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크로댁 Aug 09. 2022

내가 모르는 너의 순간들

모든 순간에 곁에 있어줬다고 생각했었는데,

 며칠 전부터 둘째가 나에게 '믈라스'를 만들어 달라고 졸랐다. 아침으로 해달라고. 믈라스가 뭐냐고 물어봐도 제대로 설명은 하지 못하고 줄곧, 킨더가든에서 아침으로 먹던 거라고만 한다. 무슨 색깔이냐고 물으니 하얀색에 위에 코코 파우더를 뿌려 먹는단다. 폴렌타?라고 물으니 폴렌타는 아닌데 비슷하단다. 아무리 인터넷에 뒤져도 나오지를 않고. 가끔 유아일 때 해주던 초콜리노 아니냐고 물었더니 아니란다. 그렇게 며칠을 실랑이하다 큰 애가 이름을 기억해냈다. '그리스 Gris', 영어로 세몰리나 Semolina 가루로 주로 파스타를 만드는 밀가루 종류이다. 나는 아가들이 이걸 오트밀 죽처럼 먹는지 몰랐는데, 여기서는 오트밀 죽 타 주듯이 세몰리나 가루로 만들어 주는 모양이었다. 왜 갑자기 그게 먹고 싶다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뭐가 먹고 싶다는 건지 알았으니 며칠 전 장 보면서 그리스를 사다가 오늘 아침에 해주었다. 하면서도 이게 맞는 건지, 유튜브를 찾아보면서 겨우 해줬다. 별로 어려울 것도 없이 끓는 물에 잘 풀어 죽처럼 쑤어주기만 하면 되는 건데, 내게 낯선 식재료를 다루는 데는 그 쉬운 과정도 그리 어렵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평평한 그릇에 달라고 디테일한 요청까지 하시는 분들ㅎ, 살짝 폴렌타 같은 식감의 몽글몽글한 작은 알갱이가 있는 밀가루 죽맛?ㅎ


 먼저 냄비에 물을 넣고 팔팔 끓인다. 풍미를 위해서 버터를 조금 넣으라는 조언도 있어서, 우리  버터 귀신들을 위해 버터를  조각 넣어 끓인 , 세몰리나 가루를 타서 뭉치지 않게  저어주기만 하면 되었다. 냄새를 맡아보니 우리나라 오뚜기 크림수프 같은 익숙한 냄새가 났다. 맛은 그냥 정말 밀가루  .  위에 코코 파우더를 솔솔 뿌려 달콤하게 잘도 먹었다. 먹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새삼  아이들이  없는 곳에서도 열심히 크고 있었구나, 하는 대견함이 밀려왔다. 엄마 없는 곳에서 이렇게 새로운 음식을  받아들이면서 나름의 자기 경험을 쌓으면서 살아온 꼬맹이들이구나. 꼬맹이들은 꼬맹이들만의 역사가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한국 나이로 11살 13살이니까 너 덧살 나이에 먹던 기억을 추억하며 내게 해달라고 요청한 것이었다. 마냥 어린것처럼 보여도 내가 모르는 자기 나름의 추억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새롭게 다가왔다. 요 녀석들의 유아기에는 내가 모든 순간에 함께 해주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나의 오만한 생각이었다는 반성이 들었다. 한 명의 인간을, 사람을 키워낸다는 거는 참으로 신비하고 위대한 여정이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밀려왔다. 나는 엄마로서 나의 개인적인 자아는 내려놓고 온 힘을 다해 키웠지만, 그래서 나의 희생으로 이 아이들을 키워냈다고 생각했지만, 이 아이들은 이 아이들 나름대로 자신의 인생을 고군분투하며 살아내 온 것이었다. 그런 서로의 노력과 사랑이 한 사람을 온전한 사회적 인간으로 길러내는 것이리라. 비단 엄마와 아이 자신 뿐이겠는가. 유치원에서 이 세몰리나를 준비해주시던 식당 이모님부터 유치원 선생님에 이르기까지 수없는 사람의 관심과 사랑으로 이만큼 자라난 거구나, 해서 감사하고 경이로운 마음이 들었다. 별 거 아닌 세몰리나 죽 한 그릇에 수많은 생각이 오가는 아침이었다고나 할까.


