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동네에서는 착한 딸로 통한다. 그러니까 고향에서는 그렇다. 누구네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아는 그런 좁은 동네에서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말이 되는 동네에서 나는 컸다. 물론 나와 동갑인 친구들도 많이 있었다. 나와 같은 학교를 다니고 같은 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고등학교 때 심한 사춘기를 겪으면서 학교를 가는 일이 없자 결국은 그 학생의 학부모가 우리 집에 와서 나에게 물었다. 자기 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아는 게 있냐고, 당연히 나는 모른다. 하나 아는 건 있었다. 그 친구는 배달 오빠들을 잘 알았고 좋아했었다. 그래서 "달려" 하는 오빠들 뒤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자율학습을 할 때면 사라져서 담임 선생님은 나에게 일부러 짝을 하게 하셔서 감시를 하게 하셨지만 그것도 무용지물이었다.
그리고 나는 고2 때 엄마가 암에 걸려서 정말 많이 울었고 많은 걸 깨달았다. 그냥 어렸을 때 보육원에서 자라면서 밝고 명랑한 친구들 사이에서도 말하지 못한 어려움들을 보면서 어릴 때는 표현하지 못하는 그런 아픔을 가지고 그네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어쩌다가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엄마는 꼭 맛있는 걸 해주셔서 "자주 놀러 와라" 하시며 나보다 친구들을 더 챙겨주셨다.
그리고 나는 고2 어른아이로 가게 된다. 어릴 때부터 어쩌면 나는 어른아이였는지도 모르겠다. 맏이로 태어나서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압박을 가지고 살았다. 공무원인 두 분이지만 빚이 많았고 그 빚은 두 분이 써서 고기라도 많이 사 먹었다면 속이 덜 상했을 텐데 보증을 많이 서서 집이 넘어갈 위기까지 가서, 결국은 엄마는 혼분식을 하자고 하셔서 친구들은 내가 라면을 많이 먹는 걸 부러워했지만 밀가루 냄새를 맡으며 사는 건 많은 걸 포기하고 살아야 했다.
그래서일까, 여동생은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살았다. 그해 유행하는 머리스타일이 나이아가라라는 머리스타일이었는데 여동생은 그 펌을 해야겠다고 동네 미용실에 가서 했고 돈은 엄마가 냈다. 나도 내심 하고 싶었지만 동생이 했는데 나는 할 수 없었다. 문제는 막상 그 머리스타일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여동생은 다음날 머리를 풀어달라고 엄마에게 말했고 엄마는 그냥 오래되면 자연스럽게 풀릴 거라고 완강하게 거부하셨지만 여동생은 아빠가 퇴근하실 때까지 울면서 버텼고 결국은 풀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반지가 사고 싶으면 사야 했고 옷이 사고 싶으면 사야 했다. 가령 수학여행으로 놀러를 가면 여동생은 엄마에게 옷을 사달라고 하면 엄마는 내 눈치를 보시며 여동생 옷을 사주시고 나에게는 미안하다고 하셨다. 처음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나중에는 화가 나서 엄마에게 "나는 첫째로 태어난 것뿐이야"라고 소리를 쳤다. 그렇게 살다 보니 나는 어른아이로 자랐고 남들에게는 효녀,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 불편함은 당사자만이 알 수 있다.
난 효녀가 아니다. 그냥 그렇게 살아왔던 것에 그렇게 살았기에 편해서 사는 것뿐이다.
엄마가 암 병동에 계시면서 나는 엄마와 떨어져 지내면서 여동생과 버티며 살았고 엄마가 모든 병치료를 끝내고 돌아오셨을 때도 집안일을 하시기가 어려워 나는 자발적으로 하겠다고 했다.
그때 엄마가 여자로 느꼈다. 같은 여자로 힘들어 보여서 내가 자발적으로 엄마를 도왔다. 그리고 엄마와 친구처럼 지냈다.
엄마와 그렇게 지내면서 주변에서는 그런 효녀 없다고 하지만 나는 힘들었다. 하지만 말할 수 없었고 효녀라는 타이틀은 내게 침묵을 요구했다. 그래서 나는 늘 "괜찮아"라는 말을 했다.
그러다 "싫어"라고 하면 엄마는 많은 생각을 하시며 "미안하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나라에서 맏이로 자라는 사람들은 두부류인 것 같다. 어른아이로 자라거나 아니면 정말 지원을 많이 받는 맏이로 자라거나, 아닌 어떤 그 지점의 맏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내 친구도 맏이인데 이 친구도 어른아이로 자라서 나와 공통점이 많다. 말이 없고 효녀로 자라서 뭔가 기준이 매우 도덕적인 것에 중점을 둘 때가 많다. 나도 알고 있다. 나에게도 허점은 엄청 많다는 것을 그래서 그럴까?
엄마는 내게 이제는 스스로 놓아줄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엄마 나 이제 효녀 안 할래"라고 말을 했다.
엄마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이시며 "그래 그동안 수고 많았다" 하시며 내 손을 지그시 잡으시며 "네가 있어서 엄마는 여태껏 어려운 시기를 버티었다. 고맙다. 몽접아"라고 하셨다. 그리고 내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처음 낳고 한 생각이 네가 친구였으면 했다. 그래서 기도를 했어. 내 친구가 되어서 제발 내 딸은 나처럼 외로운 딸로 살지 않기를" 엄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엄마 처음은 힘들었는데 지금은 엄마의 딸로 가장 따뜻한 사람으로 살고 있어. 그리고 내게도 생각의 무게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어"라고, 엄마는 여동생에게 늘 말한다. "언니, 이제 놓아주자"라고 여동생도 이제는 이야기한다. "언니 이제는 언니를 위해 살아"라고. 고마운 시간들에게 나는 놓아주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