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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리 Feb 16. 2024

막장 드라마로 배우는 실생활 표현

제5장 번역가의 공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아침 드라마를 보며 하루를 시작했다. 출근 준비로 바쁘신 부모님을 대신해 나는 대부분의 아침 시간을 스스로 준비했는데, 그때마다 나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것은 아침 드라마였다. 만화나 연예 뉴스, 예능 프로그램보다 아침 시간에 나오는 입이 떡 벌어지는 스토리의 드라마만이 내 마음을 움직이는 유일한 존재였다.


또래 친구들은 흔히 작품성이 있다고 불리거나 아이돌 스타가 주연을 맡은 유명한 드라마를 자주 보는 편이었지만, 나는 그저 예쁘기만 한 드라마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다사다난했던 유년 시절을 겪어서 그런지, 백마 탄 왕자님이 나를 구해주는 환상적인 스토리는 현실과 다르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지지고 볶는 일상을 가장 근접하게 보여주는 아침 드라마야말로 최고의 드라마라고 생각했다. 다소 막장다운(?) 구석이 있지만, 현실은 그보다 더 지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깨달아서일까. 모호함 투성이인 현실보다는 차라리 권선징악이 뚜렷한 드라마 속 막장 스토리에 더 고개를 끄덕일 때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나온 소위 ‘막장 드라마’들은 내 취향이 아니다. 내가 대학교 때까지만 해도, 그러니까 ‘막장’이라는 단어가 공공연하게 쓰이기 전까지의 아침 드라마들은 ‘막장 코드’가 있긴 했지만, 너무 막무가내식은 아니었다. 적당히 그럴싸한 개연성이 있어서 투덕거리며 갈등을 겪다가도 마지막에는 악의적인 인물이 벌을 받고 화해와 용서라는 감동의 서사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반면 근래에 나온 ‘막장 드라마’는 그저 자극적이기만 할 뿐, 감동할 수 있는 포인트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정확히 표현하자면 나는 초창기 아침 드라마의 순수함(?)을 가진 막장 드라마를 좋아한다.


감동은커녕 복잡하게 꼬아 놓은 전개에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요소로 가득한 요즘 막장 드라마에 딱히 정을 주지 못하던 때, 나는 그 돌파구를 인도네시아의 드라마에서 찾았다. 


인도네시아의 드라마는 그야말로 신파극이다. 출생의 비밀도 비밀이지만, 종교 갈등, 계층 갈등, 세대 차이 등, 다양한 문화를 가진 인도네시아라는 나라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갈등이 얽히고설키며 하나의 스토리로 등장한다. 그런데 종교적 색채가 강하기 때문에 아무리 큰 갈등이 있더라도 결국 종교적인 가르침에 따라 ‘용서’의 미덕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 경우가 많다. 사실 권선징악 엔딩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악에 대한 처단 없이 눈물과 용서로만 끝을 맺는 인도네시아 드라마가 조금 답답해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내가 그토록 찾던 우리나라 초창기 아침 드라마의 지지고 볶는 일상이 순수하게 드러나 있어서 여전히 그 매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중이다.


어쨌든 여러 갈등이 뒤섞이고 엉켜 있는 인도네시아 드라마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갈등은 바로 처첩 간의 갈등이다. 인도네시아는 이슬람 신자 수가 인구의 90%가 넘는다. 그리고 이슬람교 율법에 따라 인도네시아의 남성은 법적으로 4명까지 부인을 둘 수 있다. 그렇다면, 여성들의 반대는 없을까?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여성 무슬림 동료들 대부분은 ‘속은 상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리고 그중 몇 명은 이 법의 옳고 그름을 분명히 밝히기를 꺼렸다. 하지만 남편이 나 말고 다른 여자를 두 번째 부인으로 들인다고 해도 그의 결정을 존중하겠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종교적인 보수성 때문에 대놓고 여성들의 불편한 심기를 마구 드러내기는 어렵지만, 관련 드라마나 다큐멘터리에는 두 번째, 또는 그 이상의 부인을 들이려는 남편 때문에 남몰래 눈물을 흘리는 여성들의 고통이 잘 드러나 있다. 


인도네시아 드라마에 흥미를 느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우연히 Istri Kedua(두 번째 부인) 라는 인도네시아 내 유명 방송사의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정확히 몇 화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 한 회차만으로도 예전에 내가 좋아했던 아침 드라마의 여운이 떠올라서 곧바로 1화부터 찾아서 보는 열혈 애청자가 되었다. 일단 본처로 나온 여자 주인공이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였고, 이렇게 훌륭한 본처를 두고 그녀의 비서와 바람을 피우며 뻔뻔하게 행동을 이어가는 남편 캐릭터의 모습에 열불이 나서 드라마를 끊을 수가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남편과 본처는 실제 부부이기도 한 유명한 배우들이었는데, 이런 드라마를 찍고도 현실 결혼생활을 행복하게 이어 나가는 게 대단하다고도 생각했다. 


어쨌든 나는 인도네시아 방송사 앱으로 그 드라마를 보면서 심하게 감정 이입을 하다가도 모르는 표현이 나오면 잊지 않고 메모했다. 그리고 곧바로 친한 현지인 친구 Mia에게 메신저로 물어봤다. Mia는 내가 인도네시아 (젊은 층들은 안 보는) 중년층의 막장 드라마의 애청자라는 사실에 폭소했다. Istri Kedua의 언어 교육적 효과는 잘 모르겠지만, Mia는 외국인이 인도네시아 젊은이들도 잘 모르는 자국의 드라마를 애청해 준다는 점을 신기해하고 고마워했다. 나는 마치 옆에서 쫑알거리듯 시도 때도 없이 Mia에게 질문했다. 드라마 새 에피소드가 나오는 날이면 그날이 바로 Mia와의 질의응답 시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매번 정성스럽게 답변해 주기 쉽지 않았을 텐데, Mia는 나의 궁금함을 해소해 주려고 항상 애썼다. 덕분에 에피소드가 많아서 내용도 살짝 진부하다고 느낄 무렵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모든 에피소드를 시청하는 애청자로서의 (방송사는 모르는, 나만 아는) 의리도 지킬 수 있었다. Istri Kedua의 높은 시청률에 콩알만큼이나마 기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덕후는 행복하다. 


하루 중 유일하게 몰입하는 시간 : 밥 먹고 옆으로 누워서 드라마 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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