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월간 회고

2024년, 나의 문장들

by JS Engineer

어느 해를, 어느 날을, 어느 순간을 회고할 때면 추상적이고 연속적인 이미지가 떠오르기보다는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이 떠오를 때가 많다. 몇 마디의 대화, 한 두 줄의 글귀, 더 짧게는 순간의 감정, 더 짧게는 한 프레임의 장면, 소리, 향기 같은 기억들 말이다. 그리고 그런 기억들은 내 삶 곳곳에 점처럼 흩뿌려져 있다.

보통 기하학적으로 점은 '위치'만을 갖는 존재이다. 그리고 선은 그 점의 '궤적'이다. 면은 그것이 둘러싼 '영역'이다. 작년 이맘때쯤, 나는 과거의 기억들과 과거가 될 기억들을 기록하기로 결심하면서, 나의 소중한 '점'들을 글로 남겨야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내 삶을 지탱하고 있는 꼭짓점들이 낡아 부서지기 전에, 일종의 보수 공사를 해주겠다고 생각했다. 마치 역사 공부를 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혹은 에드워드 카의 말처럼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서, 어쨌든 내 삶은 변화하고 더 나아갈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그렇다면 올 해를 마무리하는 지금, 흩뿌려진 기억들 중에 꼭 남기고 싶은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를 돌아보았다. 여러 가지 떠올랐던 순간들 속에는 유독 '문장들'이 많았다. 책 속에서 만난 글귀들도 있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며 들었던 말들도 있었고, 영화 속 대사도 있었다. 그 문장들을 여기에 기록해보려고 한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_윤도영


보통은 이 문장은 타인을 깎아내릴 때 많이 쓰는 말이다. 번외 편으로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다.'라는 문장도 있다. 하지만 올해 나는 나의 추한 모습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서 '나 자신'도 이 문장의 대상이 됨을 새삼 깨달았다. '아니다. 노력하면 바꿀 수 있다.'는 낭만적인(?) 태도와, '바꿀 수 없다. 이 모습을 감추거나, 멋지게 포장할 방법을 찾자.'라는 현실적인 태도로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또 그 과정에서 감사하게도 따뜻한 조언들도 많이 들었다.

나에 대해 냉정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태도와, 나를 나 자신으로 받아들이는 의연한 태도 모두 필요한 과정이다. 그 사이에서 올바르게 균형 잡는 것이 참 중요한 것 같다.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평론가 이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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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인생 전체는 목적을 가지고 전력 투구 해도 안 된다는 걸 아는 나이가 됐고요,

'인간이 그나마 노력을 기울여 할 수 있는 건, 오늘 하루 성실한 거'

그거는 할 수 있는 거 같고요, 그 나머지는 제가 알 수 없죠." _ 평론가 이동진, <유퀴즈 온 더 블록>


평소에 좋아하던 이동진 평론가가 출연한 유퀴즈 온 더 블록을 보면서, 많은 말들이 기억에 남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감명을 받은 문장이다. 어디로 흘러갈지 모를 모순 가득한 내 삶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은 무엇일까? 인간이라면 모두가 해야만 하는 질문이고, 각자의 대답이 있겠지만, 이동진 평론가의 답변이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따뜻했다. 삶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 그리고 초연함.

내가 생각한 성숙한 어른의 모습이었다.



"죽고 싶은 명백한 이유, 살아야 하는 은밀한 이유"

_영화 <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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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에서 볼 만한 영화를 찾다가 우연히 다시 만난 영화. 5년 전에 봤었을 때는 이 정도의 울림이 다가오지 않았었는데, 이번엔 눈물을 쏟으면서 봤다.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오프라인에서 혹은 온라인에서 가끔 마주하면, 세상은 왜 이렇게 잔인한가,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분노하게 된다.

사방이 어둠인데, 한 줄기 희미한 빛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희망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인간들은 그 한 줄기 빛을 움켜쥐기 위해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친다. 그 위태로운 희망, 어쩌면 거짓 같은 희망을 영화적 미학으로 이토록 아름답게 풀어낼 수 있을까? 감동하고, 그것을 이토록 아름답게 동여맨 김혜리 평론가의 한 문장에 감탄했다.



