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크로댁 Jun 18. 2022

육아는 누구의 몫인가

차별에서 오는 서러움

 스물여덟, 이른 나이에 엄마가 되었다. 그것도 멀리 해외에서. 미국이나 프랑스 혹은 태국 같이 친숙하고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 아니라, 유럽의 어느 구석, 당시에는 이름도 생소하던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 나는 첫아들을 출산했다. 대사관 직원 가족을 포함한 한국인 거주자가 30여 명 되었을 시기였다. 십여 년 전의 크로아티아는 그렇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생소하기만 한 타국이었다. 거리에서는 그 흔한 중국인마저 찾아보기 힘들었다. 외국인에게 쉬이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폐쇄적이고 조용한 이곳에서 나는 스물여덟, 아직 뭘 잘 모르는 나이에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한국 식품은커녕, 아시아 식품을 파는 가게도 없던 시기였다. 자그레브 센터에는 유명하고 비싼 일식당이 하나, 중식당이 두어 개 정도 있었다. 임신 중 심한 입덧으로 고생했던 나는 구할 수 없는 한국 음식을 늘 그리워하며 지냈다. 임신 6개월 차, 22주에 39kg까지 몸무게가 빠졌던 내가 그나마 넘길 수 있던 음식은 오뚜기 크림수프와 팔도 비빔면 정도였다. 아마도 한국의 맛이 그리웠던 게 아닌가 싶다. 그나마 소포로 부칠 수 있었던 게 인스턴트식품이어서 난 늘 팔도 비빔면 혹은 메밀국수 라면을 달고 살았다. 인스턴트만 먹으면 안 된다는 걱정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살이 빠져서, 인스턴트만 먹는다는 걱정보다는 뭐라도 먹어서 다행이라고 여겼었다. 그렇게 외롭고 힘든 임신기간을 보냈다. 


 우리 부모님은 유난히 금실이 좋으셔서, 동네에서 불륜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었다. 우리가 중고등 학생일 적에 늦게 귀가하는 우리를 기다리며 두 분이서 동네 카페로 자주 데이트 나가셨던 게 화근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카페에 가시면 마주 앉으시는 게 아니고 나란히 앉으셔서 대화하시는데, 우리에게는 당연하던 일이 남들이 보기에는 유난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어느 날 옆 집 아주머니가 깔깔대며 이야기해주시더란다. 그렇게 두 분은 우리에게 늘, 주말 부부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나중에 너희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도 아이들을 봐줄 수 없다고, 너희 애들은 네가 키우라고 단호히 못 밖으셨더랬다. 그렇게 커 온 나는, 당연히 내 아이는 내가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산후조리를 해주시고 떠나시는 엄마를 공항에서 보내고, 50일 된 아가를 껴안고 막막함에 엉엉 울었더랬다. 이 작고 소중한, 하지만 더없이 겁나는 이 생명체와 어떻게 둘이 지내지? 너무나 무섭고 막막하던 기억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있다. 


