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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덕 Jul 20. 2022

볼링에 미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날이었다.

소파와 한 몸이 된 채 널브러져 있는 나에게 남편이 말했다.

"볼링 치러 갈까?"


물먹은 하마 같던 내 다리는 휘모리장단에 맞춰 춤을 추듯 여기저기로 쌩 다녔고, 천근만근이던 팔은 휘리릭 빠른 놀림으로 필요한 장비들을 모았다. 마지막으로 마스크를 현관에 서 있었다.

동그란 남편 눈이 똥그래졌다. 이제 막 양말 한 짝을 신은 남편. 난 준비 완료였다.


운동에 젬병인 내가 볼링에 미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일이다. 이게 얼마나 좋으냐면  밤새 신나게 볼링 경기를 하는 꿈을 꾼다. 분명 자면서 공을 들고 스윙하듯이 팔을 흔들거라는 의심을 해본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상하리만큼 팔이 뻐근할 때가 있다.


뭔가에 미치면 온통 그 생각만 하게 된다.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만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에서 '하나, 둘, 세엣, 넷.' 포(four) 스텝에 맞춰 걸으면서 팔을 앞뒤로 부드럽게 흔든다. 뒤늦게 밀려오는 창피함에 주위를 살피기도 하지만 그때뿐이다. 해가 지면 거실에 불을 켜고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서 연습한다. 500밀리 생수병을 손에 들고 스텝부터 팔로우 스윙까지.


처음엔 볼링이 이토록 매력적이지 않았다.

볼링 구력 30년이 넘는 남편과 함께, 부부가 같은 취미를 즐기는 아름다운 모습을 상상하면서 공을 들었다. 하지만 공은 무거웠고 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도 않았다. 친절하게 가르쳐 주던 남편은 급기야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사지가 따로 논다느니 발레를 하냐느니 라면서. 좀 주눅들었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을 이겨 보겠다는 오기가 발동했던 걸까. 아니면 어쩌다가 맛본 스트라이크의 알싸한 맛을 잊을 수가 없었던 걸까. "와장창창." 경쾌한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핀들이 내 스트레스까지 쓸고 갔다.


볼링 선수 조영선은 그의 유튜브 채널에서 "볼링의 3대 요소는 운, 재수, 아다리." 라며 우스개 소리를 한다. 초보인 나에게 3대 요소가 적용되는 날이면 하찮은 나의 실력에 가당치도 않은 고득점이 나온다. 그 짜릿함이라니. 계속 잘 칠 것만 같지만 볼링호락호락하게 점수를 내주지 않는다. 욕심이 생기는 순간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고 밸런스는 무너진다. 힘을 빼야 공이 잘 들어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게 그렇게 어렵다. 엉뚱한 방향으로 굴러가는 공을 보면서 '인생도 과한 욕심 버리고 힘 빼야 잘 굴러가는데..'라는 생각을 한다. 엄지 타이밍이 안 맞아서 공이 흐르거나 던져질 때는 "글치, 인생도 타이밍인데.." 중얼거린다. 이렇게 난 삶에 볼링을 입힌다. 제대로 미쳤다.


볼링에 관한 것은 어느 하나 재미없는 게 없다. 재미라는 것은 재미를 느끼는 대상 외에 모든 것을 시시하게 만들어 버리는 대단한 힘이 있나 보다. 볼링 치는 게 신나고 재미있어서 내가 습관적으로 매일 붙들고 있는 걱정과 불안이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 때도 있다. 게다가 부정적인 감정은 생각할수록 복리로 쌓이는데,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는 걱정 시간도 없다.


잠자기 전에 오늘 분량의 걱정을 하기 시작하지만 어느새 볼링에 대한 생각이 스멀스멀 내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아니야. 이 걱정을 좀 더 해야 하는데.' 볼링에 밀려 도망가는 걱정을 기어이 다시 데리고 와서 안아보려 하지만 곧 볼링 유튜브에서 장면들이 떠 오른다. 걱정은 맥없이 스르르 소멸된다.


무기력한 나를 움직이게 하고 내 불안과 걱정을 씹어버린 볼링에...

나는 지금 오지게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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