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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접 Sep 08. 2022

나에게는 추석에 대한 슬픈 전설이 있어.

추석 하면 다들 어떤 기분일까? 난 일단 반반이다. 둥근달을 보면서 기도를 하며 공부도 동생과의 추억도 기억을 하는 따뜻한 기억, 그리고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다. 정확하게 우리 엄마는 정말 음식을 하나도 못하셨다. 여러 번 브런치에 적었지만 우리 엄마는 팔공산에서 기도를 해서 낳은 외할머니의 외동딸이다. 


그러니 외할머니는 시집가면 어련히 밥하고 빨래를 한다고 그냥 넘기시고 그렇게 자라게 하셨다. 엄마 말씀으로는 엄마는 늘 가방을 바꾸셨고 시계도 예쁜 걸로만 하셨고 신발이며 옷이며 위에 오빠만 4분 계셨는데 엄마는 공부를 못해도 특별히 외할머니가 신경을 쓰시지 않으셨단다. 그래서 때로는 그게 화가 나서 일부러 틀려가면 외할머니는 "됐다 둬라" 하시면 위에 바로 위에 작은 외삼촌께서 "어머니 이렇게 돌보실게 아닙니다"하고 말씀을 하시고 엄마의 숙제를 담당하셨다고 하는데 엄마는 알아서 공부를 하시는 스타일이라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고 하신다.


하긴 내가 어릴 때도 우리 집은 방목형이라 뭐 딱히 공부해라, 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냥 일찍 자라, 라는 말은 많이 들었다. 한 번은 내일이 시험인데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때가 초등학교 5학년으로 기억한다. 시간이 대충 밤 11시 정도였는데 난 사회공부가 덜 끝나서 더 공부를 해야 했는데 엄마는 "초등학생이 무슨 공부를 그렇게 하냐"하시며 그냥 불을 꺼서 너무 황당해서 "엄마 나 공부" 했지만 엄마는 "그냥 쳐 시험"이라고 해서 정말 그냥 자고 그다음 날 시험을 봤다. 늘 받아가는 점수가 나쁘지 않아서 무던하셨던 건지 무슨 배짱으로으로 그런 학습습관을 기르셨던 건지는 모르나 당신도 학원 없이 사셨던 터라 나도 그렇게 학원 한 번 없이 그냥 대학을 갔다.


친구들은 신기하다고 했지만 난 학원을 다니는 친구가 신기했다. 그러니 말은 다했다.

아, 추석. 그래 내게는 추석이 즐겁기도 했다. 할머니 댁에서 모이면 그동안의 친척들을 보고 이야기하고 할머니의 입담에 배가 찢어지게 웃고 하지만 그 전의 일은 나에게 눈물이었다.


이야기는 이렇다. 엄마는 동네에서 가장 음식 솜씨가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꿀꿀이 슈퍼에서 사람을 받아 엄마는 전을 해서 돈벌이를 하셨다. 일종의 용돈이었다. 할머니 댁 가기 전에 미리 전을 할 사람들의 의뢰를 받아서 엄마는 정말 기름에 내가 튀겨질 정도로 일을 하셨다. 


내가 언니니 엄마는 내게 "가서 꿀꿀이 슈퍼 아주머니에게서 쪽지 가져와라" 하시면 난 쫓아가서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면 "어 왔구나. 올해는 보자.. 응 여섯 가구다.." 난 인사를 하고 집에 가면 엄마는 여태 보지도 못했던 프라이팬을 다 모아서 전을 하셨다. 온갖 기구들이 다 나와서 아수라처럼 보여도 다 짜인 기구들에 시간을 맞춰서 해야 하는 고난도의 요리였다. 


어린 난 중간에 맛을 보고 싶어 했지만 절대 그럴 수 없었고 엄마는 하나하나 지워가며 전을 하셨고 농도와 맛을 중간에 보시며, "그래 이 정도면 욕은 안 먹겠다" 하시며 더위에 땀을 손부채로 하시며 열일을 하셨다. 그 일을 하는 걸 모르시지는 않으신 아빠는 "여보 올해는 하지 말지, 그냥 쉬어" 하셨지만 엄마는 "그래도 용돈은 꽤 괜찮아"라고 하셨다. 


아빠는 괜히 자신 때문에 엄마가 더 일을 하는 것 같아서 전날에는 꼭 파스를 사두셨다. 우리는 그걸 보고 "아빠 엄마 좀 말려, 엄마 허리 아파" 하면 아빠는 "그래 그런데 엄마가.." 하시며 말씀을 흐리셨고 결국 아빠도 그날은 자전거 페달을 돌리시고 들어오시면서 겉옷을 벗고 같이 엄마를 도우셨다.

엄마는 "고마워요" 하시면서 발 빠르게 움직이셨고 기름 냄새는 동네를 휘감아 결국은 각자의 전을 들고 갔다.


엄마는 "올해도 믿고 맡겨 주고 고맙네" 하시며 웃으셨고 영철이 엄마는 "자기가 워낙 솜씨가 좋으니까" 하시며 전을 덜어서 주셨다. 엄마는 "아니야 아니야" 하셨지만 주신 전을 가지고 저녁에는 정말 맛있게 먹었다. 우리는 "엄마 내년에는 전 하지 말고 그냥 쉬면 안 될까?" 하고 이야기하면 엄마는 "놀면 너 과자는 누가 사주니?" 하며 웃으셨다.

허리도 다리도 무거운 엄마는 티 한번 내지 않으시고 그렇게 7년을 하셨다.


할머니 댁을 가면 "어머니 저희 왔습니다" 하시며 전혀 일을 한 것을 티 내지 않으시고 또 그렇게 일을 하시고 난 그런 엄마를 보는 게 슬펐다. 그리고 가난한 우리 집이 싫었다. 다른 친척들은 우리 집처럼 일을 하고 오지 않겠지 하며 생각을 하니 더 슬펐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난했던 우리 집의 선택지는 엄마의 선택이 그리 나쁘지 않았으니까. 엄마는 이 7년의 세월을 이후 이렇게 회고하셨다.


"힘들었지, 그래서 피하고 싶었고 도망가고 싶었지. 하지만 난 엄마니까 그리고 가족을 지켜야 하니까. 아빠는 아빠의 방식으로 난 나의 방식으로. 할머니께 배운 음식으로 그렇게 써먹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후회는 없단다. 그렇게 산 세월에서 난 돈을 더 소중하게 쓸 수 있었고 너희들이 웃어줘서 고마웠고 이제는 과거니까 그리고 지금은 그때를 웃으며 말하니 현재는 행복하잖니"라고 

가슴이 아프다. 그래서 난 추석이 다가오면 가슴 한편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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