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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접 Jul 06. 2022

누구를 위하여  닭을 올리나?

더운 여름의 시작, 입맛이 확 줄었다. 이걸 좋다고 해야 하나 아님 불행이라는 단어를 써야 하나. 최근 눈바디로 살이 좀 찐 것 같아서 신경을 썼는데 어딘가에 숨어있던 체중계에 올라가는 무거운 행사를 해 보니 늘지는 않았다. 늘 허리 24인치 바지를 입고 다니면서 뭘 그렇게 소란을 떠냐며 할머니는 늘 나에게 "좀 먹어라" 하신다.


그렇다, 난 식구들 중에서도 가장 입이 짧다. 이건 다 한국인들에게만 있을지 모르는 미용 체중 인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아는 지인이 땅끄 부부 유튜브를 보내주셨는데 나도 한때는 홈트를 열심히 했다. 하지만 난 땀을 엄청 내면서 하는 걸 좋아해서 홈트는 내 스타일이 아니다 싶어서 테니스와 스쿼시 중 어느 것을 할까 하다가 집 근처 스쿼시 하는 곳이 있어서 가서 배웠다. 열심히 해서 한 3달 정도 흐르니 공도 제법 치고 재미가 있어서 하루에 2시간 정도 하면 땀으로 목욕을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 흡족해서 라켓도 사고  열심히 다녔다. 한 6개월 정도 했을까 코로나 때문에 접고 또다시 다른 운동을 찾아서 죽기보다 싫은 고소 공포증을 없애 보겠다고 클라이밍을 등록하고 요지경을 떨었다. 처음에는 저 높은 곳을 어떻게 올라가나 했는데 여기도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처음에는 강사님의 자세한 설명 때문에 "뭐 저 정도는 학생들도 올라갑니다" 하시면서 아주 쉬운 코스를 알려주셨다. 결국 난 안정장치를 하고 올라갔는데 문제는 앞만 보고 달리는 내 성격에 올라가는 건 문제가 없었는데 내려올 때가 문제였다. 후들거리는데 내 다리를 내리고 밧줄을 내려야 하는데 손과 발이 엇갈려서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결국 강사님이 올라오셔서 진압을 하시고 동반 하강을 해야 했다.


촌극이다. 난 "저 고소 공포증이 있어서요"라는 작은 말을 읊조리며 나름 해명을 했지만 다음에는 결코 이런 일을 발생시키지 말아야지 라는 말을 혼자서 했지만 개뿔 할 때마다 "못하겠어요"를 남발하며 그렇게 여기도 3개월을 다녔다. 이유는 코로나, 망할 놈의 코로나로 제대로 한 게 없다. 지금은 하고 싶은 게 없어서 그냥 동네 몇 바퀴 돌고 식단 조절하며 홈트를 한다.


얼마 전 지인이 "아 덥다, 뭐 맛있는 거 없을까요?"로 내 본능을 자극했다. 다름 아닌 지르기와 음식 본능이다.

난 "글쎄.." 하다가 갑자기 삼계탕이 생각났다.

그래 "삼계탕 어때?"

지인은 "좋죠"

그렇게 난 날쌔게 마트에 가서 닭과 기타 부산물들을 사서 집에서 고아내기 시작했다.

난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엄마의 요리 실력을 재현하기 위해 기억을 매만졌고 중간 점검을 위해 열었더니 나름 국물이 진하게 나왔다.

한 숟가락을 하니 "음.." 하는 내 소리에 나도 모르게 웃었다.

대략 2시간 정도 하니 닭은 형체는 있으나 만지면 뼈만 쑥 하고 빠질 것 같아서 끄고 지인과 함께 먹었다.

지인은 "와 괜찮네요" 라며 내게 용기를 주었고 난 "그냥 눈치껏이지" 하며 깍두기까지 함께 했다.






지금 생각하면 삼계탕에 인삼은 없었지만 어렸을 때 많이 먹었던 것 같다. 엄마가 자주 가는 5일장에는 닭이 많이 나와서 몇 호를 쓰느냐에 따라 그날 저녁이 결정이 되었는데 아빠는 항상 큰 닭보다는 중닭을 선호하셔서 엄마는 고르고 골라서 그날 저녁에 마늘을 그렇게 넣어서 삼계탕을 하셨다.


엄마에게는 늘 갈등이 있었으니 노계로 2마리를 먹을 것인가 영계로 한 마리를 먹을 것인가였다.

가난한 살림은 이런 것도 갈등이다.

늘 거래하던 닭집 아주머니는 이런 엄마의 마음을 알아서 늘 영계 한 마리에 노계 작은 것을 하나로 덤으로 주셨다. 엄마는 그날은 신이 나셔서 "오늘은 땡잡았다" 하시며 그 닭을 뜨거운 물에 넣어서 시간과 정성으로 우리 개다리소반에 올리셨다.


