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너울의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를 읽고
<논어>에서 인상 깊었던 구절이 '후생가외(後生可畏)'였다. 후생의 장래가 나의 지금만 못할 줄을 어찌 알겠냐는 공자님 말씀인데 꼭 학문만을 두고 생각할 얘기는 아닌 것 같다. 젊은이들이 만들 미래는 우리가 만든 현재보다 낫지 않을까? 전세대가 경험한 시대의 주도적인 가치관은 후세대의 새로운 가치관에 의해 극복되어지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후생은 곧 내가 되어 또 다른 후생을 경외하게 될 것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공자 같은 성현께서 굳이 사족을 달았으니...젊은이가 나이가 들어도 유명해지지 않으면 더이상 겁내지 않아도 된다!
심너울의 소설은 SF다. 내게 익숙한 SF는 대개 이야기에서 현실을 제거한다. 그 편이 현실을 더 뚜렷하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너울의 SF는 '현실적'이다. 비현실적이라기에는 너무 가까운 미래의, 낯설지 않은 한국을 무대로 하고 있고 소재들이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은유라기 보다는 직설처럼 느껴졌다.
양윤이라는 남자의 에어팟은 오베라는 남자의 아이패드와 많이 닮았지만 그들의 분투기는 무척 다르다(아이폰과 맥북을 쓰는 나라는 남자는 전혀 분투하지 않는다!). 대화형 인터페이스와 키보드의 차이일 수도 있겠고, 못마땅함과 어울리고 싶음의 사이에서 어디쯤 서 있는가의 차이일 수도 있다. 어쨌든 엔딩이 완전히 다르다. 현실은 아마도 오베보다 양윤에 가까울 것이다. 애플 스토어에서는 '어르신'이었다가 대화형 인터페이스로 대화를 하지 못하고 결국 '죄다 진상인 늙은이'로 전락해, 바라지 않았던 노추를 억울한 심정으로 곱씹게 되는.
어쩌면 '꼰대'였을 수도 있고 '노친네'를 향해 가고 있는 처지에서 말하자면 젊어서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않겠다"고 다짐한 적은 없지만 나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은 있었던 것 같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편익을 누리는 것이 크게 힘들지 않고, 그런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면)이 가져온 사고방식의 변화에 적응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후생가외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소설 속 양윤의 곤경이 별로 와닿지 않는다.
사고실험이라는 면에서 좀 다른 가정도 있을 수 있겠다. 예를 들면 정해진 연령에 이르면 신기술의 향유가 아예 원천적으로 금지되는 세상이라든지, 한몸에 젊음과 늙음이 혼재해 있는 인간의 존재 같은 것들. 그도 아니면 젊어지는 샘물 동화처럼 아예 늙음에서 젊음으로 역류하는 상황도 재미있을 듯하다. 그렇게 된다면 늙는다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게 될까? 추하게 늙는다는 것의 의미는?
심너울의 소설을 젊은 독자들이 좋아하는 이유로 작품에 흐르고 있는 유머와 위트, 풍자를 들 수 있겠다. 외삽이 어떻고, 사고실험이 어떻든간에 재미있으니까. 어슐러 르 귄이 말했다.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그것이 모두 허튼소리라는 것을 숙지해야만 하며, 그러면서도 읽는 동안에는 그 안에 담긴 모든 것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마침내 그 소설을 다 읽었을 때, 훌륭한 소설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읽기 전과 조금은 달라졌음을, 조금은 바뀌었음을 깨닫게 되리라"고. 심너울의 소설을 읽고 나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읽는 동안에 즐거웠으면 그것으로 만족이다. 젊은 작가의 독특한 SF를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나도 대단하지 않은가? 후생가외라.