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주(犬主)라는 타이틀의 무거움
어제저녁과 오늘 아침 연달아 뉴스에서 불편한 기사를 접했다. 어제저녁 뉴스의 내용은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자 밖으로 도는 사람들이 키우던 개를 버리기 시작해 그 수가 2년 전에 비해 3배 이상 늘었다는 내용이었고, 오늘 아침 인터넷에서 본 기사는 목줄 풀린 진도 믹스견이 8살 아이의 목을 물어뜯었다는 처참한 내용이었다. 반려견에 대한 너무나도 상반된 기사들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반려견이라는 말보다는 애완견이라는 말로 키우던 강아지를 칭했었다. 애완견, 좋아하여 가까이 두고 귀여워하며 키우는 개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좋지 않고 귀엽지 않으면 키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냐며 반발하여 새로이 등장한 말이 반려견이었다. 내 인생을 함께 하는 동반자로서의 개라는 뜻으로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생명체의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 그렇게 부르는 말을 바꾸면, 우리의 인식도 바뀌리라는 기대감과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나는, 예전에 말 듣지 않는 개를 한 대씩 쥐어박고, 돌돌 만 신문지로 매질을 하던 어르신들이 과연 지금 내 아들, 딸이라고 칭하며 어화둥둥 유기농 식단을 만들어 먹이는 유난스러운 젊은 견주들보다 나쁜 주인 들이었던 건지 의문이 든다. 먹다 남긴 짬밥을 주고 사고를 치면 신문지로 한 대씩 쥐어박던 소위 '애완견'을 기르던 사람들이 과연 무식하고 나쁜 견주였을까?
스무 살 처음으로 충무로 역에서 내려 약속한 대한 극장으로 가는 길에 보았던 수많은 애견 샾을 아직도 기억한다. 작고 예쁜 하얗고 까만 강아지들이 유리문 앞 철창에 갇혀 조르륵 진열되어 있었다. 그 당시의 나는 그저 작고 예쁜 강아지에 눈이 팔려서 너무 귀엽다고, 강아지가 키우고 싶으면 이런데 와서 사면되는 거구나 했더랬다. 귀엽다는 생각 외에는 별다른 생각을 한 기억이 없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하고, 크로아티아에서 신랑이 강아지가 키우고 싶다고 했을 때, 내가 무심코 내뱉은 말은 이거였다.
"크로아티아에서는 어디서 강아지를 사면 되나? 그 쇼핑몰에 있던 펫 샾에서는 햄스터랑 물고기만 팔던데. 더 큰 곳으로 가야 하나?"
지금 생각하면 정말 창피한 발언인데, 강아지는 커녕 햄스터 한 마리조차 키워 본 경험이 없던 나는 그야말로 생명체가 아닌, 그저 내가 귀여워할 인형 같은 애완견을 생각했던 거 같다. 미국에서 오래 살았던 신랑이 이렇게 대답했었다. "너 그런 말 하면 잡혀 가. 그리고 강아지를 사긴 뭘 사. 데려오는 거지. 우리가 입양하는 거야."
크로아티아는 -아마 대부분의 유럽에서는- 강아지를 분양받고 싶으면 분양을 원하는 견주와 미리 연락해서 새끼를 낳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좋은 혈통의 강아지인 경우, 가격이 매우 비싼 경우도 있지만 그냥 아는 이에게 무료로 분양받기도 한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자주 Dog show가 열리는데, 참가자도 많고 구경하는 사람도 많다. 말하자면 새로운 견주와 강아지의 미팅 장소랄까. 우리도 실제로 여기서 정말 마음에 드는 강아지를 보고 견주 연락처를 받아오기도 했다. 새끼를 낳는 시기도 표기되어 있다. 미리 예약해서 새끼를 낳으면 데려오는 식이다. 물론 직업적으로 혈통 있는 족보의 개들의 새끼를 상상 이상의 가격으로 분양해 팔면서 먹고사는 사람들도 있다. 뭐가 되었든 개인의 선택이지만, 개 공장처럼 새끼 생산을 위한 곳은 없다.
