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의 <옥상에서 만나요>를 읽고
몇 년 전 독서 모임에서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를 읽었다. 당연히 이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여기도 힘들고 거기도 힘들면 그래도 말이 통하는 여기가 낫지 않느냐'는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았다. 그때 든 의문이 '같은 말을 쓰면 말이 통하는가?'였다. 어쩌면 신은 바벨탑을 쌓아올리는 인간을 징치하기 위해 서로 다른 말을 쓰게 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끼리 더 뜻이 통하지 않도록 한 것이 아닐까?
정세랑의 소설에는 서로 다른 문화의 교류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그런데 다른 말을 쓰는 사람을 향한 작가의 시선이 긍정적이다. <웨딩드레스 44>의 마흔두 번째 여자. 'honor’를 'horror’로 잘못 읽은 비영어권 남자를 보며 너는 나를 언제까지고 무섭게 만들지 않을 것, 이라고 생각한다. <효진>의 나. 판다 동영상을 무한 반복해서 보고 있는 중국인 남자친구를 보며 너도 힘들구나, 라고 느낀다. <알다시피, 은열>의 정효. 범아시아적 우정 속에서 케이제이의 키스를 이해하고, 타케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해 주는 완에게 손을 내민다. <이마와 모래>에서 통번역으로 대식국과 소식국의 화해를 중재하는 남녀. 사태가 진정된 것은 그들의 서툰 외국어 실력 덕분이 아니었다. '빈말 같은 거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옥상에서 만나요>에 이르면 아예 다른 세계의 존재를 소환해 위안이 아닌 구원을 얻는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것은 <해피 쿠키 이어>였다. 귀는 소리를 듣는 신체 기관이다. 아마도 가장 자주 듣는 소리 가운데 하나는 사람의 말일 것이다. 그런데 말을 들어도 뜻이 통하지 않는다면?
한국말이 서툰 이스마일은 발음에서 실수를 하기도 하고(구치적, 서초, 채취), 단어의 의미를 혼란스러워 하기도 한다(밤 과자, 빨갱이, 독도). 그런데 이런 낯설음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말 자체가 아니라 대화의 단절과 소통의 부재(오일 프린스, 명예살인, 향후 10년 중동 정세, 민주국가, 김치국물)다.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끼리는 말이 통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뭐가 문제인지 느낄 수 없다. 외국어는 '불완전하다'라는 자각이 있기 때문에 이해하려 노력이라도 한다. 그래서 화자는 모든 게 이상할 것이 없지만은 않은 이방인이 적합하다. '외국어 수준을 판가름하는 기준은 거짓말 실력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민을 가더라도 그 나라 말이 서툰 쪽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사고로 일부가 날아간 이스마일의 귀에서는 과자가 자란다. 사람의 말을 듣는데 그 사람과 통할 수 없다면 귀는 원래의 기능 가운데 일부를 잃어버린 것이 된다. 물론 귀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렇다면 여자친구를 살찌울 과자로서 역할이라도 보태야 하지 않을까? 한국을 떠날 때가 되면서 그의 귀는 더이상 자라지 않는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브론스키에게 마음을 빼앗긴 안나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역에 마중나온 남편을 보았을 때 남편의 귀가 이상하게 생겼다고 느낀다. 이에 대해 '안나의 무의식을 통해 평소 남편이 주위 사람들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사랑과 죄책감 사이에서 합리화가 필요한 안나에게 남편이 싫어질 이유는 논리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어야 자연스럽다. 남편이 어찌할 수 없는 부분, 남편과의 사랑에 아무 문제가 없는 부분이라면 귀의 역할이 아니라 모양이어야 한다. <해피 쿠키 이어>와는 반대의 경우라고나 할까.
이스마일의 여자친구에게는 왜 콩 알레르기가 있어야 했을까? 콩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소수다. 알레르기가 없는 사람은 있는 사람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여자를 위해 요리를 하고 귀를 먹이고 주사제를 구하는, 이스마일의 '오바'의 배경에는 옳은 일을 했기 때문에 회사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여자친구가 희귀 새 같은 소중한 존재라는 인식이 있다. '옳은 불화로 기우는 개체들을 공동체는 소중히 여겨야 할 듯한데 보통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토록 소중한 존재를 왜 원하지 않는지, 괴롭히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세계에 막 도착한 사람이 그곳에 살던 사람과 처음 만나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 그들은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각자의 언어로 상대의 말을 되풀이한다. 그들이 친구가 될지, 아니면 적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시작은 똑같이 말하는 것이다. 이스마일은 한국을 떠날 때 여자친구가 한 마지막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럴 땐 똑같이 말하는 게 제일 좋다, 고 그는 생각한다. 그래서 말한다. "언제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