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론/ 황지우

by 몽접

거룩한 식사― 황지우


나이 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 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 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 세상 떠 넣어 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 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개인적으로 황지우 시인의 시를 좋아한다. 대학 초창기 시절부터 황시인의 시를 흠모했었다. 가난한 언어로 가난한 마음을 훔칠 수 있는 몇 안 되는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려운 시가 시인가를 놓고 열띤 논쟁을 하던 스무 살의 나를 넘어서 김춘수 시인의 시를 놓고 20장이 넘는 리포트를 써야 했던 어려운 아포리즘과의 사투는 아직도 각인이 생생하다.


이 시를 보면서 인간의 본능의 암울함과 노동의 아름다움이 함께 있는 이중적인 장치가 생각이 났다. 파고다공원은 나이들은 주로 60세 이상, 그들에게도 청춘의 시간은 있었을 것이고 그들에게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공간이 있었을 터인데 시간이 가져다주는 순애보는 슬프기만 하다.



분식집 메뉴판을 덮는 큰 덩치, 목을 매는 일, 이 모든 일이 살아야 내야 나는 분투적인 일이라면 인간은 왜 사느냐고 물어야 하고, 결국은 인간은 슬픈 존재인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찬밥에 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에서는 차가움과 뜨거움 냉정과 열정의 상대 대비에서 인간의 본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 파고다 공원이어야 했을까?.. 시인은 아마도 영화 은교에서처럼 시간과 공간을 뒤로하고 그들에게 함께 할 수 있는 교집합을 파고다 공원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매일 내기 장기가 이뤄지고 박카스 할머니가 있는 곳,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도 나오지만 언젠가 한 번은 봤던 여자와 남자가 예전을 생각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나누는 곳 그리고 그 영광뒤에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곳이 파고다 공원이었다.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로 마무리 지어진다.


인간의 뒷모습이 아닐까, 아니면 생애 몸부림 그리고 그 나이에서 자신의 감춰진 모습을 나에게서도 볼 수 있는 모습을 타자화 하여 보는 건 아닐까 싶다. 물론 시인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이 시를 읽어내리면서도 느끼는 애잔함과 인간성에서는 종교를 넘어 인간의 숭고함과 고단함이 나타난다. 인간은 결국 뜨거움도 차가움도 둘 다 가진 존재이기에 수동적인 존재로 가는 나이에 순응하는 여린 인간으로 난 규정지으려고 한다. 철저히 3인칭 작가적 관점으로 시를 썼으며 독자는 1인칭 주관적 관점으로 읽히는 시라 아주 매력적이다. 그리고 쉬운 언어와 동선의 이동이 그리 멀지 않아서 시선의 향방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먹는 일, 먹는 자들 가득 떠 넣는 일 모두 다 먹다는 동사로 해결되는 시이다. 시를 동사로 처리했다. 그리고 본인은 그 모습을 울다로 처리했다. 공감각적 심상으로 처리하지 않고 1인칭 주관적 시점으로 처리했다. 궁금한 것은 왜 노인이어야 했을까다. 장소 설정이라서일까,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파고다 공원이 가진 이중적 의미는 노인들의 교집합이자 20대들의 공부장소이다. 늙음과 젊음이 함께하니 뜨고 지는 장소가 함께라는 게 맞다. 오늘의 알딸딸한 시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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