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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접 Nov 16. 2022

테러 시대의 철학 /하버마스 데리다와의 대화.

이 책을 구매한 건 꽤 오래전이다. 최근 가을을 맞이하여 대청소를 하고 다시 읽고 싶은 책에 이 책을 선정하고 교통편을 이용하면서 다시 읽었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9.11 테러에 이 책이 나왔고 보기 드물게 하버마스와 데리다라는 거물의 철학인이 이 시대에 주는 메시지를 대담 형식으로 풀어냈다.


일단 우리가 알고 있는 하버마스는 공공의 장의 영역에서 사회 커뮤니케이션에서 개인의 공적 자유성을 강조하는 철학자이며 데리다는 헤겔 이후 철저하게 해체론 자이다. 그러기에 테러라는 글자와 시대 그리고 개인과 국가의 밀접한 연관성에 대해서 의견 차이가 있었다.

대담자는 피에트로 보라도리이다. 


이 글에서는 그것을 중심으로 내용 요약을 하려고 한다.


하버마스부터 시작하겠다.

1. 하버마스.

하버마스는 9.11 테러가 지난 몇 주 후 뉴욕을 방문했다. 그리고 간접 직접적으로 사태를 몸으로 체감했다. 그리고 그는 1인칭과 3인칭으로 나누어 설명을 했다. 하버마스는 걸프전에서 공적인 의견을 개진한 적이 있다. 결론을 영향사라는 개념으로 결론을 내렸다. 영향사는 독일의 철학자 가다머가 처음으로 이론적으로 체계화를 시킨 것인데 과거 사건에 대한 해석자는 이 사건을 평가함에 있어서 자기 자신이 속한 현재의 영향에 의해서 조건 지어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하버마스는 다른 정치평론가들과는 많이 다르다. 테러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외국인에 대한 불신을 낳았으며 유럽 공동체가 제일 먼저 무조건적으로 지지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낳았다. 이것은 정치적. 윤리적 영향력에 하버마스의 접근법과는 다르다. 하버마스는 합리적 논증을 강조하는 철학자이다. 


하버마스는 테러는 의사소통의 불안정의 원인이 문화적인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것에 있다고 지적한다. 이것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서양이 연합하여 두 개의 전선에서 작업을 해야 한다. 하나는 서양의 자기 표상 또 하나는 개발도상국들이 서양 국가들의 해외 정책을 금융 시장의 확대를 추구하는 제국주의적 전선으로 인식하는 것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 하버마스는 소비주의의 폭발적인 정신적 반항이 결국은 침묵과 단념으로 이루어져 생활의 영역이 공적인 영역이 되어 종교의 근본주의나 국가의 행정이 위협을 받으므로 전략적 의사소통의 행위의 차이는 틀어지고 반사회적 행위도 용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하버마스에게 테러리즘은 공적인 영역이다. 그는 민족주의 문제라고 보고 있다. 오늘날 성전에 참여하는 전사들은 과거에는 세속적인 민족주의자 들이었다. 그 전사들은 이란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하여 어쩌면 파키스탄까지도 포함되는 민족주의적인 권위주의적 정권들에 대해 실망했으며 이로 인해서 종교는 그들에게 세속적인 정치적 동기보다 더 많은 주관적 확신을 주게 되었다. 그렇지만 객관적으로 본다면 테러리즘은 정치적으로 현실주의적 목표를 가질 때만 정치적으로 내용을 확보할 수 있다. 


하버마스는 테러를 세 가지 영역으로 구분했다. 게릴라 전쟁. 준 구사적인 겔라라 전쟁. 전 지구적인 테러 행위. 9.11을 세 번째 전 지구적인 테러행위로 보았고 파르틴잔의 형태로 보고 하버마스는 민주적인 정부의 정당성을 훼손하였다고 보고서 테러는 정당성 문제에 공적영역 변형이라는 문제로 이끈다. 