스무 살 보았던 주르륵 늘어선 펫 샾의 강아지들이 잊을 수 없는 기억과 함께, 얼마 전 또 하나의 인상적인 가게를 보았다. 올 초 한국에 갔었는데,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근처 백화점에 주차하고 나오는 길에 백화점 한 귀퉁이에서 유기농 개 간식 샾을 발견한 것이다.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가까이 다가갔더니, 전시되어 있던 알록달록 커다란 케이크 가격이 20만 원이나 했다. 우와. 사람 먹을 케이크도 그 돈 주고는 쉽게 못 살 텐데,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지만, 뭐 돈을 어떻게 어디에 쓰는 건 각자의 자유이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다 다르지 않은가.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길 수 있었는데, 뒤이어 발견한 중성화 수술과 짖음 방지 목줄 전단지를 보고 참 많은 생각이 들었더랬다. 사랑은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하는 건데, 과연 이 모든 것은 사랑하는 나의 개를 위함일까, 아니면 나의 만족을 위함일까?
한적한 바닷가 근처에서 모바일 하우스 리조트를 운영하시는 70대 할아버지 친구가 있다. 그 멋진 곳에서 도나라는 덩치 큰 셰퍼트 믹스견과 함께 지내시는데, 빈코는 이 도나를 끔찍하게 아껴서 매일 닭을 한 마리 삶아서 먹이신다. 우리는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가 빈코가 개를 잘 아는 신랑한테 도나가 자꾸 컹컹거리면서 기침을 한다고, 요즘 들어 거의 매일 그런다며 걱정을 했다. 그러다가 몸이 허한 거 같아 매일 닭을 삶아 먹이는데도 소용이 없다는 말에 신랑이 기겁을 했다. 개한테 삶은 닭뼈는 절대 안 된다며, 생닭 뼈는 괜찮아도 삶은 닭뼈는 잘 부러져서 목에 박힌다며 얼른 병원에 데려가라고 등 떠밀었다. 그 길로 병원에 다녀와 그날부터 도나는 닭 한마리 특식은 못하게 되었다. 때로 무지한 사랑은 상대방을 아프게도 한다. 나는 빈코의 모습에서 옛날 우리 어른들의 모습들의 모습을 보았다. 투박하지만 상대방을 위해 하는 행동, 다른 말로 사랑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요즈음은 방대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전문가로 산다. 그래서 요즈음 젊은 사람들은 옛 어르신들이 개를 대하는 태도나 먹이는 사료 등을 보고 기겁하지만, 그건 그대로 그 시대상이 아닌가 싶다. 요즈음 사람처럼 요란하게 이것저것 해주고 위하지는 않아도, 적어도 예전에는 키우던 개를 어디 멀리 버리고 오는 경우는 드물었으니까. 사람 먹다 남은 짬밥을 주고 마당 한편에 묶어 놓았을지언정 내 상황이 변해 키우기 힘들다고 버리는 경우가 이렇게 많지는 않았다. 반려견이 품종이나 외모가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았고. 과연 무엇을 위해 반려견을 키우는가.
해외에 나와 십수 년을 살다 보면, 간혹 한 발자국 떨어져 보다 보니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내가 한국사회 안에 있을 때는 나도 느끼지 못했던 것들, 나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불편한 사실들이나 혹은 미처 몰랐지만 한국이 외려 세계 어느 곳보다 뛰어나게 처리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나무가 아닌 숲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정말 독창적 문화 중 하나가 바로 한국 사회의 반려견 문화이다. 내가 아는 한 전 세계 어느 곳보다 유난스럽게 반려견 용품과 관련 사업들이 번창하는 곳인 동시에 너무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에 따른 책임과 도리에 대한 부분은 텅 비어있다.
