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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접 Jul 11. 2022

엄마도 딸이었지

가끔 엄마를 보면 난 엄마의 어린 시절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냥 내가 생각하는 엄마는 어느 정도 멈춰있다.

너무 아파서 학교를 보내지 말라던 의사 선생님 말씀에 한없이 주저앉아 우시다가 그럴 수 없다며 있는 없는 힘 다해서 나를 엎어서 학교를 보내셨다. 늘 아파서 학교를 일주일에 많이 가면 이틀을 갔으니 할 말 다했다. 그래도 난 그게 좋아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며 보냈는데 내가 사는 동네는 없이 사는 동네라 학교에 입학을 하는 날 꿀꿀이 슈퍼집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한동네에 친구가 3명이었다. 그러니 3명이 나란히 같은 학교에 입학을 했으니 주인공은 우리들과 학부모였다. 그래서 그날은 정말 저녁이 늦도록 축하를 받았다.


당연히 그날은 짜장면을 해서 동네에서 나눠 먹었는데 입학한다고 입학식 날 엄마는 앙고라 티셔츠에 검은 치마를 입으셨고 내 여동생은 패딩을 입었다. 나와 3살 차이에 여동생은 "언니 축하해"하며 활짝 웃었고 우리 엄마는 기념을 해야 한 다시며 사진사 아저씨를 찾으러 다니셨다.

그 시절에는 잘 사는 집만 있다는 카메라가 귀한 시절이라 당연히 우리 집 형편에는 없으니 엄마는 웃돈을 주더라도 찍어야 한 다시며 한참을 찾으셔서 그렇게 활짝 웃으시며 찍으셨다.

"우리 딸도 입학이다" 이 말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아저씨는 "아니 나이가 들면 입학인데 그렇게 좋으세요?"라고 물으셨고 엄마는 "우리 딸이 많이 아파요, 그런데 이렇게 1학년 들어가요" 아저씨는 "그러시구나" 하시면서 한 번 찍어야 하는데 덤으로 나와 여동생이 나란히 있는 사진을 또 찍어주셔서 엄마는 감사하다고 몇 번이나 인사를 하셨는지 모른다.


이렇게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를 입학하는 모습을 좋아했던 엄마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물론 더 많은 기억이 있지만 내가 기억하는 엄마 중 가장 기뻐했던 모습을 말한다면 이때였던 것 같다.


그리고 외할머니는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갑자기 쓰러지시고 돌아가셨다. 외할머니는 딱 3일만 아프고 죽고 싶다시며 늘 소원을 하셨는데 뇌출혈로 정말 3일을 앓으시다가 돌아가셨다.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학교에서 담임 선생님은 빨리 집으로 가라고 하셨다. 난 뛰어가서 할머니를 만났지만 이미 혼수상태에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셨다.

엄마는 5형제에서 유일한 딸이다. 외할머니는 딸을 얻기 위해서 대구 팔공산에서 100일 기도로 낳은 귀한 자식이니 외할머니의 사랑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렇게 시집을 보내고도 맘이 놓이지 못해 늘 걱정으로 사셨는데 갑자기 돌아가시니 엄마는 그 빈자리를 우울증으로 보내셨다.


난 "엄마 외할머니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야"라고 했지만 엄마는 "왠지 할머니가 문 앞에서 엄마 이름 부르시며 들어오실 것 같다"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고 난 그게 슬퍼서 "엄마 내가 지켜줄게"라고 말했다.

그렇게 난 엄마와 친구처럼 지냈지만 엄마도 딸이라 부모님이 보고 싶을 때는 정말 서럽게 우셨다.

옆에 든든한 남편이 있고 자리 잡아가는 자식이 있지만 다 필요 없어 보일 때는 정말 나이가 들어도 부모가 그리운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난 그게 참으로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엄마는 허리디스크로 수술을 두 번이나 하셨다. 병시중 든다고 아빠가 옆에 계셨지만 어쩌다 엄마와 같이 병실을 쓰시는 분이 엄마의 도움을 받으며 사는 걸 보시고는 몰래 눈물을 훔치셨다. 나도 알았지만 돌아가신 분을 불러올 수 없는 묘한 상황에 난 그냥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자식 때문이라는 명분으로 수술도 하셨지만 자식이 어찌 그 마음을 다 알겠는가. 결국 난 엄마도 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간 어버이날 난 식구들과 밥을 먹으면서 내년에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산소에도 가자고 제안을 했다. 명절이나 무슨 날이 아니면 잘 가지 않게 되는 게 엄마를 외롭게 하는 것 같아서 제안을 했다. 아빠는 좋은 생각이라고 하셨고 동생도 그러자고 했다. 엄마는 싫지 않은 눈빛을 보내며 "고맙다, 큰딸" 이라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엄마와 딸 사이는 어떤 이들은 애증이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남보다 못하다고 하는데 나와 엄마는 정말 동반자 같은 사이이다. 그래서 그럴까? 요즘은 엄마도 딸이지 라는 생각에 더 문자나 전화를 드린다.

그럼 엄마는 "쉬어, 그리고 고맙다"라고 하신다.

난 그랬던 것 같다. 엄마 사랑 때문에 지금까지 여기에 이렇게 있었던 것 같다.

사람을 이해하고 타인에 대한 시선을 둘 수 있었던 것을 배우고 글을 쓰고 글을 읽고 이 모든 것이 엄마 때문인 것 같다.


엄마도 딸이었다. 묻고 싶다. 엄마는 외할머니에게 어떤 딸이었냐고, 아마 물으면 "엄마는 못난 자식"이라고 하실 거다. 외할머니 상중에 그러셨다. "다 주지 못한 자식이라 죄송해요"라고, 아직도 귓가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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