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접 Sep 15. 2022

소설 <파친코>

일단 <파친코>를 쓰게 된 배경은 먼저 드라마를 봤습니다. 하지만 전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왔다 갔다 하면서 이야기를 하는 내용에 집중을 할 수 없어서 결국은 원본을 찾아서 읽어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어렵게 영어판을 읽었습니다. 일단 영어판을 읽은 이유는 전 그렇습니다. 원작에 대한 기본적 고찰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잠깐 제 대학 때의 일화를 이야기해야겠습니다. 제가  대학 2학년 때 복수전공을 신청하고 신문방송학과를 같이 듣게 된 친구가 영문과 친구였는데 이 친구도 문학을 엄청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친구와 이야기하다가 어떻게 친하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남자 학우였는데 꽤 섬세하고 문학에 대한 열정도 있었고, 그래서 저도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를 하며 시간이 흘렀는데 어느 날 제가 이 친구를 기다린다고 < 샤를 피에르 보를레르 , 악의 꽃>을 읽고 있었습니다. 한참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 자리에 앉더니 제 첵을 훅 하고 가져가더군요. 전 너무 어이가 없어서 "야 뭐야?"

하고 봤죠. 


친구는 "넌 문학을 한다는 애가, 원본을 봐야지. 뭐냐?"라고 하며 면박을 줬습니다.

그러면서 이어진 이야기는 "원작을 보고 네 생각을 정리하고 그다음 번역본을 보고 정리하고 그러는 게 예의 아닐까?"


전 화가 나서 "야 그러면 영어 불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다 해야 해!!"라고 쏘아붙였죠.

그런데 이 친구는 "하면 되는 거지, 나이도 젊은데 왜 못해!!"

오기가 나서 "알았어" 저도 모르게 질렀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전 불어를 시작으로 외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추 꽤 이해를 할 수 있어서  원본을 교보문고에 신청해서 읽었는데 정말 신세계였습니다.


전 친구에게 "나와 밥 사줄게" 친구는 싱글벙글 웃으며 "야, 좋지" 자신의 의견에 자신만만했습니다. 전 "좋은데 힘들더라" 솔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친구는 "난 예전부터 원본 보고 책을 읽어서 번역본은 잘 안 봐, 너 정도라면 할 것 같아서 불 좀 질렀다" 그렇게 우리는 사이좋게 대낮부터 동동주에 파전을 먹으며 문학에 대해서 솔직한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때부터 전 무조건 원본을 보는 습관을 가졌고 독일어 일어 불어 이탈리아어 등 가리지 않고 찾아가며 공부를 하는 심경으로 문학을 읽었고 그 덕분에 전 좀 더 제가 먼저 해석을 하고 상상력을 통해서 작품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연락하는 이 친구에게는 정말 고맙습니다.


이번 <파친코>는 먼저 영문으로 보고 번역본을 보고 쓴 글입니다.


1. 작가에게 빚을 졌다.

전 이 작품을 보면서 작가에게 빚을 졌다는 표현을 쓰고 싶습니다. 한국 작가가 한. 일 작품을 쓴 작품은 있습니다. 그리고 한. 일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분노와 애환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좌표에 한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닌 재일 조선인의 삶을 4대의 삶을 그려 낸 이 소설에서 전 작가에게 큰 빚을 졌다는 맘을 크게 가졌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작품이 대하소설이라고 적었던데 전 대하소설은 아니고 이 작품을 보면서 스친 작품이 있었는데 작가 김영하 <검은 꽃>이었습니다. 탄탄한 스토리에 모든 인물이 주인공이라 이런 작품이라면 12권이 아니라도 역사를 담을 수 있겠다,라고 처음으로 생각한 책입니다.


이 책도 1.2 나눠져 있는데 작가는 이 책에서 나오는 모든 인물들에게 의무와 책임을 줬으며 당위성을 줬습니다. 독자로 하여금 왜 그들이 그곳에 있어야 했으며 결과를 품고 살아야 했는지를 확실하게 환기시켜주었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작가는 묻습니다. 


이 작품에서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습니까? 어떤 삶을 살았겠습니까? 작가는 묻는 질문에 한참 생각을 했습니다. 아직 근사한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작가에게 빚을 졌다는 것은 어느 쪽에도 감정을 싫지 않고 객관적으로 쓰려고 했던 노력 그리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 작가에게 전 빚을 졌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출간까지 30년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작가는 말합니다. 그래서 더 냉정하게 볼 수 있었고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객관적으로 쓸 수 있었다고 전 생각합니다.


2. 왜 파친코였을까?

전 정말 많이 궁금했습니다. 직업이 정말 다양한데 왜 파친코를 선택했을까?. 우리나라에서는 파친코는 그리 선호하는 직업이 아닙니다. 그냥 일종의 스포츠 혹은 즐기는 문화인데 오래 가면 중독이라는 단어로 쓰이죠. 그래서 왜 파친코를 제목으로 했을까?. 


소설이든 시든 제목이 내용을 다 말해 준다고 합니다. 그럼 작가는 파친코에 대한 시선이 무엇이었을까? 이 숙제를 든 순간 전 책을 두 번 읽어야 했습니다. 처음 읽었을 때는 파친코는 자본주의 상징이었고 두 번째는 조선인이 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경지였습니다. 세 번째는 여자와 남자가 같이 있을 수 있는 환락과 쾌락의 상징성이 이었습니다.