 새삼 몇 년 전 큰 애 혼자 스키 캠프를 갔었는데 혼자 이런 활동을 다닐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게 또 절절한 마음이 들어 인스타에 남겼던 글이 있는데 문득 생각이 났다. 다시 찾아 읽었더니 몇 년 전 조금 더 어렸던 나의 마음이 와닿아서 다시 꺼내어 본다. 엄마가 된다는 건 참 경이로운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 아침이랄까. 늘 새로운 감정이 든다는 게 참으로 신기하고 감사하다. 작은 것 하나에 오가는 많은 이야기와 추억들이 있는 충만한 인생이라는 생각에 문득, 감사한 마음이 든다.








너의 첫 스키캠프,

.

나는 아직도 너의 첫, 어떤 처음의 그 경험들에 설레고 눈물이 난다. 아직도 생생한 너의 첫 소풍. 네가 입은 옷, 양말, 너의 사뭇 긴장하고 들뜬 그 표정까지도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어느새 훌쩍 커서 스키를 배우러 간다고 들뜬 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벅차기도 뭔가 울컥하기도 알 수 없는 감정들의 소용돌이에 하루 종일 일이 잡히지가 않는다.

하나씩 하나씩 뒤켠으로 멀어져 가는 너의 그 모든 처음들이, 네가 너도 모르는 새 만들어가는 너의 역사인 것 같아서, 너도 모르는 새 헤쳐나가는 너만의 인생인 것 같아서. 나는 그냥 마음이 찌르르하기만 하다.

내가 함께 했던 너의 그 모든 처음의 시간들. 뒤집기, 첫 이유식, 첫니, 첫걸음... 그 시간들의 힘이 모아져서 이제 네 스스로 그 모든 처음의 것들을 해나가는 너를 보면서.. 뿌듯하기도, 대견스럽기도, 고맙기도 하면서 서운하기도 하다..

.

지금도 너는 네 생애 첫 스키를 너 혼자 고군분투하면서 너만의 시간 속에서 너만의 무언가로 쌓아가고 있겠지. 그 시간들이 즐겁기도 힘겹기도 버겁기도 하겠지만 그건 정말 오롯이 네가 헤쳐나가야 하는 네 몫이겠지.

.

.

엄마가 경험했던 그 모든 처음의 그 모든 순간들처럼, 너희들도 모두 그 처음을 맞닥뜨리고 넘어가야 하겠지. 엄마는 여덟 살 첫 스키캠프가 너무 힘들어서 엉엉 울었는데, 네가 어떤 얼굴로 들어올지 너무 설렌다. 그 어떤 얼굴이어도 나는 네가 너무 자랑스러울 것 같아..

.

사랑하는 아들아,

이제 나는 점점 네가 겪을 그 모든 처음들에 대해 모르는 게 더 많겠지? 우리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아직은 너의 그 모든 처음의 순간들에 내가 말 걸어 줄 수 있고, 그 길에@너를 꼭 안아줄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

.

설렌 얼굴로 벌떡 일어나던 너의 얼굴이 선하다. 상기된 얼굴로 들어올 너의 얼굴에 설렌다. 너의 처음이 나의 새로운 처음이 되어 고맙다. 너무나 설레는 새로운 즐거움이다..

.

덤덤하게 뒤로 물러나 너의 모든 처음을 말없이 응원할 거야. 엄마는 유난스럽게 표현이 짙고 넘쳐흐르는 사람이니까 신경 써서 그렇지 않도록 덤덤하도록 노력할 거야. 그 모든 순간들을 네가 무던하게 헤쳐갈 수 있도록, 뒤에는 든든하게 서 있으나 그 모든 것이 너의 일임을 그렇게 하도록 노력할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설레는 마음은 여기에 적어둔다..

훗날, 네가 결혼할 즈음,

엄마는 네 덕분에 이렇게나 행복하고 설렜었다고.

그래서 너무 고마웠다고.

우리 아들도 그렇게 행복하게 살라고.

결혼은, 아이는, 가족은 그렇게 너무나 축복이라고 말해주려고 남기는 거야..

.

처음으로 엄마 아빠 품을 떠나 무언가를 배우러 간 너에게 무한한 마음의 응원을 보낸다.

사랑한다 내 아들.

고맙다, 신나게 살아줘서. :)





작가의 이전글 유기농 개 간식과 삶은 닭 한 마리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