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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덕 Jun 21. 2022

호텔 조식 그리고.. 내로남불


아침 드라마 한 편을 거뜬히 썼다.


회사 생활에서 온 긴장과 피로로 인해 휴식이 필요하다는 남편이 호캉스를 제안했다. 덥석 물었다. 주부에게 호캉스는 밥을 안 해도 된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넘치게 매력적이다. 휴가 때 취사도구가 있는 숙소를 예약하거나 캠핑을 계획한다면, 주부들은 바빠진다. 식재료들을 사고, 씻을 건 씻고, 양념할 것은 양념해서 싸가야만 식구들과 함께 신나게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음식 준비에 대한 부담감이 1도 없는 호캉스기에, 호텔로 향하는 내 발걸음이 한껏 설렜다. 저녁을 먹고 깨끗하게 정리된 침대에서 꿀잠도 자니 아침이 왔다. 대강 씻고 조식 먹으러 호텔 식당으로 내려갔다. 엄마와 딸, 친구들끼리, 부부와 어린 자녀 등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었다. 뛰지는 않았지만 잰걸음으로 가서 줄을 섰다.


'투숙객이 이렇게 많았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호텔 직원이 다가왔다. 고객이 많아서 식당 옆 카페에서도 식사를 할 수 있게 개방했으니 그쪽으로 안내해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음식을 가지러 식당까지 가는 게 번거로울 수도 있겠지만 기다리는 것보다 나을 듯해서 카페로 갔다.  


남편에게 빵을 갖다 달라고 부탁하고, 난 앉아서 커피를 주문했다. 호텔이라는 공간이 주는 럭셔리함에 왠지 나도 우아해 보여야 할 것만 같았다. 다리를 꼬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커피잔을 든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뻣뻣하고 어색하게 뻗어냈다. 남편은 여러 종류의 빵을 담은 접시를 테이블에 놓고 식당 쪽으로 다시 갔다.


이 얼마나 좋은가. 여유롭게 빵과 커피를 마시면서 사람들을 둘러봤다. 저쪽 끝에 있는 한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젊은 부부와 그들의 부모님으로 보이는 4명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시선에 껄끄럽게 걸리는 게 있다. 젊은 여자 혼자서만 식당과 카페를 왔다 갔다 하면서 음식 담긴 접시를 부지런히 나르고 있었다. 며느리인지 딸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머릿속에서 이미 그 여성은 시집살이에 고달픈 며느리였다. 앉아있는 그녀의 남편은 세상 싹수없는 나쁜 놈으로 등장다.


혼자 궁시렁거리고 있는데 남편이 세 번째 접시를 가지고 와서 앉았다. 난 몹시 흥분된 톤으로 고자질하듯이 말했다.

"저기 저 식구들 보이지? 세상에, 저 여자 혼자서 음식을 다 나르고 있어. 말이 돼? 저 남편 쉬퀴는 도대체 뭐 하는 거지? 와, 진짜 개념 없는 듯."


크게 한 입 깨문 빵을 우적우적 씹으면서 말하는 나에게 남편이 차분하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

"개념 없는 님아. 님이 그 쉬퀴임. 이거 다 내가 가지고 왔는데."


"........... 아 ........."


이런 내로남불이라니.

저쪽 테이블에붙박이장처럼 앉아 있는 젊은 남자나 이쪽 테이블에 엉덩이를 의자에 깊숙이 박고 앉아 있는 중년 아줌마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나에게는 한없이 관대했고 그 남자에 대해서는 비난했다. 게다가 그 한 장면만 보고 불쌍한 며느리를 주인공으로 하는 아침 드라마 한 편을 쓰는 우를 범했다. 심지어 나는 그들의 관계도 사연도 모른다. 내가 만든 조악하고 편협된 스토리 진행에 소름 끼치게 창피했다. 괜히 변명이랍시고 남편에게 이 상황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자꾸 덧붙였다.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찌질하고 볼품없는 말들이 내 귀에도 궁색하게 들렸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 서로를 비난하는 정치인들이 하는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나에게는 너그러우면서 남에게는 살벌한 잣대를 들이대는 을 내가 하다니.. 살아오면서 난 이렇게 의식하지 못한 채 숱한 내로남불을 저지른 건 아닐까. 이러쿵저러쿵 글자 수가 많아지고 있는 걸 보니 여전히 내가 한 내로남불에 핑계를 대고 싶은 모양이다.


무척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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