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AI 시대, 인간에게 남는 것

by ZeroInput

나는 1년 넘게 AI와 일하고 있다. 정말 깊고 하드 하게 써왔다.


매일 AI한테 보고서를 시킨다. 시장분석, 경쟁사 조사, 기술 검토, 사업 타당성. AI는 한 번에 수천 자씩 쏟아낸다. 정리도 잘하고, 구조도 잡아주고, 근거도 붙여준다. 사람한테 시키면 며칠 걸릴 일을 몇 분 만에 해낸다.


나는 그걸 읽는다. 빠르게 스캔한다. 중요한 것만 뽑는다. 방향을 잡는다. 다시 AI한테 지시한다. "이 방향으로 더 깊이 파줘." 또 읽는다. 또 걸러낸다. 또 다음으로 넘어간다.


이걸 매일 반복하다 보니, 속도는 확실히 빨라졌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1편에서 썼듯이 나는 AI로 ERP를 8개월 동안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의사결정을 했다. 시장을 분석해서 타깃을 정했고, 기술 스택을 골랐고, 재무회계에서 관리회계로 피벗 했고, 가격 전략을 세웠다. 매번 AI한테 수십 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받아서 읽고, 핵심을 뽑고, 판단하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나중에 누군가한테 설명하려고 하면 기억이 나지 않았다.


"왜 관리회계로 피벗 했어?"


이유는 있었다. 분명히 그때 많은 자료를 봤다. 세무사 시장 구조, 중소기업 기장 실태, 경쟁사 분석. 그걸 다 스캔해서 "이 방향이 맞다"고 판단했다. 그 판단이 틀렸던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 어떤 자료의 어떤 대목이 결정적이었는지, 그게 기억나지 않았다.


결과는 남는데 과정이 사라진다.


처음에는 내 기억력이 나빠진 건가 싶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게 아니었다.


AI와 일하는 방식 자체가 기억을 휘발시키는 구조였다.


AI가 보고서를 쏟아낸다. 나는 빠르게 스캔하고 핵심만 뽑는다. 핵심을 기반으로 방향을 지시한다. 다음으로 넘어간다. 이 사이클이 너무 빠르다. 한 주제에 머무는 시간이 짧다. 깊이 곱씹기 전에 다음 의사결정으로 넘어간다. 예전에는 자료 하나를 찾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자연스럽게 내용이 머릿속에 새겨졌다. 찾는 과정 자체가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3분이면 자료가 온다. 읽고 판단하고 넘어간다. 빠르지만, 남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하나 느낀 것이 있다.


요즘 나는 현실에서 사람한테 말할 때, 예전보다 명령형에 가까운 어조가 나오고, 내 생각을 끝까지 풀어서 말하는 게 어려워졌다.


AI한테는 "이거 해줘", "이 방향으로 정리해 줘", "핵심만 뽑아줘"로 통한다. 간결하게 지시하면 알아서 해준다.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맥락을 모두 공유할 필요도 없다. AI가 알아서 채워주니까.


그런데 사람한테는 그렇게 안 된다.


사람한테는 왜 이걸 해야 하는지, 배경이 뭔지, 어떤 맥락에서 나온 건지를 설명해야 한다. 그래야 이해하고, 납득하고, 움직인다. 그런데 AI와 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설명하는 능력이 조금씩 무뎌지는 느낌이 든다. 간결하게 지시하는 데 익숙해지니까, 길게 풀어서 설명하는 게 귀찮고 어색해진다.


AI가 파트너가 되면서, 인간 대 인간의 소통 방식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이건 나만의 문제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정리해 보면 이렇다. AI와 깊이 일하면서 빨라진 것과 약해진 것이 동시에 생겼다.


빨라진 것. 의사결정 속도. 정보 필터링. 패턴 인식. 방향 설정. AI가 100개의 선택지를 주면, "이거다"를 고르는 속도는 확실히 빨라졌다.


약해진 것. 과정의 기억. 판단의 근거를 설명하는 능력. 길게 풀어서 소통하는 능력. 한 주제에 오래 머무는 인내심.


그러면 이 불균형을 어떻게 봐야 할까.


기록으로 보완하면 될까. 맞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런데 요즘은 기록조차 AI가 더 잘한다. 메모리 기능이 붙은 AI들은 내가 뭘 했는지, 어떤 맥락에서 어떤 대화를 했는지를 기억해 둔다. 그래서 같은 주제를 다시 꺼내면, AI가 이전 대화를 이어서 정리해 준다.


기억도 AI가 하고, 정리도 AI가 하고, 실행까지 AI가 맡기 시작했다.


그러면 인간한테 끝까지 남는 건 뭘까.


1편에서 오픈클로가 나왔을 때의 일이다. 나는 그게 정확히 뭔지 다 확인하기도 전에 느낌이 왔다. "내가 8개월 동안 만든 것들이 이미 쓸모없어졌다."


이건 데이터를 분석해서 나온 결론이 아니었다. 비교표를 보고 판단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먼저 알았다.


메타인지라고 해야 할지, 방향감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있었다. 분석 이전에 오는 감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 AI한테 물어봤다면 아마 이런 식으로 답했을 것이다. "오픈클로와 기존 시스템의 기능을 비교 분석해 보겠습니다. 첫째, 자동화 측면에서..." 논리적이고, 구조적이고, 틀리지 않는 답. 하지만 내가 느낀 건 그런 것이 아니었다. 분석 이전에 오는 직감. 방향이 끝났다는 감각.


6편에서 나는 200달러를 거쳐 다시 효율적 요금 조합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썼다. 그것도 비슷하다. AI가 "이 조합이 가장 효율적입니다"라고 알려줘서 내린 결론이 아니었다. 여러 도구를 직접 써보고, 돈도 내보고, 리밋에도 걸려보고, 코드도 망가뜨려보는 과정을 거치면서 몸에 감각이 쌓였다. 그리고 그 감각이 "이만큼이면 된다"는 판단을 만들었다.


AI는 정보를 준다. 선택지를 만들어준다. 분석을 해준다. 기억도 해준다.


그런데 "이쪽이다"는 대신할 수 없다.

어디로 갈 것인가. 지금 피벗해야 하는가. 여기서 멈춰야 하는가. 이건 끝났는가. 이런 방향 판단은 아직 인간의 몫이다.


나는 AI와 1년 넘게 일하면서, 약해진 것과 더 선명해진 것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단기기억은 예전보다 약해졌다. 설명하는 능력도 줄었다. 한 주제에 오래 머무는 인내심도 줄었다. 이건 부정하기 어렵다. AI가 파트너가 되면서 인간이 잃어버리는 것들은 분명히 있다.


그런데 한 가지는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방향을 잡는 감각이다.


엄청난 양의 정보가 쏟아지는 환경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아닌지를 가려내는 능력. AI가 여러 개의 길을 제시할 때, 그중 어느 길로 갈지를 고르는 능력. 논리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경험에서 오는 직감. 나는 이게 지난 1년 동안 AI와 함께 일하면서 오히려 더 단련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AI는 인간을 더 강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약하게 만든다. 그 사이에서 마지막까지 남는 건 방향감각이다.
앞으로 AI가 더 발전하면 기억도, 분석도, 정리도, 실행도 점점 더 잘하게 될 것이다. 그럴수록 인간에게 남는 건 하나다. 어디로 갈 것인가를 정하는 능력.


그 한 가지를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의 차이. 나는 그것이 AI 시대의 진짜 격차가 될 거라고 본다.






ZeroInput — AI 시대의 경계에서 직접 부딪혀본 것들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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