결국 하버마스는 공적인 영역에서의 소통의 문제로 보고 후설의 현상학으로 발전시킨다. 

마지막으로 보라도리는 하버마스에게 질문을 던진다.

"테러행위는 일상적인 범죄나 다른 유형의 폭력과 구분되어야 합니까?"

하버마스: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테러 행위가 발생한 동기나 상황과는 다른 상관없이 테러 행위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타인을 살인하거나 괴롭히는 행위를 인정해주기 위한 정당한 근거는 결코 없습니다. 그렇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테러 행위는 형사 법원의 판결과 관련되어 있는 범죄 행위와는 다른 범주로 분류됩니다. 공적인 부분이죠. 9.11은 정치적 전쟁입니다. 


2. 데리다.

9.11이라고 부르는 숫자의 효과에 대해서 그는 일단 선을 그었다. 역시 해체주의자다. 사건을 호명하는 것은 단지 경제적 필요나 수사적 필요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알아보거나 재인식하지 못한다는 것 심지어 인지하지 도 못한다는 것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을 인지함으로 우리는 최초 효과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는 사건에 날짜를 기입하는 이 행위에 이 현상을 반복 강박을 신중하게 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숫자를 반복해서 기억하거나  언어와 개념이 스스로의 한계를 발견하게 되는 그 지점에서 이해를 다시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일차적 효과이다. 데리다는 숫자로 사건을 기억하는 것은 공간이 비어 있기 때문에 사건이라는 단어를 붙이기 힘들다고 말한다. 


데리다는 테러를 리바리던 홉스의 두려움 공포 그리고 벤야민의 국가가 바로 위협을 통해서 폭력에 대한 독점을 전유하는 경향을 빗대어 설명한다. 모든 공포의 경험이 비록 젠더 성별을 지난다 하더라도 반드시 테러 행위에서 비롯된 효과는 아니지 않냐고 묻는다, 하지만 테러리즘은 프랑스 혁명기 공포정치에 준거에서 유래한다. 만약 테러리즘에 대한 현행이 국내법이나 국제법의 위반을 다루면서 인간의 생명에 대한 범죄를 준거로 삼을 경우 여기에는 언제나 민간인과 군인의 구별이 함축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세계 모든 테러리스트들은 국가 테러리즘에 대해서 자기 방어기제라고 정의를 내리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9.11에 중국 상하이에 있었으며 추락사를 보고서 대사건임을 눈치챘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정의를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말한다. 데리다에게 9.11은 지정학적 시나리오가 신학적 영감을 주었으며 두 정치적 존재로 이루어진다. 미국의 선전포고 그리고 세속화된 정치적 중재자, 유럽 중심주의와 반유럽 중심 주의자의 양자택일. 그것은 계몽주의를 실현하여 용서라는 도구를 통해 억압의 악순환을 면하자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보라도리는 데리다에게 종교가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대해서 물어본다.

데리다: 전쟁이 없는 이상한 전쟁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가령 신이 미국을 축복할지어다,라고 언급을 하면 첫 번째로 내거는 가치는 무한한 정의는 이렇습니다. 이슬람과 적이 되는 것입니다. 세계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근복적으로 기독교적인 미국의 신앙 고백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듯이 말입니다. 저는 단순화하고 싶습니다. 신학-정치적 프로그램에서 벗어나는 출구가 될 유럽에서 답을 얻고 싶습니다. 바로 유럽에서 대가를 치르고 싶습니다. 그리고 확실하게 이야기합니다. 희생자들에 대한 어떤 속죄도 구원도 없는 대가. 그러나 이 과정에서 중요한 단계가 될 대가 말입니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때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평소 철학자들의 계보로 일었을때 분명 데리다는 제게 끝이었습니다. 모든걸 다 해체하니까요. 그런데 해겔은 변증법이니 다시 칸트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저의 서평은 극히 주관적으로 했으니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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