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전에 강아지 사진을 보자

인간이 준 상처를 동물에게 치유받는 편

by 오채아

[막상 사직서를 내려하니 섭섭은 무슨 그냥 시원했다]


퇴사는 예고 없이 찾아오지 않는다. 분명 내 몸은 입사 후 퇴사를 직감했다. 하지만 꽁꽁 얼어붙은 취업시장에 한 마리 고양이가 될 수 없었다. 고양이는 귀여워서 누가 데려가 주기라도 하지 나 같은 인간이 귀엽다고 갈 만한 직장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고민으로 몇 년 같은 몇 개월이 흘렀다. 나의 다사다난한 직장 생활의 끝은 참 짧기도 하지

'요즘 애들은 너무 빨리 그만둔다'의지박약 하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 버텼던 짧지만 강렬한 시간이었다.


퇴사를 고민할 때마다 나는 강아지 사진을 꺼내 본다. 책상 서랍 안, 휴대폰 앨범 깊숙한 곳에 저장된 그 작은 존재는 매일 무너지는 마음을 다시 세우는 힘이 됐다. 직장에서 부당한 일을 겪을 때마다, 속상하고 억울한 마음이 차오를 때마다 나는 조용히 그 사진을 꺼내 들고 숨을 돌렸다.


부모님께는 차마 말하지 못했던 상사와의 갈등도 있었다. “그만두고 싶다”는 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한 날들 속에서, 유일하게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존재는 강아지였다. 말이 필요 없는 위로, 조건 없는 응원. 그 눈을 보고 나면 복잡한 생각이 잠시 멈추고 마음이 조금씩 정리됐다.


회사에서 퇴사를 고민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강아지 사진을 한 번 꺼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것이 단지 귀여움에 웃는 행위가 아니라, 스스로의 감정을 점검하는 유일한 숨구멍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그 사진을 보며 다음 이직을 준비해도 좋다. 하지만 그럴 여유조차 없다면, 용기 있는 퇴사가 오히려 정신 건강을 지켜주는 유일한 선택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퇴사를 결심한 날, 가장 먼저 강아지를 보러 갔다. 회사 문을 나서기 전, 나를 가장 잘 아는 존재 앞에 서고 싶었다. 퇴사는 끝이 아니라 나를 회복하는 과정의 시작이었고, 그 시작 앞에서 내가 선택한 위로는 다름 아닌 내 강아지였다. 그 작고 따뜻한 존재로 인해 나는 무너지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사직서 제출 후 막막할 줄 알았던 겁쟁이 사회초년생은 예상과 달리 속 시원한 사이다 한 잔과 같은 후련함을 느낄 수 있었다.

퇴사자는 무책임하거나 실패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망가진 시스템과 관계 속에서도 버틸 만큼 버틴 사람이며, 더 나은 삶을 위해 스스로를 지키기로 결정한 사람이다. 무리하게 참는 것이 성실함이 아니고, 침묵이 곧 성장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너무 늦게 배운다. 때로는 그만두는 것이 책임감 있는 선택일 수 있다.

청년들에게 필요한 건 강아지 사진만이 아니다. 위로는 되지만 해결이 되지 않는다. 청년들이 조직의 구성원으로 1인분이라도 하길 원한다면 감정의 무게를 함께 들어줄 수 있는 ‘올바른 어른’이 더 많이 필요하다. 내가 겪은 현실을 기록하고 나누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내가 그런 어른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퇴사가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