"인생은 아름다운 거야. 강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_한강 <아름다운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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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이 발표되고 나서 한강 작가의 장편과 짧은 글들을 엮어둔 <한강_The Essential>이라는 책을 구매했다. 장편이나 단편 글도 너무 좋았지만, 뒤에 짤막하게 실려 있는 시와 에세이 형태의 글들이 더 인상적이었다. 올해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렸던 적이 거의 없었는데, 이 한 권에서 모아둔 눈물을 다 쏟았다. 좋았던 문장이 너무나 많았지만, 스승이었던 최인호 선생님을 떠나보내며 당신께서 남긴 따뜻한 말들에 대한 문단이 내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인생은 아름다운 거야. 강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네가 그걸 알았으면 좋겠어. 인생은 아름다운 거다. 난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그걸 영영 알지 못할까 봐. 그게 가장 큰 걱정인 것처럼 그렇게 반복하셨다.
나는 신을 믿어본 적은 없으므로, 명동성당에서 집전된 선생님의 상례미사에서 모두가 부활을 합창할 때 이방인처럼 구석에 얼어붙어 있었다.
같은 이유로, 선생님이 마지막에 주님이 오셨다고 딸에게 말을 하신 것을 나는 오직 문학의 일부로 이해한다. 가장 극심한 고통이, 죽음으로 다가오는 순간 그렇게 바꿔 부를 수 있었던 용기에 대해 생각한다. 그 낙차의 서늘함에 대해 생각한다.
_<아름다운 것에 대하여_최인호 선생님 영전에>



"희망은 날개 달린 것, 심연을 건너가는 것"

_김연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심연이 존재한다. 깊고 어둡고 서늘한 심연이다. 살아오면서 여러 번 그 심연 앞에서 주춤거렸다. 심연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건너갈 수 없다."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일, 그것은 어쩌면 기적에 가깝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애초에 나는 당신이 느끼는 감각을 느낄 수 없는데, 내가 어떻게 당신의 감각의 총체로 가닿을 수 있는, 감정에 온전히 공감할 수 있을까.

김연수 작가는 소설이라는 이야기의 힘을 빌린다면 심연을 건너갈 수 있다고, 정확히는 믿는다고 말한다. 마음속 깊은 곳에 아끼는 소설 작품이 하나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말이다. <파이 이야기>를 읽고 믿음이 구원이 될 수 있는 삶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모순>을 읽고, 모순 가득한 삶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찾는 내 삶을 이해했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서 나, 그리고 타인이 안고 살아가는 상실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렇게 오해의 잡초를 걷어내고, 이해의 씨앗을 심는다면 정말 기적은 일어날 수 있을까. 그 의문으로, 그 믿음으로 나는 소설을 읽는다.


"우리를 서로 연결해 주는 언어, 이 언어를 다루는 문학은 필연적으로 일종의 체온을 품게 된다."
_ 한강



그리고 나의 반성


일전에 <모순>이라는 책에 대한 리뷰를 쓰면서, '나에게 글이란, 그릇을 빚는 것'이라는 말을 쓴 적이 있다. 소중한 것을 쓸 때는 그릇을 최대한 크게 빚어서, 언제든지 내가 그 글을 읽는 순간에 넉넉히 채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했던 말이다.

그런 소중한 것들만을 쓰고 싶어서였는지, 아니면 그래도 어제보단 멋진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게을러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책상 앞에서 허비만 했던 시간들이 너무 많았다. 쓰다가 지운 글들도 참 많고, 썼다가도 부끄러워서 구석에 쟁여두기도 하고, 도무지 쓸 수가 없어서 포기하고 잠을 잤던 시간들도 많다. 카페에 가볼까, 글을 쓰러 갔다가 음악만 듣거나 OTT를 보고 돌아왔던 적도 많다.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이나 읽을걸... 올 한 해 가장 많이 했던 후회다. 보통 작년까지는 그런 시간들을 책 읽는 데에 썼으니, 충분히 후회할 만하다.


어쩌다 나에게 글에 대한 욕심이 불쑥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싫지는 않다. 그래서 멈추지는 않으려고 한다. 양이 적더라도, 조금씩, 짧게라도 남겨보려 한다. 설령 지금 나에게 그리 대단하지 않은 기록이더라도, 작은 그릇이라도 많이 빚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시간이 지나 내 글들을 돌아봤을 때, 왜 이렇게밖에 쓰지 못했을까, 후회하면서도 그렇게 돌아볼 순간들이 있음에 안도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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