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르트르가 준 삶의 응원.

by 몽접

일찍이 샤르트르는 삶은 절망의 다른 면에서 삶은 또 다른 시작이 된다고 했다. 내가 좋아하는 샤르트르. 잠깐 샤르트르 이야기를 하자면 난 고등학교 때 샤르트르 덕후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를 샤르트르에게 물어가면서 살았다. 존재에 대한 본질을 알아야 했기에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유명한 어구가 내 뒷머리를 치며 무릎을 탁 쳤다. 아, 이런 생각을 어떻게 하지? 하면서 나는 그 시절에 같이 살았다면 아마 보따리를 싸 들고 갔을 거다라고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실존주의 철학파들을 사랑했다. 학교에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에피쿠로스학파, 스토어학파 등등 고대를 가르쳐 주셨지만 내 눈은 현실을 직시하는 학문에 미쳐있었다. 어쩌다 실존주의라는 단어만 신문에 실려도 신문을 오려서 스크랩을 할 정도였다.


시몬스 보브아르도 따라서 읽었고 고등학생인 내 눈에는 정말 획기적이다 못해 낭만에 근사치를 넘어섰다. 그래서일까 나도 대학을 가면 이렇게 살아야지 하면서 살았다. 괜히 멋있는 척하려고 그냥 삐뚤 하게 살았고 체험하지 않은 삶이란 허구라는 명제를 두고서 살았다. 그래서 이야기를 하면서 살아봤어?라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했다. 친구가 나에게 삶이 힘들면 농수산물 경매장을 가라고 했다. 그때는 웃으면서 응, 이라고 했는데 정말 갔다.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하는데 그렇게 진행과정을 보면서 참 열심히 사시는데 난 이 시간에 자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에 시간이라는 개념을 다시 정의하고 열심히 공부했던 일화가 있다.


최근 힘들다는 단어를 그냥 일상처럼 쓰고 있는데 최근 샤르트르 책을 읽는데, 예전 아주 예전 필사를 했던 공책에 것 글귀를 발견했다.

샤르트르는 <삶은 절망의 다른 면에서 시작된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너무 현실적이다 못해 숨을 가다듬어야 한다.

이렇게 정의를 내려 버리다니 하면서 살짝 질투가 나기도 했다.

필사를 하면서 이 구절을 적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필사를 하면서 약간의 음료를 마시는데 이때 커피를 내리면서 필사를 했는데 커피를 마시지 않고 이 구절만 뚫어져라 봤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내가 지금 힘든 게 그럼 다른 면을 가고 있는 걸까? 하고 스스로 자문자답을 했다.

샤르트르 할아버지가 살아계신다면 당장 날아가고 싶은 만큼의 유혹적인 명언이라 정말 많은 시간을 두고두고 읽었다.


배우 박신양이 한 토크쇼 프로그램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왜 항상 행복해야 하죠?"

라고 자신도 자신의 교수가 준 시에서 그런 내용을 보고 공부를 했다고 하면서 이런 화두를 던졌다. 매우 신선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기쁘기 위해서 살려고 한다. 그래서 가끔은 행운이라는 단어에 기대어 살기도 하지 않은가. 로또 같은 인생이라고 하는데 이건 거의 이루기 힘들고 작은 것에 행복해하면 그만이라고 하는데 요즘 같은 나에게는 정말 작은 것에도 행복하려고 노력한다.


맞다, 인생은 어려운 게 대다수이고 절망의 순간이 더 많은 것 같다. 도전이고 실패의 연속이다. 그래서 나는 이 힘든 여정의 길에서 배를 저어가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다고 토로를 한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이 배에서 내릴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 내려가면 된다는 것을. 그러지 못함은 미련이나 기타 나의 감정이 그러지 못해서 그런다는 것을. 그것이 행복이라는 단어 혹은 기쁨이라는 단어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기에 그렇다는 것을.


살면서 많은 것을 마주한다. 거리에서 너무 어려워서 돈을 주세요 하시는 분들을 만나게 되면 나는 작은 동전을 넣고 지나친다. 그리고 생각한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사람마다 사연이 다 있다. 다만 그 사연이 다르기에 사건이 된다.

난 생각한다.

샤르트르의 말처럼 지금이 나의 절망이라면 난 정상이라고 , 다른 길을 가기 위한 길이라고 그래 이렇게 정의를 내리니 마음이 다소 놓인다.

고마워요, 샤르트르 그대의 말은 명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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