 그렇게 아들 둘을 우리 부부 둘이서 고군분투하며 키워냈다. 신랑이 회사만 다니던 시절에는 그나마 나았다. 둘째가 세 살 되던 해, 한식당을 열면서 우리의 헬게이트는 열렸다. 그 시기에는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버텨냈던 건지 지금 다시 되돌아보아도 불가사의하다는 생각만 든다. 모르면 무식하다고, 그렇게 힘들 줄 몰랐기에 무식하게 버텨냈던 거인 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몇 가지 마음에 맺힌 기억들이 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순간들도 많다. 베이비시터는 돈도 많이 들지만 무엇보다 변수가 많다는 것이 큰 스트레스이다. 나는 정말 지금 당장 나가야 하는데, 와야 하는 시터가 오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며 연락을 하면, 아파서 못 온다는 태평한 말들을 한다. 수소문해서 아는 이의 동생이 겨우 오기로 했는데, 웬걸, 키가 2미터쯤 되는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왔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6살 4살 아이를 맡기고 가야 하는 그 심정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우선 급하니까 문을 닫고 나오면서, 내가 우리 애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과연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지 수많은 생각이 드는 그 순간의 절망감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래도 그렇게 사람이 구해지기라도 하면 다행이었다. 결국엔 펑크가 나서 두 아들들을 데리고 가게로 가거나 내가 결국 못 나가는 일도 다반사였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던 시절이었다. 애들은 왜 그렇게 자주 아픈지. 아픈 아이를 두고 나갈 수 없어 일이 엉망진창이 되기도 하고, 때론 아픈 아이를 두고 나가는 내 모습에 끝이 보이지 않는 회한과 절망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부부싸움이 시작되는 일도 다반사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도, 그때의 신랑도 꼭 안아주고 울어주고 싶을 정도로 짠하고 가엽다. 하지만, 그때의 우리는 서로가 지치고 힘들어 상대의 마음은커녕 내 마음이 어떤지 들여다볼 기력도,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생활을 멈출 수도 없어서, 펑크 난 타이어를 억지로 덧데며 겨우겨우 굴러가던 시간들이었다.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러던 중에 동생이 아이를 낳았고, 주말 부부는 죽어도 못한다던 엄마가, 아이는 절대 봐줄 수 없다던 엄마가 서울 동생집으로 가서 아이를 봐주시기 시작했다. 물론 시터 이모가 있으셨지만, 아이만 두기 불안하다는 이유로 엄마가 동생 집으로 가서 살기 시작하셨다. 아빠는 대전에서 홀로 회사를 다니시면서. 불쑥, 서운한 마음이 올라왔다. 그래도 거리가 거리인지라, 나는 어지간히 애들을 키워 놓았을 때라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정말 서운한 순간이 찾아왔다.


 동생 아이가 두 돌이 되어갈 때쯤, 내가 엄마에게 와서 두어 달만 계시면서 나랑 좀 지내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그때의 나는 정말 터질 것 같이 머릿속과 마음속이 포화상태였다. 그냥, 아무런 거리낌 없이 대화를 나눌 상대가 너무나 필요했다. 누구라도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일도, 가정도, 육아도 모두 너무나 힘들었다. 그런데, 엄마가 대답했다. 

"안돼~ 그럼 네 동생 둘째는 누가 보라고, 애 봐줘야지."

아직도 저 말이 잊히지가 않는다. 차별이 주는 서러움은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여전히 차별은 현재 진행형이다. 우리 둘째 수술 때문에 한국으로 들어갔을 때에도, 우리 애들이, 내가 우선순위였던 적은 없었다. 큰 애가 한국 나이로 13살이 되도록 단 한 번도 애들을 봐주신다고 오신 적은 없다. 한국에서 식구가 오면 늘, 휴가를 내고 가장 좋은 곳으로 모시고 다니는 게 당연한 우리와는 달리 내가 한국으로 가면 바쁜 동생 부부 시간에 맞추는 건 당연한 일이다. 크로아티아에 한 달 두 달 놀러는 오시지만, 그것도 이제는 동생네 애들 봐주셔야 하기에 시간을 겨우 맞추신다. 나는 한국에 머물러봐야 고작 열흘 남짓인데 몇 년에 한 번 단 며칠을 우리가 우선순위가 되지 않는다. 


 당연해지는 순간이 있다. 아마 잘 모르실 거다. 그냥 그렇게 당연한 일이 되어 버렸다. 얼마 전, 한국에서 일이 떠오른다. 서울 이모네 집으로 가는 길, 엄마가 동생 부부가 어떻게 애 둘을 차에 태우고 먼 길을 가냐며, 한 명은 우리 차로 데려와야 한다고 하시는 거다. 애 엄마 아빠가 두 시간 거리를 자기 애들을 데리고 못 간다고? 왜? 불현듯 떠올랐다. 50일 된 둘째와 두 돌이 갓 지난 첫째를 데리고 혼자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왔던 내 모습이. 동생 결혼식이라고 애 낳은 지 두 달도 안 된 산모가 애 둘을 데리고 비행기를 타고 갔었는데. 이래서 당연해지면 안 되는 거다. 내 일이 아니면, 잘 모르게 된다. 지나간 일은 그렇게 잊히는 거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