푹푹 찌는 계절의 입구에서 아빠는 누가 뭐 먹으러 가자고 해도 선뜻 돈을 내시기 그러시니 그냥 집에서 먹겠다고 하시고 들어오셔서 막상 삼계탕을 보시면 "역시 내가 먹을 복은 있어" 하시며 좋아하셨고 뜨거운 방보다는 들마루에서 손부채를 하며 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기다렸다. 물론 아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면 거의 아빠는 홍길동 수준이다. 그래서 그런가? 아빠나 엄마는 유목 생활을 하셔서 단 한 번도 공부를 강요하신 적이 없다. 그냥 네가 가고 싶은 길이 네 길이다, 라는 주의라 학교 시험이 다음날이라도 놀고 싶으면 놀아라 하시는 쿨하다 못해 냉한 집이라 친구들은 우리 집을 부러워했다. 정작 난 상장을 받아도 감흥이 없는 부모님의 감정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늘 의심스러웠다. 그렇게 고아진 닭에 제일 많은 건 흔하디 흔한 마늘이었다. 아니 마늘 대잔치였다.


우리는"윽 엄마 마늘이 너무 많아" 하면 엄마는 "마늘이 사람 몸에 좋데" 하시며 더 주셨는데 그래도 맛은 좋아서 어찌어찌 먹었는데 제일 좋은 건 누룽지였다. 백숙에 눌어붙은 그 누룽지 먹겠다고 숟가락을 장착하고 박박 긁어먹으면 엄마는 "아이고 그러다가 구멍 나겠다" 하셨지만 말씀만 그렇게 하시지 두 딸의 힘만으로는 안되니 엄마와 아빠까지 함께 구멍이 나든 말든 그렇게 누룽지를 먹으면 아빠는 "이게 진짜네" 하시며 드셨다.


할머니 댁에서 먹어도 가마솥 누룽지가 가장 맛있었다. 할머니는 푸근하게 닭을 넉넉하게 넣어서 주셨는데 설거지를 맡는 나는 눈치껏 가서 가마솥에 붙은 누룽지를 먹겠다고 올라가서 긁어먹으면 사촌들도 따라와서 긁어먹었다. 할머니는 그 모습이 싫지 않으신지 "그래 그래 먹어라" 하시며 깔깔 웃으셨고 요즘 같은 시대에 모두 힘들다고 가마솥은 없앤다고 했지만 할머니는 그럼 추억이 없다고 딱 하나 가마솥 하나를 남기셨으니 해안이 남다르신 거다.


사실 할머니 댁은 정말 촌이다. 읍이다. 그래서 와이파이 그런 건 모르겠고 정말 고향이라는 단어가 적합한 곳인데 기와집에서 몇 번의 집 공사를 했는지 모른다. 두 분 사시기 편하라고 아들과 며느리들의 중론을 모아서 공사를 했는데 그때마다 가마솥을 없애자고 몇 번을 이야기했지만 두 분 다 다른 건 몰라도 딱 하나는 남겨라, 하셔서 남기셨는데 지금은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 다 만족하니 이 만한 보물이 없다.


난 삼계탕을 먹으며 "우리 할머니 댁 삼계탕 맛있어"라고 말을 하며 지나간 추억을 말했다. 사실 삼계탕은 더울 때 힘내라고 먹는 우리 민족 고유의 음식이다. 물가가 또 올랐다. 도대체 어디까지 올라야 만족할 것인가에 대해서 토론을 하고 싶다. 마트에 가니 아예 한쪽에는 브라질산이라고 대놓고 파는데 저렴해서 손이 가긴 했지만 역시 한국인은 토종닭에 손이 가기 마련, 먹는 것에도 이렇게 갈등을 해야 하는 시대이다. 그래서 그런가 점점 내 동심은 이제 역사의 뒤꼍으로 사라지고 있다.

먼 미래 아니 얼마 가지 않은 미래에는 그냥 "먹었다"라는 동사로 회귀될지 모른다는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집 근처에 닭을 판매하는 삼계탕집이 있다.

한 번 가야지 했는데 그냥 가기 싫었다. 그래도 이런 건 집에서 라는 인식은 어릴 때 먹던 기억이 있어서라는 결론이 나왔다.


지인은 좋겠다며 자신은 그런 추억이 없는 게 늘 불만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하긴 고향이 서울이니 그럴 수 있다.


가끔 엄마가 뜨거운 여름에 음식을 하면 "저걸 누가 먹으라고 하시지?"라고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당연히 가족이다. 이 뻔한 공식에 이 뻔한 답을 난 왜 궁금해했을까?

오늘의 삼계탕에 난 묻는다.

"누구를 위하여 닭을 올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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