동네 아이들 출입을 금지시킨 게 왜 잘못이냐는 주제로 넘어가면 아동인권과 성인 인권이 대립적으로 보인다. 대립적이지 않은데도, 일면 그리 보일 때, 헷갈릴 때 기준은 무엇일까? 무엇을 고려해야 할까?
이 장면을 사진 찍었다 해보자. 조금만 떨어져서 이 장면을 '아동인권의 시선'으로 관찰해 보자. 학대라고는 몰랐을 그 어른들은 교육이라 이름을 붙인다. 일부는 그것이 실은 가학적 의도나 행동이었음을 모른 척 한 성인들도 일부 있다. 이 모두 아동권리를 지켜야 할 부모, 교사, 사회와 국가 공동의 책임방기이다.
아이들은 행사장을 예쁘게 꾸미는 장식품이나 응원 도구가 아니다.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장단 맞춰 내는 추임새가 아니다. 입맛 돋우기 위해 맛보기로 내는 애피타이저가 아니다.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가진 존재이다.
만약 아이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면, 아이들의 목소리를 자유롭게 낸다면, 이 아이들은 무엇이라고 했을까? 권리의 주체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들의 목소리를 없애버린 게 아닐까? 어떻게 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가? 어른 중심의, 어른 목소리 중심의 문화와 사회환경이 무엇이 있는가? 어른 중심의 세상을 바꾸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오늘 새벽, 모 인터넷 신문사에서 연락이 왔다. '영상 속 아이들'이라는 기획을 준비하던 차에, 나의 이전 글을 읽었다며 자문을 구해왔다. 이제 진흙탕에 굴리고, 때리며 키우는 것은 '나쁜 교육'이라는 걸 대부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이 맞는지 더 구분하기 어려운 국면이 펼쳐지고 있다. 영상 속 자녀를 등장시켜 열광했던 수많은 부모와 어른들에게 '지금은 맞다' 주장한다.
돌이켜 역사를 살펴보니, 매 시기 그랬다. 남들이 다 맞다고 할 때, 아이들의 편에 서서 그것이 아니다, 틀렸다고 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변화의 불씨를 일으킨 어른들 말이다. 대표적으로는 세이브 더 칠드런(Save the children)을 창립한 에그렌타인 젭(E.Jebb)과 나찌하에서 아이들과 목숨을 함께 한 야누스 코르착(Janusz Korczak)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생각과 활동은 UN아동권리 협약 제정에 큰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소파 방정환이 아동권리사상을 가장 잘 대변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2024.10.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