우리 반려견 두브는 개 여권을 가지고 있다. 동물병원에 데려가면 반려견을 반드시 신고해야 하며, 말하자면 등록 후 받는 강아지 신분증인 셈이다. 이곳에 모든 필요한 정보가 기입이 되는데, 필수 접종을 언제 어디서 어느 약으로 했는지 등의 사항부터 심어진 칩 정보, 주인 정보 등이 들어간다. 강아지가 아파서 동물병원에 가도, 이것이 없으면 진료를 받을 수가 없다. 여권을 받으면서 칩은 자동으로 심어진다. 유럽은 자동차로 국경을 넘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에도 함께 가는 반려견의 여권이 없으면 통과되지 못한다. 이 절차나 서류 같은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보이지 않는 힘이 있어서, 이렇게 문서로 표기해 놓으면 없던 책임감도 생겨나기 마련이다.
옆 나라 독일은 반려견을 한 마리 입양하려면 무수히 많은 심사와 시험을 거쳐야 한다고 한다. 처음에 그렇게까지 유난일 필요가 있나 했었는데, 어제 접한 뉴스에서 버려지는 수많은 강아지들을 보고 차라리 유난스러운 입양 과정이 낫겠다 싶었다. 한쪽에서는 예쁜 강아지를 '생산'해 내고, 다른 쪽에서는 싫증 난 강아지를 유기하고, 또 반대편에서는 그런 강아지를 데려와 보살피고. 보살피다가 여력이 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안락사'를 맞이하고.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사이클일까 하는 생각에 허망한 마음이 들었다.
늘 얘기하지만 나는 애견인은 아니다. 우리 집에서 같이 살고 있는 우리 두브와도 그저 그런 데면데면한 사이이다. 한국 분이 키우시던 개를 넘겨받은 건데, 일 년 반되는 시간 동안 데리고 키우면서 등록도 안 하고, 예방접종도 하나도 하지 않았더랬다. 예뻐하는 것과 책임을 지는 것은 다르다는 걸 참 많이 느낀다. 다 큰 개를 데려가 검진하고 예방접종시키면서 마침 여권을 들고 간 내 이름 아래 두브를 등록시키면서 오묘한 감정이 들었었다. 내 이름 석자 아래 등록된 두브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영 탐탁지 않아했던 내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었었다. 이 하얀 녀석은 이제 내가 책임져야 하겠구나.라는 가볍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 동시에, 우리 식구구나 하는 사랑의 마음도 올라왔다. 서류 한 장에 나란히 쓰인 내 이름과 강아지 이름은 그렇게 우리를 가족으로 묶어주었다.
하루 걸러 하루 반려견에 대한 뉴스들이 쏟아진다. 목줄 풀어진 개가 아이를 물어 죽이는 끔찍한 사건사고일 때도 있고, 철창에 갇혀 평생을 새끼만 낳는 끔찍하고 가여운 개 공장의 실태일 때도 있다. 수없이 버려지는 유기견의 소식은 거의 날마다 들려온다. 주변의 거의 모든 지인들이 개 혹은 고양이를 키우는 이곳에서 나는 반려견을 개 유치원에 보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듣지 못했다. 반려동물을 위한 유기농 개 간식 가게를 본 적도 없다. 유난스러운 개 코스튬을 입힌 강아지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 게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무언가 빠져있다는 느낌이 든다. 도대체 무엇이 먼저일까? 최고의 것을 주기 전에 책임을 다 하는 일이 우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반려견 문화에 책임과 사랑은 빠지고 그저 '돈벌이' 수단이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그 자리를 먼저 꿰차고 앉았다. 이런 화려한 반려동물 문화가 성행하기 전에, 생명을 책임진다는 무겁고 중요한 사실이 먼저 환기되어야만 한다. 가족이지만 늘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는가. 견주, 개의 주인이라고. 주인은 주인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의식과 소명을 가져야 한다. 내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나를 보며 언제나 반겨주는 생명체를 책임지겠다고 한 이상, 그 책임이 얼마나 중요하고 무거운 것인지 늘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하루 빨리 제도적 보완이 이루어지길 바래본다. 그렇게 내일부터는 기분 좋은 뉴스만이 들리길 희망해본다. (犬主)犬主犬主犬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