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린지와 쿠레이의 음악을 들을며 책을 읽었다. 요즘 2000년대 초반에 유행하던 일본 음악을 요즘 꽤 찾아 듣는다. 지금은 완전히 죽어버린 일본 음악계지만 그때 당시만 해도 시부야 케이 라는 이름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을 시기의 음악들. 일본 음악계의 제2의 황금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유행의 영향을 받아서 롤러코스터나 클래지콰이 같은 기라성 같은 밴드들이 줄 지어 나왔으니 말이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사이의 나는 이러한 세계적인 흐류는 몰랐지만 이런 비슷한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때의 플레이리스트에는 지금 내가 좋아하는 키린지와 쿠레이는 몰랐고 없었다. 대신 프리템포와 DJ오카와리를 자주 들었다. 왜 좋아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특유의 차분하지만 세련된 느낌이 좋았던 느낌만 어렴풋하게 남았다.
15년 가까이 진행되고 있는 디깅의 역사를 훑어보는데 문득 징그러웠다. 강산이 한 번은 변할 시기동안 여전히 나는 비슷한 취향의 음악을 좋아하고 있구나. 그 사이에 잠깐 잠깐의 외도가 있었고 정말 뜬금 없는 아티스트 ( 이소라를 좋아하는 이유는 문학적 취향과 부합해서이지 음악적 취향과는 사실 거리가 멀다. )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그 나물에 그 밥이고 친구들 표현을 빌리자면 힘 없이 흘러가는 지루한 곡일 뿐이니 말이다.
가끔 친구들과 플레이리스트를 공유하다보면 나처럼 송진내 짙게 깔리는 소나무 취향과 시대의 흐름을 잘 반영하는 멜론 탑 100으로 나뉘곤 한다. 전자랑은 잘 맞으면 그 시간이 천국이지만 안 맞으면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다. 맥 빠지는 기타 리프가 그들에게는 고문이 따로 없을 것이며 알아 듣지도 못하는 단어를 빠르게 내뱉는 노래는 나에겐 영어 듣기나 다름 없다.
그러다보니 보통은 도박을 할 빠에는 평이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후자 친구들의 플레이리스트를 선호한다. 큰 호불호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시간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타인들도 비슷한 선택을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사람은 다들 비슷하니까. 한 번은 소개팅에 나가서 이런 말도 들었다. ‘저는 큰 장점 있는 사람 보다는 큰 단점이 없는 사람이 좋아요. 그냥 그냥 저냥 저냥. 피곤하지 않게 흘러갈 수 있는 사람이요.’ 송진내 풀풀 나는 나에게 던질 수 있는 가장 유효하며 정확한 거절의 의사를 저렇게 밝히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취향이 확고하다는 것은 확실히 삶의 난이도를 높인다. 대충 좋은거 몇 개 즐기다 말면 되는데 굳이 그거랑 비슷한 또 다른 것을 찾겠다고 파고 파고 또 파는 오타쿠 기질까지 합쳐진다면 그것은 흔히 말하는 지팔지꼰이다. 보통 내가 짙다는건 아주 높은 확률로 내것이 아닌 것에 배타적이다 라는 말과 동의어인 경우가 많다. 어휴 글로 쓰기만 했는데 내가 나를 보자니 마음이 답답해져 온다.
특히 이런 경우에는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다. 취향을 나노 미터로 들이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옷을 예로 들자면 대충 예쁘다->입자의 알고리즘으로 흘러 가는 것이 아니다. 핏, 재질, 가격, 브랜드, 유행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어야 한다. 유니클로 가서 덥석 집어오면 오분도 걸리지 않을 흰색 반팔 티셔츠를 3~4일 씩 고민해가면서 고를 때면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나 싶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이걸 당장 때려치고 싶지만 그럴수도 없다. 이건 내가 그만두고 싶다고 그만둘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본능이고 그냥 내가 이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취향은 불가역근이다. 그냥 그렇게 타고 나는거지 누군가의 잘못도 아니고 그냥 내가 업고 가야할 업보라고 생각하는 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불행한 어린양을 어여쁘게 생각하시어 ‘내 너에게 인생의 난이도를 확 낮출 기회를 주겠다. 지금부터 내 손을 잡으면 멜론 탑100의 귀를 가지게 되며 옷 이라는건 그저 추위와 더위를 이길 수 있으면 된다 라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어때 나와 거래를 다시 하겠는가?’ 라고 기회를 주신다면 나는 그 손을 덥석 잡을 수 있을까?
고민 할 것 같다. 편하고 좋은 길 앞에서 나는 한참이나 서성일 것이다. 갈 수 있는 길이 효율적임이 분명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효율적인 것은 가장 선호된다. 얼마나 좋은가. 시간도 돈도 에너지도 절약할 수 있다. 타인으로 부터 까탈스러운 인간이라는 호칭을 붙여지지 않아도 되며 많은 사람들을 폭넓게 이해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어쩌면 내가 살아보지 못한 세상을 상상하지 못하기에 내가 가진 행복이 가장 좋을 것이라는 아집이나 편견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런 취향이 없기에 느낄 수 있는 평온함이 주는 기쁨을 나는 가히 상상할 수 없기에 결국 나는 익숙한 즐거움을 선택할 것이다. 까탈스럽게 고른 것들이 취향의 과녁 중간을 탁 하고 관통할때만 느낄 수 있는 어마어마한 카타르시스를 나는 잊지 못하기에 결국에는 행복한 지옥에 머무르는 선택을 하고야 말 것이다.
조금 더 꼰대스러운 이야기를 하자면, 어떠한 류의 글을 쓸 때면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첫 번째인 일반론적인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 하자면 인생의 즐거움은 비효율에서 나오는 것임을, 쓸데 없는 것에 정성을 다 할 때만 순수한 즐거움이 만들어진다 아포리즘을 맹신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우리는 왜 선물을 주고 받을까. 내가 필요한 것을 내가 사면 그만인데 왜 나는 굳이 너에게 그것을 받고 싶어하는 걸까. 거추장 스럽고 비 효율적인 이러한 물물 교환 속에서, 미분하고 다시 적분하면 생기는 적분 상수처럼 마음속에 무엇인가가 꾸룩하고 생겨난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고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 똑같은 말인가? ) 결국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것들은 대부분 그런 층위의 감정들이였기 때문이다.
끝까지 피곤하다. 이것 또한 오랫동안 쌓여온 취향들이 만들어낸 알고리즘이 분명하기에 지팔지꼰은 희대의 명언이며 삶의 진리임이 틀림없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유튜브 알고리즘을 통해 흘러나온 새로운 음악 ( 한국도 일본도 아닌 대만 밴드의 음악이다 ) 을 앨범 통째로 들어야 겠다고 다짐하는걸 보면 말이다. 또 이렇게 나의 저녁과 새벽은 순삭이 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