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가은 <세계의 주인>, 2025
어른의 돌봄에서 밀려난 곳에서 용감하게 ‘변두리 세계’를 쌓아 나가는 주인. 어른들은 다 이해했다는 듯, 잘못을 뉘우쳤다는 듯 주인을 바라보지만 그 순간에도 막냇동생 해인의 온전치 못한 세계는 흘러간다. 해인의 익살스럽고 능청맞은 얼굴 속에 주인이 겹쳐 보인다. 그 떫은 웃음은 이른 나이에 어른들의 불안과 고민을 짊어져야 했던 그들만의 ‘살아남기’이다.
피해자다움을 종용하는 사회
자기만의 세계에서 ‘주인’은 어떤 역할로 주인공일 수 있는가? 주인만 똑 떼어내어 들여다보고자 하면, 여느 십 대와 다르지 않게 해사하고 활기찬 학생이다. 몸장난 하는 걸 좋아하고, 이성관계 이야기에 볼이 발그레해진다. 그런데 왜 그를 둘러싼 사회는 ‘주인다움‘ 대신 피해자라는 배역을 권하고, 그에 걸맞게 행동하길 기대하는가.
우리는 모든 현상에 대해 그럴듯한 원인을 조명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착각 속에 산다. 그런 가정은 절반은 가당할지 몰라도, 짐짓 어떤 세계 속에선 오류다. 이곳 주인의 세계 속에서 그렇다. “주인의 뭉개고 넘어가지 않는 성격, 과장스러운 모습이 어쩌면 피해자여서가 아닐까?” 혹은 반대로 “성폭력은 피해자의 삶을 송두리째 망친다.”처럼 비좁은 말뭉치 속에서 일어나는 해석들이 주인을 자꾸만 수세에 몰아넣는다.
그들에게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할까라는 물음으로 이 영화를 찾았다면, 애석하게도 영화는 그에 대한 해답을 갖지 않는다. 대신 남들보다 더 사람답게, 묵묵히, 편견과 동정을 딛고, 괜찮다는 걸 ‘증명’해내며 살아야 하는 주인을 통해 또 다른 모습의 자성을 이끈다.
“지금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말은 “때가 되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는 약속을 함축한다. 주인이 성폭력 피해자였음이 드러난 후, 주인을 함부로 피해자라는 프레임에 가두어 재단하고 평가하려 하지 않는 단짝 친구 유라의 한 발짝 물러섬이 따뜻하다.
영화를 세상 밖으로 꺼내 준 용기에 감사하다. 젠더에 대한 담론이 종종 극단적 갈등으로 번지는 요즘이기에 독립 영화가 만들어 내는 용기 있는 파동과 중립적인 메시지가 더욱 소중하다. 윤가은 감독의 영화엔 여러 수식이 붙지만, 이번 작품은 스크린 너머에서 의지적으로 살아가는 또 다른 ‘주인’의 마음을 감히 헤아릴 수 없는 탓에 영화의 가치를 논할 수는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