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나도 가벼워질 차례다
우울증이 조금씩 나아지자, 이제는 모든 게 괜찮아질 줄 알았다.
마음만 다시 세우면, 앞으로 열심히 살면, 그걸로 충분할 거라고 믿었다. 몸은 좀 무거워도 마음이 버텨주면 된다고. 그게 내 나름의 논리였다.
근데 그게 큰 착각이었다.
감정만 정리된 것이었다. 그제야 후폭풍처럼 나타난 기계적인 수치들이 나를 반겼다.
종합검진에서 췌장암 수치가 높다는 말을 들었다.
췌장염도 아니고 암?
암?
암이라고?
낯선 단어를 듣는 순간 겁이 덜컥 났다.
그러니까 내 몸에서 암 수치가 올라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몸에서 고통의 아우성을 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머리만 개운해졌지 몸은 아직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아아.....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가족 중에 암 환자는 없으니 내게 암이란 단어는 없을 거란 안이한 착각이었다.
추가로 CT를 찍어 보자는 소견까지 받았다. 의사가 말하는 동안 나는 그냥 앉아서 듣고 있었는데, 말이 귀로 들어오는데 머릿속까지는 닿지 않는 느낌이었다. 잠깐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리고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마치 눈먼자들의 도시에 주인공이 된 느낌이랄까.
나 지금 애들 혼자 키우는데.
죽으면 안 되는데.
아이들 맛있는 것도 사줘야 하고, 계절마다 옷도 바꿔줘야 하고, 속옷도 챙겨줘야 하고, 말랑이, 스퀴시, 로블록스 캐시 충전도 해줘야 하는데.
치킨도 사줘야 하고, 큰애는 초밥이랑 연어 햄버거. 작은애는 고기도 사줘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그런 것들이 먼저 떠올랐다. 거창한 것도 아니고, 그냥 아이들 일상에 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 아직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나는 아직은 돈을 벌어야 하고 쉴 수 없는데.
그제야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왜 이렇게 살을 찌웠을까. 왜 내 몸을 이렇게 방치했을까. 그제야 처음으로, 몸을 돌보지 않은 지난 시간들이 후회로 밀려왔다. 뒤늦은 후회였지만, 그 후회가 진짜였다.
결과는 가혹했다. 고지혈증, 높은 간 수치, 낮은 면역력. 먹어야 하는 약은 네 가지로 늘었고, 세 달마다 피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진단까지 들었다. 약봉지를 받아 들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이게 내가 나한테 한 짓이구나, 싶었다.
아기곰 둘을 남겨두고 갈 수는 없었다.
그 생각 하나가 나를 멈춰 세웠다. 살고 싶다는 말보다, 아이들 곁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 더 선명하게 박혔다. 이제는 진짜 바뀔 때가 되었으니.
근데 막상 마음을 먹으니 앞이 막막했다. 뭘 할 수 있을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93kg의 몸으로, 약을 네 가지나 먹으면서, 혼자 아이 둘 키우면서, 대체 어떻게. 답이 없는 질문만 빙글빙글 돌았다.
그래서 그냥,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것부터 했다.
카카오톡 상태메시지를 바꿨다.
[다이어트 시작. 약속 안 잡아요.]
별거 아닌 것 같았다. 실제로 별거 아닌 행동이었다. 그런데 그 작은 한 줄이, 고도비만 다이어트를 지도하는 관장님과 나를 이어 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변화는 이렇게 시작되는구나.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아주 작은 행동 하나에서.
관장님께서 내게 물었다.
"다이어트해 볼래요?"
"네… 근데 어떻게요? 저 사실하고 싶은데 여윳돈이 없어요."
"괜찮아요. 도와줄게요. SNS에 매일 글을 쓰는 거예요. 해볼 수 있겠어요?"
글을 쓰라고. 내 몸무게를, 내 변화를 전부 공개적으로?
나는 17년 동안 한 회사에 다녔다. 그만큼 주변인들이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항상 똑같은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지내고 주변에 알고리즘과 내 주변의 지인들의 알고리즘이 비슷했다.
게다가 SNS라니 나는 팔로워의 80%가 회사 사람들이다. SNS는 회사와 연결돼 있었고, 그 말은 회사 사람들이 전부 내 몸무게를 보게 된다는 뜻이었다. 17년 동안 쌓아온 그 사람들한테, 내가 93kg이라는 걸, 몸이 망가졌다는 걸, 이제야 정신 차렸다는 걸, 다 보여줘야 한다는 뜻이었다. 세상에.
너무 망설여져서 뒤를 돌아봤다.
그 순간, 아기곰 둘이 보였다.
망설임은 거기서 끝났다.
"할까요…?"
아니.
"할래요. 꼭 뺄래요."
나도 건강해지고 싶었다. 아기곰이랑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부끄러운 것보다 그게 더 컸다. 남들 시선보다 아이들 손을 잡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렇게 나는 SNS와, 그리고 관장님과 함께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의지박약인 줄만 알았던 '썬이'가 조금씩 단단해지는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1년이 지난 지금은 연락을 하지 않지만, 시작할 수 있게 도와주신 관장님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관장님, 손 내밀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꾸벅. 몸도, 마음도, 정신도 덕분에 건강해지고 있어요!
스승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조만간 인사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