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고 하면 가장 친한 관계 그래서 아무 이야기나 할 수 있는 관계라고 난 생각했다. 어렸을 때는 학교에서 뭐 했으며 뭘 먹었는가부터 어떤 친구가 나를 힘들게 했는가 그리고 어떤 친구와 고무줄을 했으며 겨울에는 어떤 친구와 눈싸움을 했는지를 세세하게 말하는 그냥 애교 없는 리포트를 말하는 딸이었다. 엄마는 그럼 무심히 들으시고는 "우리 몽접이가 바빴겠구나" 하시며 일을 하셨다. 나는 그럼 엄마에게 "엄마는 하루 뭐 하셨어?"
하면 엄마는 "글쎄 엄마는 늘 바쁘지, 퇴근하고 몽접이랑 우리 식구들 밥 준비하느라 슈퍼 갔다 오고 그리고 이제 생선 굽고 그렇지"라고 하면 나는 괜히 심술이 나서 "엄마는 다 이야기 안 해"라고 하면 엄마는 웃으시면서 "몽접아 다 이야기 안 해도 가족은 알아,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래서 나는 "치 그런 거 없어, 말 안 하면 몰라"하고 뾰로통하게 있으면 엄마는 "몽접아 사람은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하고 살면 속이 상해서 못 살아. 우리 몽접이 앞으로 나이가 들어서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진짜 필요하면 그때하고 아니다 싶으면 그냥 후~~ 해봐" 엄마는 입술을 모으시고 한숨을 후~~ 하고 입모양을 준비하셨다. 나도 따라서 후~~ 했더니 괜히 편해졌다.
엄마는 "잘했다" 하시며 "몽접아 밥 준비하자" 하시며 부엌으로 가셨고 나는 책을 읽으며 저녁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후~의 의미를 고등학교 때 알았다. 엄마는 위암이고 나는 여동생과 둘이서 6개월을 버티는 삶으로 살았다. 아빠는 엄마 병간호로 회사를 잠시 쉬셨고 우리 둘이 남아서 처음에는 할머니가 계셨으면 좋겠냐고 물으셨지만 나는 괜찮다고 했고 우리는 가까운 외갓집에서 며칠을 보내다가 그냥 우리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엄마와 매일 통화는 힘들었지만 일주일에 두어 번의 통화에 주말에 서울로 가서 엄마를 보는 것으로 울음을 멈출 수 있었다.
그리고 난 그때 엄마에게 괜찮아라는 말을 많이 했다. 그리고 힘내라는 말도 많이 했다. 하지만 "엄마가 그렇게 계시니 걱정이에요"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눈물은 나는데 웃었고 헤어질 때까지 나는 웃음을 유지하며 6개월을 버티다가 엄마는 다시 병원으로 가셨고 그때도 나는 엄마 뒷모습에서 웃음으로 희망으로 헤어져야 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일을 겪으며 힘든 점도 있었고 좋은 일도 많지만 특히나 가족에게는 힘든 일을 말하기는 힘들다. 왜냐면 내가 힘든 이야기를 하면 두 배 세배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나는 너무 힘들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가족이기에 더 말을 하지 않은 성격이 되어서 엄마가 훅하고 "몽접이 잘 지내니?"라고 물으시면 "어 엄마"라고 더 크게 말할 때가 있다. 그때는 힘들 때가 더 크게 말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나잇값이라는 명사로 퉁친다. 너도 이제 나이 먹었으면 그만 걱정 끼쳐 드려야지라고 생각하고 숨긴다.
하지만 목소리만 듣고도 아시는 엄마는 카톡이나 전화를 하시고 나는 약간 흘러가는 이야기를 하지만 엄마는 늘 이야기하신다."믿는다"
내가 살면서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였다.
항상 엄마는 나에게 "난 널 믿는다"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내가 고등학교에서 성적이 떨어져 고민을 할 때도 혹은 나 자신에 대해서 상심에 할 때도 대기업에 사표를 쓸 때도 그 어느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고 말씀하신 게 너를 믿는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때는 몰랐다.
이게 어떤 의미인지, 하지만 나이고 들고 보니 엄마의 말씀이 근간이 되어서 이제는 나에게 그 믿는다라는 동사는 자양분이 되어서 가족에게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털어버리는 편이 되었다.
그리고 감사드린다.
가족은 그런 관계인 것 같다. 가장 가깝고 그렇지만 그렇지만 또 너무 사적인 이야기를 했을 때 그 고민을 같이 하기에 미안한 관계 그래서 나는 이제 가족이라는 개념 혹은 정의를 다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