두 번째 읽었을 때 파친코는 능동이 아니라 수동이었습니다, 일본을 선택했고 미국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한탕을 꿈꾸는 환상을 만들어 주는 수동적인 산물이 파친코라는 산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한수라는 사람은 조선인이지만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으로 살아갑니다. 직업이 처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알고 보면 야쿠자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결국은 파친코죠. 그래서 전 생각을 했습니다. 양날의 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 왜 선자는 부산 사람이었을까?

선자는 왜 부산 사람이었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역주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 묘사된 선자는 매우 현명한 사람입니다. 먼저 만난 남자는 어렸을 때 처음으로 사랑했던 남자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는 일본에서 먼저 결혼한 유부남이었죠. 그 이후 이 여자는 목사와 결혼합니다. 그리고 목사와 사이에 또 아이를 갖지요. 


선자에게 부산은 어떤 공간이었을까? 제가 예전 책에서 읽었을 때 작가들에게 공간 즉 고향은 어떤 의미인가를 본 적이 있는데 선자가 이 작품에 주인공이니 부산은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했을 때 고향이기도 하지만 애증의 공간이었을 것 같습니다. 주인공 선자는 힘들 때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유부남의 아이를 가져서 떠나야 했던 공간이었으니 애증의 공간이었겠지요. 


결국 목사를 따라 일본으로 떠나지만 일본에서의 주인공 선자는 결국은 한국인이었습니다. 김치를 팔아서 먹고살았으니까요. 


4. 왜 주인공의 두 아들은 같은 길을 갈까?

선자는 아들 둘 , 노아와 모자수가 있습니다. 유부남의 아들인 노아는 머리가 똑똑하고 일본인 아이들보다 공부를 잘합니다. 그리고 모자수는 목사의 남편을 닮아 역시 공부를 잘하나 형보다는 똑똑하지는 않으나 성실합니다. 둘의 공통점은 매우 성실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점이라면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입니다.


노아는 자신이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를 아는 아이이고 모자수의 경우는 지극히 엄마를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처음 가는 길은 달랐습니다. 하지만 이 둘은 결국은 파친코 사업을 하고 노아의 경우는 엄마와 연락도 끊고 살아갑니다. 와세다대학을 다닌 노아는 자신의 양아버지가 야쿠자라는 사실을 알고 빚을 갚겠다고 하고 대학을 중태하고 일을 시작하고 모자수는 열심히 일을 해서 주인의 눈에 들어서 파친코 사업장을 맡게 됩니다. 정말 이런 우연이 얼마나 있을까요?


전 그래서 작가가 왜 파친코를 제목으로 했는지 또다시 궁금했습니다. 그 당시 조선인이 가질 수 있는 직업, 그러니까 돈을 만지며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직업이지만 검은돈을 가장 합법화할 수 있는 게 파친코였다면 일본의 자본주의를 한마디로 파친코라고 불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5. 최종 후기.

파친코는 제가 읽은 최근의 작품 중 두 번 읽은 작품입니다. 작가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왜 한국인의 이야기를 쓰나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한국인 이야기를 쓰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가 매력적이기 때문이라고. 내게 '한국인'은 지적으로나 감성적으로나 깊이 있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가치가 있는 이들이다.

온갖 놀라 운 상황들을 견디며 분투해왔기 때문이다.

나는 가능한 한 오래 한국인 이야기를 쓰고 싶다.

- 작가의 말-


전 순자라는 이 조선인 여성의 끈질기고 열정적인 삶에 눈물이 났습니다. 이 여성이 조선인의 모든 것을 대변했다고 전 생각합니다. 일본어도 모르는 여자가 시장 한가운데서 김치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려고 끈질긴 여정을 하며 자신의 어머니가 그랬듯 , 어머니의 모습을 본받아 아이들을 먹이며 살피는 여자의 분투적인 삶이란 그 시절 파란만장했던 일제강점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줘서 끝내는 이겨내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신문방송학에서 방송학 교수님은 우리나라 영화에 가장 아킬레스건은 모성애라는 말을 하신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어떤 영화를 찍어도 모성애는 우리나라에서 절대 건드릴 수 없는 한계와 영역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흑백 필름일 때를 가정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전 이 소설에서 나오는 선자도 아들만 바라보고 삽니다. 소설에서도 "난 자식만 보고 살았다"라고 나옵니다. 지극히 한국인 부모입니다. 그래서 그 삶이 어려워도 이겨내고 살아갑니다. 


선자는 단순히 한 개인의 삶을 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절을 관통하는 모든 조선인들의 삶을 보고 있다고 전 생각합니다. 


작가의 말처럼 한국은 다이내믹합니다. 그리고 안 쓸 이유가 없죠. 한국인의 정서는 분명 다른 동남아시아의 감성과는 차이가 분명하게 있습니다. 그걸 우리는 혼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걸 작가는 혼을 담아 쓴 것 같습니다.

시간이 있으신 분들은 읽어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소설은 작가가 코드를 숨겨 놓아서 독자가 찾아가도록 설정하는 경우가 있고 아예 찾지 못하고 다시 읽어봐도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건 작가의 특징일 수 있고 의도일 수 있습니다. 파친코는 그런 코드는 없었습니다. 적어도 제 경우에는 , 그래서 아주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작가 김연수와 비슷한 코드 방식으로 글을 썼다고 생각했습니다. 작가 김연수의 소설은 코드를 숨기거나 적어도 보물 찾기를 해서 암호를 만들어 독자가 찾아가야 하는 소설 방식을 하지 않아서 친절한 안내서 소설을 써서 독자는 편한 편입니다. 대신 작가는 그 내러티브를 이끌어가야 하니 힘들겠지요. 설명서나 안내서는 매우 깔끔해야 하며 논리 정연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김연수는 절대 소설에서 감정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각각의 주연들이.^^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 말모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